개인적인 기념일
지난 일요일인 9월 10일은 나에게 일종의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 전날인 9월 9일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두 세개의 행사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날이었다. 무거운 짐을 나르기도 했고, 엄청 더운 날씨에 땀을 계속 흘리며 야외에 오래 서있기도 했다. 그 무더위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좀 괜찮았을텐데. 더워도 너무 더웠던 토요일 오후에 태양열 조리기로 메추리알 300개와 계란 60개를 삶아서 나눠줬다. 혹시라도 날이 흐려서 준비한 재료들을 다 못 삶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는 달리 아침부터 햇빛은 쨍쨍했고 정오가 되기 전에 이미 준비한 재료의 절반 가까이를 다 삶았다. 사람들은 간단한 원리로 이렇게 물이 끓고 계란을 삶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문제였다. 태양열 조리기의 가운데는 물이 끓을 정도로 온도가 높다. 잘못 손을 댔다가는 화상을 입는다. 나도 오랫동안 이 조리기를 사용하면서 몇 차례 가벼운 화상을 입기도 했었다. 뭣 모르고 달려드는 아이들을 말리기 위해 나는 그늘에서 쉬지 못하고 땡볕에 조리기 근처에 서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정말 빨랐다. 저 한참 떨어진 그늘에 있다가 아이들이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뛰어오면 이미 늦었다. 암튼 그 더위에 그 땡볕에 오래 서 있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 운영하던 부스를 철수하면서 1톤 트럭을 빌려와 짐을 싣고 옮긴 후에, 저녁 행사를 위해 그 장소에 다시 갔다. 저녁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이뤄지는 몇 개의 프로그램을 내가 준비했었고, 내가 섭외한 분들이 각각의 장소에서 동시에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다른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무거운 짐들을 또 옮기고, 사람들이 제 시간에 오는지 연락하는 등 일을 했다. 밤 10시가 되어 전체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에 또 참여해야 했고,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는 10시 반쯤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진행팀의 테이블, 의자, 그리고 자잘한 짐들을 옮겨야 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무릎과 발목의 피로가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거의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육체가 아침 일찍부터 15시간 넘게 이어진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와서 남은 짐들을 정리하고 철수하는 사람을 정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이만 가야겠다고 의사를 표시하며, 죄송하지만 내일(일요일) 아침에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육체노동을 하게 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 단계에서 많은 역할을 했으니 좀 봐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암튼 그렇게 현장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데, 집까지 걸어가야 할 한 30분 정도의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발이 무거워 자꾸 질질 끌렸다.
마침 아까 저녁 때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한 후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만약 여기서 자야 할 상황이 되면, 밤 늦게 사람들 몰래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요.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돌아가면 모를 거 아냐?" 그러니까 여기 현장에서 잠을 자야 할 상황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자기 집에 와서 편하게 자고 가라는 말이었다. 비록 현장에서 안 자도 되는 상황이어서 집에 가려고 했지만, 집이 너무 멀게 느껴질만큼 피곤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너무나 흔쾌히 어서 오라고 했다. 배 고프지 않냐고 묻길래, 배 고프다고 했더니 뭔가 만들어 놓겠다고도 했다.
암튼 그렇게 후배 집에서 하루 자고, 그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멍하니 둘이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 그 친구가 "뭐 할까요?" 묻길래, 나는 건성으로 "어디 놀러나 갈까?" 했다. 그 녀석이 몇 달 전에 산 차가 있는데, 아직 운전이 조금 서툴다고 할 정도라서 그 친구도 내가 옆에 타고 코치해주기를 바라곤 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 후배가 해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한 동안 누워서 다시 티비를 봤다. 그러다 문득 "자전거를 배웁시다." 라고 하길래, "응, 그럴까?" 하고 자전거를 타러 이동했다.
나는 오십이 가까운 사십대 중반의 나이인데, 아직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릴 때 가난했던 우리 집엔 자전거가 없었고, 자전거를 타볼 기회도 없었다. 자전거 라는 물건은 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이라 저걸 못 타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후배들이 내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걸 알고 놀려댔다. 나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그 사실을 들먹이는 건 귀찮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배워야지 생각만 했다.
처음 환경운동을 시작한 건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였고, 졸업과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환경단체의 지역 조직에 들어갔다. 그때가 2003년으로 20년 전이었다. 그해 봄 아직 신입활동가였을 당시에 선배 활동가가 내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다. 지하철 역으로 한 두세 정류장 정도 거리의 어딘가 사무실에 가서 서류를 받아오는 일이었는데, 자전거 위치를 알려주며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면 금방 갔다 올 거라고 했다.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못 하냐며 무시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말을 멈췄다. 어쩔 수 없이 타지도 못하는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4층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전거 라는 물건은 크고 무거운 것이구나.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 보려고 시도를 했다. 비틀비틀. 양 발을 패달 위에 올리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패달을 밟아 앞으로 나가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발로 자전거를 밀고 앞으로 가면서 계속 어떻게든 양 발을 패달 위에 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비틀거리다가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넘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버티기도 하면서 골목을 나아갔다. 이대로라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심부름을 시킨 선배가 이상하게 여기겠다고 생각할 때쯤에 "어!" 우연히 양 발이 패달 위에 올라갔다. 비틀거리며 다시 넘어질듯 균형을 잃으려 할 때 나는 패달을 밟는데 성공했고,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다음 발이 패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와! 이게 되네." 난생 처음 자전거를 탄 순간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골목길은 차도와 만났다. 나는 이 비틀대는 상태로 차도를 건너거나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지날 자신은 없었다. 마주 오는 차에 갖다 박거나, 옆을 지나는 사람을 덮치지 않을까 겁이 났다.
결국 나는 그 자전거를 끌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4층에 자전거를 돌려 놓았다. 나는 전철을 타고 심부름을 다녀왔고,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질문에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타겠더라구요. 다시 돌려놓고 전철로 다녀오느라 오래 걸렸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 봄날로부터 20년이 지난 올해 가을이 될 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자전거를 다시 타지 않았다. 타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우려고 시도했을 때에도 아빠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 그냥 뒤에서 잡아주는 역할만 하겠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는 요령은 엄마나 다른 사람한테 배우라고 했다. 암튼 그렇게 자전거는 나와는 계속 인연이 없는 물건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는데, 최근에 내 주위 몇몇 사람들이, 특히 친하게 지내는 후배들 몇 명이 자꾸만 내게 자전거를 배우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금방 배울 수 있다고, 얼른 배워서 자기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자고 권하곤 했다. 나는 약간 귀찮다는 투로 배울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달리기를 하자고 역으로 권하곤 했다. 그 중 한 후배는 내가 자전거를 배우겠다고 약속하면 자신도 달리기 모임에 들어오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무료한 일요일에 나의 자전거 이슈를 잘 아는 후배가 문득 권한 한 마디를 나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자전거를 타러 갔다. 앞서 달리기 모임과 자전거 배우기를 거래했던 후배도 마침 그 근처에 있어서 오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두명은 자전거를 무척 잘 타는 사람들이었다. 양 손을 다 놓고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 나에게는 거의 서커스 같은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게 자전거를 배우라고 종용했던 사람들에게 나는 계속 20년 전의 저 경험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한참을 비틀거리다보니 어떻게 타기는 했었다고. 그래서 두 사람은 내가 금방 배울거라고 예상했다. 내게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출발하면서 올라타고 양 발을 패달에 올리는 것까지만 해보라는 것이 첫 주문이었다. 나는 그냥 한 번에, 그러니까 첫 시도에 그 일을 쉽게 해냈다. 몰론 내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다. 약간 긴장한 상태로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어떻게 발을 올렸는지도 모르게 발이 올라갔다. 그 후로 그들은 방향을 바꾸는 법과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알려주고, 주차금지 콘 두 개를 세워놓고 그 사이를 8자로 계속 돌라고 시켰다. 시키는 것들을 어떻게든 해내기는 했지만, 그냥 앞으로만 가는 것과 방향을 틀고 자연스럽게 곡선으로 도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자전거 안장이 닿는 사타구니 부위가 생각보다 많이 아프고 불편했다. 아, 자전거는 서울시의 공용 자전거인 따릉이를 이용했다. 처음에 자전거나 배우자고 권유했던 그 후배가 1년 이용권을 내게 선물해줬다. 내가 아프다고 하니, 따릉이는 안장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은 안장을 사려고 돈을 많이 쓴다고도 했다. 암튼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자전거를 탄 날이 되었다. 두 사람은 내가 생각보다 잘 한다고 칭찬하면서 불광천 변 자전거 도로를 달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불광천까지 가기 전에 사고가 날 것 같다고 자신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두 명 사이에 내가 달리면 괜찮을 거라고 두 사람이 앞 뒤에서 사고를 막아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대로 두 명 사이에서 골목을 달렸다. 도중에 자꾸만 사람들이 나타나고, 차들이 나타났으며, 리어카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속도를 줄인 뒤에 한 발을 땅에 짚고 멈췄다가 가곤 했다. 아! 내가 드디어 제대로 자전거를 타는 구나 하고 약간의 성취감을 느끼며 패달을 밟다가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앞선 후배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는 사람을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길가로 붙어서 달렸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속력을 줄이려고 뒷브레이크를 슬며시 잡기 시작했는데,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원하는대로 속력이 줄지 않아서 조금 당황하며 좀 더 힘을 줘서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여전히 속력이 그대로였다. 설마 그새 고장이라도 난 걸까?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사람을 덮칠지도 몰라 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왼발로 땅을 짚고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멈추기엔 속도가 너무 빨랐던 자전거는 뒤집히듯 쓰러졌고, 나는 다가오던 보행자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후배들은 내가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금방 자전거를 배워서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 아무리 금방 배우리라 예상을 했어도 이렇게 단번에 바로 성공할 줄은 몰랐던 듯. 한번쯤은 가볍게 넘어지는 연출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넘어짐은 그렇게 가볍지는 않았다. 땅을 짚은 내 왼손에는 작은 찰과상 두 개와 긁힌 자국이 생겼고, 무릎에도 작은 상처가 몇 개 생겼다. 금방 피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너무 놀랐던 나는 넘어진 상태로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그 상태로 나보다 더 놀란 마주오던 그 보행자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여러번 사과를 했다.
불광천까지 가려던 시도는 이 사고로 인해 중단되었다. 우린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고, 마침 근처였던, 어제 내가 하루 묵었던 그 후배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지막에 혼자 넘어지는 작은 사고를 겪긴 했지만, 어쨌든 자전거를 배우겠다는 시도는 대성공이었다. 따릉이를 반납하기 위해 다시 자전거를 타보니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은 아니었다. 아까 그 순간 내가 긴장해서 실수했던 거였다. 자전거를 타는 것 자체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자전거를 몰고 도로를 나가거나, 사람들과 차량이 많은 곳을 달리는 일은 어렵겠다. 이건 달리 말하면 아직 자전거를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한동안 달리는데 성공한 날이라는 의미로는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평생 자전거를 못 탔는데, 단번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다니. 이 정도면 기념일이라고 여길만 하다고 생각했다.
대중교통 인상과 기후동행카드
기후위기의 주 원인은 온실가스이고,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행위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일이다. 주요하게는 석탄화력발전소가 있고,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이 있다. 자가용의 이용은 기후위기를 심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후위기 대응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자전거와 대중교통 이용이다. 얼마 전에 서울시는 대중교통 요금을 인상했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기 위해 요금을 인하하거나 무상교통으로 가지는 못할 망정, 요금을 올리겠다는 발상이 이 기후위기 시대에 가능하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현 서울시장의 행보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기에 뭐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시가 내년부터 기후동행카드라는 정액권을 판매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그런데 그 정액권의 가격이 정액권이라고 부를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아니 이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가격 할인 혜택이 거의 없는 걸 정액권이라고 부를 수 있나? 거기다 '기후동행'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적어도 이 이름을 쓰려면 지금 가격의 절반 이하로 판매해야 어울릴 것이다. 게다가 경기와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의 다른 지역들과는 연계해 사용할 수 없단다. 이미 수도권은 출퇴근으로 다 연결되어 있어 서울 안에서만 통용되는 대중교통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액권을 팔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경기도와 인천을 연결해야만 한다.
이름만 거창하고 실속이 전혀 없는 것을 우리는 빛 좋은 개살구 라고 부른다. 이건 아마도 시민들을 농락하고 우롱하려는 처사일 것이다. 우리 시민들은 이런 일에 분노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하겠지.
마침 다가오는 9월 23일 토요일에는 세 번째로 기후정의 행진이 열릴 예정이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정부 차원의 기후대응을 촉구하고, 이번 서울시 대중교통 정액권과 같은 그린 워싱을 비판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그날 거리에서 뵐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