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2


한창 바쁘게 문서를 작성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아, 일단 쓰던 문서부터 저장해야지 생각하고 문서 제목 뒤에 언더바(_)와 날짜를 붙였다. 숫자가 20220222 로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숫자 0과 2로만 이뤄진 날짜라는 걸 문득 깨달았고, 순간 웬지 기분이 좋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창 얘기 중인 상대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숫자에 대한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달 초에는 20220202 란 날짜도 있었다. 나는 가끔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부모님과 아이들은 거의 잊지 않는 날이다. 올해는 아직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대학 동기가 1월 말에 연락을 해서 저 날짜를 언급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날짜가 다가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곧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겠구나. 곧 엄마가 김치와 얼린 미역국과 밑반찬 등을 보냈다고 전화를 하겠구나 


암튼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침부터 몇 개였는지도 모를 문서를 작성하느라 몇 시간인지도 모를 긴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가끔 화장실을 다녀오고, 가끔 전화를 받느라 좁은 방을 빙빙 돌면서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거의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덕분에 오늘 난 저 왠지 기분 좋아지는 숫자 20220222를 여러번 두드릴 수 있었다. 간밤에 잠을 좀 설쳤고, 머리를 많이 써야해서 피곤하고 힘든 날이었지만, 저 숫자를 쓸 때마다 짧은 순간 기분이 좋았다.


별것도 아닌 날짜 하나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니. 참 나란 인간 생각보다 단순한 인간이구나 싶다.



자각몽(루시드 드림)


나는 주기를 두고 특정한 패턴의 꿈을 반복해서 꾸곤 하는데, 어떤 때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매일 여러번 반복해서 꾸고, 또 어떤 때에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며칠 연속 계속 반복하기도 한다. 그렇게 비슷한 꿈을 며칠씩 연속으로 계속 반복하다보면 이건 무슨 계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늘 꿈의 내용은 뒤죽박죽 엉망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현실이랑은 전혀 관계 없는 그저 잡다한 생각의 찌꺼기들일 뿐.


요 며칠은 계속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꿈을 반복하고 있다. 어제 밤에는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대한 바둑판 앞에 앉은 나는 상대는 보지 못하고 판 위에 놓인 돌들의 수를 읽으려고 애쓰며 어느 자리에 다음 수를 놓으면 좋을 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놓을 자리를 정한 나는 오른손 검지와 약지로 검은 돌 하나를 받치고, 중지를 돌 위에 올려 가운데 손가락 세 개로 돌을 들어올려 앞으로 뻗었다. 그런데 나는 바둑돌을 뻗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손은 전혀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왜 이러지? 이건 시간이 멈춘 건가? 아니었다. 손은 아주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느리긴 했지만 검은 돌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손은 조금씩 앞으로 뻗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돌을 놓으려던 자리까지 아직 한참 거리가 남은 상태에서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깼다. 온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땀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누웠다. 피곤했던터라 금방 잠이 들었는데, 도중에 뭔가 다른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문득 나는 아까와 같이 거대한 바둑판 앞에서 수를 읽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이거 반복되는 건가 라고 꿈 속의 내가 생각했다. 그리고 또 같은 자세로 검은 돌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을 뻗었는데, 이번에도 손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장면이 바뀌어 나는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아주 어린 시절의 작은 아이를 꼭 껴안기도 했고,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대학 시절의 친구와 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또 아까와 같은 바둑판 앞이었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현상이 반복.


이렇게 같은 꿈을 하룻밤 새에 적어도 네 번은 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첫번째와 세번째 꿈을 꾼 후에는 잠에서 잠시 깨었다가 다시 누웠는데 같은 꿈을 꾸었다. 결국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깼는데, 잠을 잔 것 같지도 않고 엄청 피로감을 느꼈는데, 이상하게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음악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면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이게 자각몽인가 생각이 들었다. 분명 꿈 속의 나는 어렴풋이 이게 꿈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자각몽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꿈 속에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던데, 아직 난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 한 것 같다.


확진자와 확찐자


오미크론 변이의 영향으로 매일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내 주위에는 확진자가 한 명도 안 나와서 확진이라는 게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1월 중순쯤 마을 활동가 선배 한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와 함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확진 소식을 듣기 일주일도 더 전이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와 내 자리는 거리도 멀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한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었다. 


그러고 지지난 주 주말에 아이들을 만나러 갔는데, 큰 아이는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해서, 선별검사소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했는데, 음석으로 나왔다고 했다. 암튼 애들을 만나서 잠시 놀고 있는데, 애들 엄마가 내게 작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달라고 부탁했다. 큰 아이에게 옮은 것인지 작은 아이도 감기 초기 증상이라 했다.그리고 가는 김에 큰 아이도 데려가서 약을 추가로 받아달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갑자기 의사가 작은 아이의 증상을 듣더니 전형적인 오미크론 증상이라고 신속항원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간호사가 아이를 잡고 있는 사이 의사가 아이의 코 깊숙히 면봉을 찔렀고 작은 아이는 처음엔 깜짝 놀라고 눈물을 보이더니 진료실을 나와서는 너무 아팠다며 울었다. 금방 괜찮아진다고 토닥토닥 아이를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다가와서 양성이 나왔다고 했다. 양성이 나왔어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니 피씨알 검사를 받으러 가라고 하며, 신속항원검사 양성 판정에 대한 증명서를 떼주었다. 이 병원에서는 피씨알 검사는 할 수 없으니, 가까운 선별검사소를 찾아가라고 했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은 아이는 다다음날 결국 피씨알 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어서 큰 아이도 피씨알 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애들 엄마는 처음에는 음성이 나왔는데, 아이들의 자가격리를 해지하는 시점에서 다시 받은 피씨알 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결국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이 모두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 전부터 큰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일주일 이상 만나지 못했다가 토요일 오후에 서너시간 정도 같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그 난리가 난 덕분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급하게 돌아와 약국에서 자가검사키트를 구매해 검사했다. 음성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확진 판정을 받은 후에도 두 번 더 검사했는데, 계속 음성이 나왔다. 혹시 검사가 잘 못되었거나, 잠복기일 가능성이 있어서 애들을 만나고 온 후로는 집 밖에 전혀 나가지 않고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해야할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고, 대면 회의는 온라인 회의로 변경했다. 덕분에 재택근무하면서 문서 작업만 잔뜩 하는 한 주가 되었다.


오늘은 자가격리 11일째. 확진자는 7일만 격리한다는데, 나는 왜 자발적으로 이렇게 길게 격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큰 아이의 격리가 끝난다고 해서 애들을 보러 가서 같이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애들 엄마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또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내일쯤 나도 다시 검사를 받으러 가봐야겠다. 근데 그 신속항원검사 진짜 믿을만 한거 맞는지 모르겠다. 확신이 서지 않으니 쉽게 격리를 풀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확진자는 아니지만 며칠 자가격리하며 배달 음식을 주로 먹었더니 확찐자가 되어버렸다.(아이들은 이런 아재개그 좀 그만하라고 난리인데, 난 확실히 아재가 맞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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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2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오랜만에 다시 글 읽으니 좋습니다. 확찐자가 뭐 아재개그인가요. 코로나시대 공용어된 것 같은데요^^ 20220222 _ 그러고 보니 독특한 조합이네요^^

감은빛 2022-02-23 22:1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북사랑님. 근데 이름을 바꾸셔서 이젠 알라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네요.

그렇네요. 코로나 시대의 공영어군요. ㅎㅎ 이젠 마스크 안 쓰고 다니던 시절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어제 유튜브에서 봤는데 ‘2022 02 22 22‘ 라고 쓰고 한글로 이천이십이년 이월 이십이일 이십이시에 듣는 음악이란 제목의 영상이 있더라구요. 저만 저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구나 했어요. ^^

희선 2022-03-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났네요 지난 2월 22일은 숫자 2가 많은 날이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감은빛 님이 좋아하는 숫자기도 하군요 2222년은... 맞지 못하겠지만...

따님 둘 다 코로나여서 감은빛 님도 집에만 계셨군요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괜찮겠지요 잘 나았으리라고 봅니다 감은빛 님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감은빛 2022-03-11 09:13   좋아요 0 | URL
숫자에 의리를 부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만, 저는 자주 숫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유튜브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숫자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손목에 찬 전자시계의 12:34:56(12시 34분 56초) 를 꼭 하루에 한 번씩 봐야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저런 면이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오히려 똑똑한 사람일수록 뭔가 독특한 강박이나 집착 같은 것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022-04-18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9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