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강의


업무상 친하게 지내야 하는 어느 분이 본인 조직의 젊은 직원들이 사회적경제에 대한 공부모임을 갖고 있다며, 내게 발전소 견학과 함께 에너지협동조합에 대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앞으로 두고 두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일이 많은 관계이기에, 당연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머뭇머뭇거리면서 별도로 비용이 나올 수 없는 비공식 모임이라 강사료를 드릴 수가 없다고 미안해했다. 그래서 쿨하게 괜찮다고 했다. 까짓 한두시간 떠드는 것 정도야 해줄 수 있다 싶었다. 당장 올해에도 그쪽과 거래가 있을거라 한두시간 투자는 손해가 아니다. 게다가 다른 직원들이 에너지협동조합에 대해 잘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이득이다 싶었다.


그래서 어제 발전소 설명과 더불어 에너지협동조합에 대한 짧은 강의를 했다. 늘 설명을 하다보면 말이 길어지는 편이라, 어제도 주의하면서 했는데, 역시나 예상보다는 길어졌다. 8명이 참석했는데, 모두 집중해서 들어줘서 고마웠다. 질문도 많이 나왔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떤 선물


그들이 다들 손에 뭔가 선물 세트 같은 걸 들고 있어서 뭔가 했는데, 다 마치고 나서 강사료도 못 드리는데, 각 단위별로 가져올 수 있는 선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선물세트 5개와 긴 장우산 하나를 받았다. 다 받아보니 부피도 크고 무게도 제법 나가서 집으로 가져갈 일이 문제였다. 받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해보니 대부분 샴푸, 비누, 치야 같은 것들일 것 같았다.


나는 환경단체 활동가로 처음 일을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부터 샴푸를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물로만 머리를 감는 날이 대부분이고, 가끔 비누와 식초 등을 이용하고 EM발효액을 이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비누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즉, 샴푸와 비누 선물세트는 내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그걸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 받아들고 나오다가 그 생각이 들었는데, 무겁게 이걸 집으로 가져가야 하나 싶었다.


어떤 귀가


강의를 했던 공간은 우리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딱 하나 있는데, 이 노선은 엄청나게 돌아가기 때문에 평소에는 거의 타지 않는다. 그래서 집으로 갈때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데 강의를 마친 후 본격적인 퇴근시간이 시작되는 6시 반쯤 버스를 타면 완전 만원버스 일텐데, 양손 가득 선물세트를 들고 손잡이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니 버스를 탈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거운 선물들을 들고 집으로 걸어갈 수 밖에. 출발하기 전에 경로를 머리속에 그려봤는데, 도중에 만나는 인도를 점유한 재래시장은 사람도 많고 통로가 좁아서 도저히 이 짐을 들고 걸을 수 없겠다 싶었다. 그 경로를 피하려고 골목길을 따라 가는 길을 생각해봤는데, 가보지 않았던 길이라 어떨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대략 45분쯤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엔 그래도 걸을만 했는데, 전체 경로의 4분의 1도 못 걸어서 벌써 손잡이 줄이 손가락을 파고들어서 손이 아프기 시작했다. 도중에 우연히 버스를 기다리는 친한 후배를 만났다. 후배에게 하나 가져가라고 제일 부피가 큰 선물세트를 하나 내밀었는데, 그 녀석도 자기는 샴푸나 비누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제일 부피가 작은 톳 선물을 챙겼다. 크 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아까 선물세트를 잔뜩 받을때부터 다른 건 다 쓸모 없어도 톳은 맛있게 요리해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녀석이 가로채버렸다. 그렇다고 하나 가져가라고 이미 말한 마당에 그건 안 돼!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나 대신 녀석 가족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바쁜 발길을 재촉했다.


걸으면 걸을 수록 점점 손가락이 아파왔고, 걸음도 무거워졌다. 이 선물세트들만 없었어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어서 갔을텐데, 땀이 줄줄 흘러내려 윗옷과 속옷과 바지가 다 젖어도 땀을 닦을 손조차 없었다. 게다가 절반쯤 걸었을 때부터 소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막판에는 손이 아파 좀 쉬다 가고 싶었어도 화장실 때문에 멈출수 없었다. 강의하면서 말을 많이 해서 마치자마자 물을 잔뜩 들이켰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렇게 무거운 선물세트를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집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45분이 걸렸다. 만약 소변이 급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잠깐씩 쉬었을텐데, 그럼 아마 50분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배가 고파 간단히 먹을 걸 챙겨 먹고 나서 선물들을 풀어보니 거의 80퍼센트가 샴푸와 비누와 치약이었다. 무거운 선물을 들고 고생해서 걸어온 것이 조금 허무했다. 제일 마음에 드는 선물은 텀블러였다. 내가 가진 스테인레스 텀블러들은 모두 크기가 작았는데, 이번에 받은 건 길어서 마음에 들었다. 치약과 칫솔들도 언젠가는 쓸테니, 괜찮았다. 도저히 쓸일이 없을 것 같은 샴푸와 비누는 일단 그대로 다시 넣어놓았다. 선물세트 2개를 다시 원상태로 넣어서 작은 방 구석에 두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줘버려야겠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어제 땀에 완전히 젖어버린 바지를 벗으며, 이제 긴바지를 못 입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공식적인 일정이 있는 날엔 긴바지를 입겠지만, 상황을 봐서 괜찮다 싶은 날엔 반바지를 입고 다녀야겠다.


운동 또 운동


스내치라는 운동에 완전히 매료되어 오래동안 쉬고 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던 게 8년쯤 전이다. 꾸준히 계속 운동을 했으면 좀 달랐을텐데, 도중에 일이 바쁘다는 핑계와 게으름 그리고 2번의 큰 부상으로 인해 운동을 자주 쉬었다. 그 도중에도 아예 운동을 멈춘 것은 아니나 그 강도를 생각해보면 그저 최소한의 현상유지 정도였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다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올해 4월이다. 4월부터 워밍업을 시작해서 6월부터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했다. 그래도 3달 이상 쉬지 않고 꾸준히 운동한 덕분에 어느 정도 몸이 궤도에 올랐다는 느낌이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는 샤워를 하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렇게 선명한 복근을 다시 본 게 3년 만인가? 그런데 그날 저녁 아이들과 비싼 식당에서 외식을 하면서 작은 아이가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느라 과식을 했고, 이번 주에도 저녁 술자리를 비롯해 두세번 가량 과식을 했더니 오늘 아침에는 그만큼 선명한 복근을 볼 수 없었다. 식탐을 줄이지 않으면 복근을 다시 볼 수는 없다. 식탐을 멈출수 없다면 그만큼 운동을 늘려야 하는데, 운동에만 매진하는 직업 운동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직장인, 사회인이 지금보다 운동을 더 늘리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식탐


어려서부터 밥만 많이 먹고 자랐다. 반찬은 거의 먹지 않았다. 어쩌면 그 버릇은 싱겁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에 김치와 같은 짠 반찬이 주로 놓였던 어릴때 밥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치 한 조각에 밥 두 숟갈. 이런 식이면 최소한의 반찬으로 최대의 밥을 먹을 수 있다. 가난했던 우리 집엔 김치, 깍두기, 깻잎조림 등 짠 반찬들이 대부분이었고, 계란 프라이 조차 자주 보기 어려웠다. 


국민학교 6학년때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에서 도시락을 받았는데, 반찬이 죄다 상해있었다. 선생님들은 먹지 말라며 이미 나눠준 도시락을 다시 걷었다. 내가 밥을 먹어보니 밥은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고 밥만 먹었다. 주위의 친구들과 선생님까지 모두 어떻게 반찬도 없이 밥을 먹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소랑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갖고 다니던 도시락은 밥통만 남들보다 1.2배 이상 컸다. 그리고 반찬은 아주 작은 통에 넣고 다녔지만, 그마저도 늘 남았다. 그 밥을 다 먹고도 컵라면을 사먹기도 했다. 그렇게 먹어도 키도 작았고, 덩치도 작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짧은 기간에 키가 커서 반에서 중간 가량 되었는데, 그 이후 다시 키가 크지 않았다. 지금 키가 당시 키와 거의 마찬가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첫 MT를 가서 조별로 밥을 해먹었는데, 우리 조는 밥을 많이 해서 다들 밥이 많이 남을 거라 걱정을 했다. 나는 아닐거라고 말하며 밥솥을 끌어안고 밥을 퍼먹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대학 동기들과 술을 마시러 갈 때 만약 회를 비롯해 비싸고 맛있는 안주를 먹을 예정이라면 친구들은 미리 빵을 준비해 술먹으러 가는 내게 먹였다. 그 빵 다 먹지 않으면 술 못 마실줄 알아라.


서울에 자리 잡은 친구 자치방에 처음 놀러가는 날, 친구가 물었다. 밥만 많이 해놓으면 되지? 이렇게 살았어도 나는 내가 조금 많이 먹는 편이지만, 식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밥을 좀 더 먹는 편이다. 정도로 생각했다.


내가 식탐이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던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포상 외박을 받아서 혼자 밖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혼자 여관방을 잡아놓고 맛있는 걸 잔뜩 사다놓고 밤새 먹다가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돈이 없었다. 당시 상병 월급은 1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외박을 나왔으니 계좌로 돈을 조금만 보내달라고 했다. 아마 10만원 가량 보내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중 5만원 가량 음식과 술을 사는데 쓰고 2~3만원 가량을 숙박비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속초 시내에 허름한 여관방을 잡아놓고, 그 주위 가게들과 시장 등을 돌아다니며 술과 음식을 샀다. 구체적으로 뭘 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기 어려울만큼 많이 샀던 건 확실히 기억한다. 여관방에 콕 처박혀서 티비를 틀어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정말 먹다 지쳐서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늦게 일어나 남은 음식을 마저 먹고 부대로 복귀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며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먹을 수 있었을까 싶다. 더 무서운 건 당시 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30대 중반 즈음부터 먹는 양이 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매 때문에 일부러 양을 줄였고, 이후로는 먹고 싶어도 더 못 먹겠더라. 그리고 40대가 되어서도 꾸준히 먹는 양이 줄어들었다. 가끔 만나는 대학 동기는 지금 내가 먹는 양을 보고 예전 대학시절을 회상하면 비교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도 내 기준으로 보면 나는 지금도 많이 먹는 편이라 생각한다. 더 줄여야겠지. 자신은 없지만. 더 줄여서 꼭 필요한만큼만 먹고 살면 좋겠다. 


하지만 이렇게 써놓고도 오늘 저녁 분명 술과 안주를 과하게 먹지 않을까 싶다. 대신 오늘도 운동은 착실히 해야지. 내일 아침에 거울 앞에 설 내 모습이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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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5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9-07-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톳스틸러ㅎㅎㅎㅎㅎ
3년만에 재회한 선명한 복근 축하드립니다.

저는 복근이랑 못 보고 지낸지 올해로 40년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30대 중반입니다.....

다락방 2019-07-19 23:49   좋아요 0 | URL
으으 분하다... 톳 스틸러 같은 거 내가 생각해냈으면 좋았을것을.... 으으 .........

syo 2019-07-20 00:56   좋아요 0 | URL
syo가 더 빠르고 그런 날도 있어야지요.
언제까지 센스애서 다락방님한테 밀리기만 할 수는 없다!

감은빛 2019-07-25 23:35   좋아요 0 | URL
톳스틸러! ㅎㅎ

사실 당시에 좀 표정관리가 안 되었는데,
금방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그 후배 가족이 맛있게 먹으면 다행이죠.

늘 센스가 넘치는 다락방님과 SYO님 덕분에 알라딘 마을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