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이번 주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믿지 못하던데,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불면증이 있었다. 내 기억에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밤에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아버지의 책장을 뒤져 한자가 드문드문 섞여있고, 글이 세로로 적혀있는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곤 했다. 밤마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책장에 있는 책들을 읽었다. 


그래서 아침이 늘 힘들었다. 아침을 먹지 않은 것도 중학생 시절부터였다. 아침엔 밥 먹는 것보다 단 1분이라도 더 자는 것이 중요했다. 밥 따위 먹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잠이 부족한 아침에는 입맛도 없었다.


자주 술을 마시는 원인 중에 불면증도 포함되어 있다.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고, 저녁에 회의나 강의나 토론회 등 일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일정을 마치면 간단히라도 뒤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술자리가 엄청 자주 생기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혼자 밤 늦게 술을 마시는 경우에는 대부분 이유가 불면 때문이다.


밤 늦게 혼자 깨어 있으면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난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난 왜 이렇게 못난 걸까? 뭐하려고 이런 삶을 계속 사는 거지?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어때?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면 멈춰야 한다. 더 나가면 위험하니까. 그럴 때는 그냥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틀어놓으면 그런 우울한 생각들이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잠이 잘 온다.


어떤 경우에는 48시간 이상 잠을 한 숨도 못자고 일을 했음에도 이제 편하게 자려고 누우면 막상 잠이 안 온다. 그토록 피곤했는데, 왜 발 뻗고 누워도 잠을 자지 못할까? 이런 날에도 그냥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시면 그때서야 비로소 기절하듯 잠이 든다.


심지어 이번 주에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거의 매일 술 마시고 돌아온 후에 격렬하게 운동도 했는데, 막상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매일 아침이 괴로웠다. 아! 정말! 내 인생은 왜 이따위인 건지 모르겠다.


이번 글을 불면증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꼴딱 새고, 이 글을 쓰기 때문이다. 벌써 5일 연속이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한 주를 보내고도 잠을 자지 못하는 나란 인간. 대체 뭐냐?


팟캐스트 녹음


금요일인 어제는 오후 늦게 팟캐스트 녹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노동넷이라는 라디오 채널에서 생방송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 프로그램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딱 1달, 총 4회 출연이었다. 나름 말로 먹고 사는 입장이라 라디오 방송이라고 해도 크게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생방송이라 그랬는지 무지 떨리고 긴장되더라. 게다가 내가 출연하는 도중에 교통 상황을 알려주는 여성 리포터의 순서가 끼어 있는데, 방송 준비를 위해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으면 언제나 그 리포터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연습하는 장면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어찌나 긴장하고 어찌나 열심히 연습하던지. 늘 그를 보고나면 나도 그 긴장감이 전염되어 스튜디오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동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암튼 팟캐스트 출연 제안을 받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일정을 통보 받았는데, 바쁜 와중이고 컨디션도 계속 엉망이어서 따로 내용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무 준비없이 가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으니 미리 진행자에게 질문지나 대본이 있는지 물었는데, 뭐 그냥 대충 이렇게 가시죠 하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그래. 나 준비할 여유 없다고 세상이 나를 도와주는 구나. 나도 그냥 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쪽 분야에서 어지간한 질문에는 다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숫자를 잘 외우지 못해 수치를 딱 제시해줘야 하는 질문에는 좀 어버버할지 몰라서 그런 데이터 준비를 하려고 사전에 질문지나 대본을 물어본 거였다. 막상 1시간 가량의 녹음 시간 동안 어려운 질문은 없었다. 녹음이 끝나고 평소 나에 대해 조금 아는 진행자가 "역시 막힘없이 잘 말씀해주셨네요. 이건 뭐 편집이 따로 필요 없겠어요. 그냥 이대로 바로 올려도 되겠네요." 라고 말했다.


다만 나는 진행자의 질문이 계속 조금씩 아쉬웠다. 질문이 좀 더 체계적이었으면 내가 답하기도 훨씬 편하고,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도 훨씬 편했을텐데, 질문이 오락가락하니까 내가 답을 체계적으로 잘 해야겠다 싶어서 설명을 하는데, 도중에 또 진행자가 끊고 들어와 다른 질문을 하기도 했다. 참 호흡이 안 맞구나 싶었다. 그런 것 치고는 그래도 선방했구나 싶었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을 대체로 전하긴 했다.


예전에 잡지나 지역 신문에 기사를 쓰기 위해 나도 인터뷰 작업을 가끔 했는데, 인터뷰는 질문을 얼마나 잘 준비하는 지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진행자가 질문을 잘 뽑지 못하고, 제대로 묻지 못하면 그 인터뷰는 그냥 실패다.


양꼬치에 한라산


팟캐스트 녹음 내내 떠들어서 체력 소모가 컸다. 마치자마자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큰 아이는 시험기간이라고 공부를 더 하다가 밤늦게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작은 아미만 데리고 나와서 어디서 뭘 먹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한 주 내내 잠을 못 잔 탓에 엄청 피곤했고, 엄청 배가 고팠고, 컨디션이 너무 엉망이었다. 


집 근처에 갈만한 식당이 뻔해서 아이랑 여기저기 얘기해보다가 단골인 양꼬치 집으로 갔다. 양꼬치 2인분에 한라산 소주를 시키고 한 잔 들이켰더니 갑자기 컨디션이 확 좋아졌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먹거리들을 좀 사고 집으로 왔다. 잠시 운동을 하고, 작은 아이를 씻기면서 나도 씻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니, 이렇게 아이랑 함께 씻을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국제 대화(채팅)


다 씻고 몸을 말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외국인들과 대화하며 외국어를 익히기 위한 어플이었다. 이 어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작년이었다. 처음에 앱을 깔고 등록할 때, 반드시 나이와 얼굴 사진을 등록하게 되어 있는데, 자신의 모국어와 익숙한 언어를 입력하고, 다시 자신이 배우고 싶은 언어를 입력하면 원하는 언어를 잘 구사하는 네이티브나 능숙한 사람들을 연결시켜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등록하고, 영어를 중급으로 설정하고 배우고 싶은 언어로 중국어를 올리면, 영어와 중국어를 능숙하게 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확실히 한류 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전세계 곳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등록한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 영어를 익숙하게 잘 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간혹 나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타 언어권 사람들도 있긴 하더라.) 이게 작년에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잠시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면 어려서부터 편지 쓰길 좋아해서 펜팔도 종종 해왔고, 군대에서도 통일전망대 근무 설 때 사진을 찍어간 여중생과 제대하고도 몇 년을 더 펜팔을 이어가기도 했었다. 그 친구가 대학 가서도 한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으니, 5년 이상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사진 한 번 찍었던 인연으로는 이례적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막 제대했을 때 세상은 군대가기 전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제 더이상 삐삐를 쓰는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 휴대폰을 갖고 다녔다. 피씨 통신만 알다가 군대에 갔는데, 나오니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게임방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퍼져있었고, 후배들은 더이상 술을 먹거나 당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게임방에서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곤 했다.


같이 술 마실 사람도 없어졌고, 갑자기 너무 변해버린 세상을 탓하며 영어 공부나 하자고 회화 학원을 다녔다. 그때 영어가 빨리 늘려면 자주 써야한다는 충고를 듣고 좋아했던 팝 가수 홈페이지를 뒤져 영어 펜팔을 구했다. 각 대륙별로 1명씩 펜팔을 만드는 게 목적이어서 국적을 잘 살펴서 영어 메일을 십여통 보냈다. 그중 3명 정도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다가 나중에는 캐나다에 사는 필리핀 출신 여고생 1명만 남아 꽤 길게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 대화앱을 깔고 사용하면서 약 20년 전 그 시절 생각이 계속 났다. 그 필리핀 출신 캐나다 고등학생은 잘 살고 있을지, 5년 가량 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이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지금와서 그들의 행방을 추적할 방법은 없으니 잠시 그냥 궁금해하고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 앱을 꾸준히 이용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 대화 상대와 연결되면 처음 며칠은 서로 흥미를 갖고 열심히 대화하다가 곧 공통 관심사를 계속 만들어내지 못하고 금방 지루함을 느낀다. 게다가 내 언어 밑천이 얕으면 얕을수록 계속 같은 표현, 비슷한 문장만 구사하게 되어 스스로 지겨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았거나, 지금도 주고 받고 있는 몇몇 분들을 간단히 떠올려보자.


A / 중국인 / 중국 거주 / 20대 / 초반 / 여성

한국어로 먼저 말을 걸어왔음. 작년에 가장 많은 대화를 주고 받은 이. 우리말을 꽤 잘하는 편이라 영어로 소통이 불편하면 그냥 한글로 대화할 수도 있었다. 중국어 대화를 좀 해보고 싶었으나, 내 실력이 워낙 일천하여 인사말을 나누는 수준으로 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계속 중국어를 익혀 실력이 늘면 좀 도움을 받겠다 싶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 앱에 접속하지 않았다. 이 친구는 카톡 아이디도 있어서 카톡으로도 아침 저녁으로 대화를 주고 받기도 했는데, 이 앱에 접속을 끊은 시점부터 카톡도 답이 없더라. 나중에 한참 나중에 무슨 중요한 시험 때문에 연락을 못 했다고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때는 또 내가 바빠서 앱에 접속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결국 인연이 더 이어지지 못하고 중단된 상태. 물론 서로 앱을 지우지 않았다면 언제라도 다시 연결될 수 도 있는 상황이다. 가끔 "은빛씨"라고 음성 파일을 보내와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사람.(일부러 본명을 쓰지 않고 은빛이란 이름으로 등록함)


B / 터키인 / 독일 거주 / 20대 중반 / 여성

먼저 한국어로 말을 걸어와서 대화를 시작함. 영어, 독일어, 터키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함. 천성이 무척 친절하고 착한 사람. 다른 사, 람을 먼저 잘 챙겨주고, 자신이 원하는 답도 잘 묻고 잘 챙기는 편. 주로 영어로 대화하고, 가끔 그의 질문에 답할 때만 한국어로 대화하고, 아주 가끔 내가 예전에 배운 독일어 단어 몇 마디 시험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반쯤 농담으로 터키어도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진짜 진지하게 터키어 기본 문법을 막 가르쳐줌. 헐! 난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그냥 어어. 그랬는데, 나중에 진짜 제대로 터키어를 배우기로 마음을 바꾸게 만든 사람. 근데 터키어 발음 너무 어렵다. 최근에는 서로 대화가 소강상태. 터키어로 문장을 구사할 정도가 되면 말 걸어봐야지 생각중. 작년부터 최근까지 비록 중간에 공백기가 길었지만, 그래도 기간으로 보면 1년 이상 인연을 이어왔다.


C / 폴란드인 / 폴란드 거주 / 20대 중반 / 여성

프로필 사진이 예뻐서 먼저 말 걸었는데, 대화가 잘 이어져서 한동안 대화를 많이 나눴음. 한국어 학원에 다니고 있고, 인사를 비롯한 간단한 표현을 할 수 있음. 주로 영어로 대화함. 서로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 대화를 나눴지만, 둘 다 영어가 짧아서 한계가 있었다. 작년에는 끊길듯 말듯 하며 계속 대화가 이어졌으나, 올해는 꽤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는 상태


D / 중국인 / 한국 거주 / 20대 후반 / 여성

먼저 말을 걸어왔음. 영어와 중국어를 능숙하게 잘 하고, 한국어도 무척 잘 하는 편. 한국어로 대화해도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음. 나와 중국어로 대화하기를 원하는 듯 했으나, 내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니, 초기에 친절하게 가르쳐주다가 나중에는 조금 지겨워 진듯한 느낌. 결혼했다고 밝혔는데, 대화가 목적이 아닌 여성에게 접근하려는 의도의 남성들이 많아서 짜증난다는 투로 반응했다. 아마 찌질한 한국 남자들이 그랬을 것 같아서 한국 국적 남성이라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다.


E / 중국인 / 홍콩 거주 / 10대 후반 / 여성

먼저 영어로 말을 걸어와서 거의 영어로만 대화함. 한국어를 제외하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주로 유럽 언어들을 잔뜩 배우고 싶다고 등록해 놓았음. 한국 연예인 중에 박보영을 좋아해서 드라마와 영화를 다 챙겨본 팬이라고 함. 박보영의 연기와 영화의 완성도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이 기억에 남는 사람. 작년에 내가 그랬듯이 한참 이 앱에 재미 붙였다가 실증이 난 듯. 올해는 더이상 접속하지 않는 상태


F / 중국인 / 중국 거주 / 20대 중반 / 여성

헬스장 트레이너. 운동하는 프로필 사진 보고 운동 얘기 나누고 싶어서 말 걸었는데, 잠시 대화해보니 머신 운동 중심으로 가르치는 입장인 것 같아서 더 대화를 깊게 나누지 못했다. 이 앱을 깔고 처음으로 대화가 잘 통했으면 하고 기대했던 사람이었는데, 많이 아쉬웠음.


G / 인도네시아인 / 인도네시아 거주 / 20대 후반 / 여성

먼저 우리말로 말을 걸어왔음. 영어 강사여서 영어를 상당히 잘 함. 아직 우리말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는데, 열심히 배우는 것이 느껴짐. 우리 드라마와 영화는 많이 보는 편. 특히 드라마 이야기를 많이 함. 올해 가장 많은 대화를 주고 받은 사람으로 간밤에도 이 사람을 비롯한 서너명의 여성과 대화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음. 우리말의 존댓말과 반말 문화에 대해 많이 헷갈려해서 한글을 가르쳐본 경험도 없으면서 막 가르치려고 애썼음. 나한테서 우리말에 대해 제일 많이 물어보고 배우려는 사람. 대중 문화와 음식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특히 어제는 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혼자 술 마시냐고 묻더니, 또 혼자 사냐고 물어서 이혼했고 애들이 엄마집과 우리집을 오간다는 사실까지 이야기 하게 되었다. 본인은 아직 결혼 전이고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함.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고. 아마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지는 않았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H / 브라질인 / 브라질 거주 / 20대 후반 / 여성

프로필에 한국어로 인사를 적어놓았길래 말 걸었다가 대화가 잘 통해서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 앱에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은 대화를 주고 받은 사람. 영어 수준이 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잘 한다고 한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고 등록했다. 한국어 철자를 묻거나 받아쓰기 결과를 봐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내가 빨간 소주(참이슬 클래식)를 주로 마신다고 말했더니 곧바로 그 빨간소주를 손에 쥐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그 순간 그 술을 먹고 있던 중이라서 완전 깜짝 놀랐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여성이 같은 시간에 같은 술을 손에 쥐고 있다니! 우리나라와 거의 12시간 차이라, 서로 대화 시간이 쉽지 않은데, 나도 늦게까지 안(못) 자는 날이 많고, 그도 그런 날이 많은 듯. 의외로 대화를 많이 했다. 술 좋아하고 성격이 화끈한 면이 있는 점 등이 나와 닮았다 싶어서 잘 통하는 듯하다. 그가 잘때 나는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내가 잘 때 그가 일어나 일하러 나가니까 마치 연인처럼 서로 잘 자라고 인사하고, 일 잘 하라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하고 있다. 이것도 참 신기하다 생각했다.


I / 인도인 / 인도 거주 / 20대 중반 / 여성

이 앱에서 처음으로 접한 인도인이라 얼른 말 걸었다. 인도 영화 좋아하고 힌디어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잘 알겠다고 편하게 대화 나누자고 답이 왔다. 아직 거의 대화를 못 나눈 상황. 힌디어 문자를 익혀야 힌디어로 한 번 말을 걸어볼텐데, 너무 어렵다.


J / 브라질인 / 브라질 거주 / 20대 초반 / 여성

먼저 말을 걸어오더니 갑자기 귀여운 아기 사진을 보내고 1년 3개월 된 자기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싱글맘이고, 부모님 댁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비행기 승무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애들 사진 보여주고, 나이도 알려주고, 이혼 얘기까지 다 했다. 직업도 환경운동가라고 말해줬더니 폭풍 칭찬을 하길래, 그렇게 칭찬 받을 일은 아니라고 했다. 포르투갈어가 모국어인데, 영어는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닌듯. 물론 나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고, 자기 동네에 한인 가게도 있다고 했다. 현재 일하는 항공사를 옮길 예정이며, 브라질을 떠나 유럽쪽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대화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끊임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툭툭 던지는 것이 좀 의외다. 계속 얘기나누다보면 재밌는 상대가 될 수도 있을듯.


K / 프랑스인 / 프랑스 거주 / 20대 초반 / 여성

어제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내용이 황당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내 안경이 멋있다고. 헐! 내 안경은 그냥 평범한 검은색 뿔테 안경인데. 프랑스엔 이런 뿔테 안경이 없나? 그럴리가! 나는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살피다가 웃는 표정이 예쁘다고 답해줬다. 그랬더니 또 매일 이를 잘 닦아서 자기 웃음이 예쁜 거라도 답이 왔다. 음. 이 반응 의외인데 재미는 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나도 매일 이를 닦지만 웃음이 예쁘지는 않다고 답을 해줬다. 그러자 그가 내 웃음도 예쁘다고 답했다. 음, 내가 웃는 표정의 프로필 사진을 올렸던가? 내가 이 앱에 올린 사진 3장은 모두 셀카로 웃는 표정이 있을리 없을텐데 하고 확인해봤다. 음. 오키나와에서 찍은 살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지금까지 경험상 그리 오래 대화를 이어갈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스쳐간 인연이 부지기수였다. 근데 보기 드물게 프랑스인과 연결이 된 점과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로 치고 들어오는 대화 방식이 재밌어서 계속 대화가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하다.


L / 중국인 / 홍콩 거주 / 30대 초반 / 여성

이번에도 어제 갑자기 인사도 없이 곧바로 주말에 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헐! 아이와 놀러갔다가 맛있는 음식 먹고 돌아와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거라고 했더니, 자신은 온천에 갈 예정이라고 답한다. 음, 어제가 이상한 날인 거겠지. 암튼 이 엉뚱한 느낌의 사람도 왠지 대화해보면 재밌을 것 같긴 하다.


그 외에도 긴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에, 30대 베트남 여성과 40대 아르헨티나 여성도 있었는데, 이들이 탈퇴하면서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지워졌다. 누가 먼저 말 걸었는지, 어떤 이야기들을 주로 했는지가 남아있지 않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경우도 많은데, 그 경우는 대체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대체로 그들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경우다. 언급한 경우가 모두 여성인데, 그럼 남성들과는 대화를 안 하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근데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남성들과의 대화는 정말 몇 마디 나누고 끝인 경우가 많다. 또 언급한 대부분의 연령대가 20대인데, 실제로는 30대도 좀 있었고, 아주 가끔 40대도 있었는데,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20대더라. 이 앱을 이용하는 연령대가 그렇게 분포되어 있는 듯.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그들이 보는 화면에 분명 40대에 흰 머리가 보이는 밋밋한 얼굴의 안경 쓴 아저씨가 보일텐데, 먼저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는 경우가 의외로 많더라는 것. 분명 우리나라 사용 인구도 많고, 젊고 잘생긴 남성들도 많을텐데, 왜 나한테 먼저 말을 걸었을까? 음 그들이 젊고 잘 생겨서 오히려 먼저 말을 안 걸고, 외모가 별 볼일 없는 나같은 아저씨한테 먼저 말을 거는 걸까?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언어 천재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주문을 못 하고 있다. 책 한 두 권을 계속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고민을 반복하느라 그랬다. 빨리 주문해서 읽어야지.


15개 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신견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쓸 때, 사람이 과연 저럴 수가 있나 싶었다.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중세 영어와 중세 프랑스어라는 이미 잊혀진 언어까지 다룬다고 하니. 더욱 믿기지 않을 수 밖에. 근데. 이 분의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나서 매일 깨닫는다. 이 사람 진짜 언어 천재다. 대체 모르는 언어가 없는 듯. 


나는 사실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 하나 정도였음 좋겠고, 중국어, 일본어, 터키어, 힌디어 등은 영화나 드라마 볼때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면 좋겠다 싶다. 한때 일본 애니나 드라마를 주구장창 봤던 시절이 있어서 일본어는 조금은 가능한데, 나머지 언어는 모두 완전 초짜이다. 중국어는 재미도 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끔씩 열심히 해봐야지 마음을 먹곤 하는데, 꼭 그러고는 금방 잊어버리고 산다.


지금 헤어진 애들 엄마가 어쩌면 언어 천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와서 독일어 번역을 하는데, 나보다 한참 늦게 영어를 시작했는데, 정말 짧은 시간에 내 수준을 훌쩍 넘어버리더라. 그리고 스페인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데,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꾸준히 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제법 실력이 늘었을 것 같다. 요새는 프랑스어에도 손을 대는 눈치던데. 얼마나 더 많은 언어를 섭렵할 지 모를 일이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언어에 대한 감각은 타고 나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럽다!


음, 지금 나 대체 몇 시간을 잠 한 숨 안자고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24시간은 아까 넘었다. 이제 곧 애들 밥을 챙겨 먹여야 하고, 낮에 아이랑 놀러 가기러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늘 저녁때까지 잠자기는 어렵겠지. 어쩌면 36시간 이상 잠 못자는 기록을 오랜만에 세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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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9-07-0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지간하면 잘 자고, 일어나는 것도 잘 일어나는 편입니다. 개운하게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만큼은 충분히 회복하는 것 같구요. 이런 안온한 밤도 축복이겠지요. 아니, 나는 잘 잔다고 감은빛님을 놀리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그저 이 글을 읽다보니 제 자신이 기특해져서요...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나도 좀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왜 이모냥이냐.... 하고 있었어요. 일도 열심이시지만 특히 운동에서 그래왔는데요. 이젠 언어 영역까지 진출하셔서 syo의 자괴감을 자극하시네요ㅎㅎㅎㅎ

감은빛 2019-07-06 21: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자괴감이라뇨? 늘 syo 님 글을 읽을 때마다 자극받는 간 오히려 저예요.

잘 자고 잘 일어나는 편이라니 부럽습니다! 저도 늘 못자는 건 아닌데, 요 며칠 좀 유난히 심했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7-0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언어가 한국어뿐이어서 그냥 만족하고 삽니다..ㅎㅎ

감은빛 2019-07-06 21:3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유창하게 할 수 있는건 한국어 뿐입니다. 영어는 그냥 조금 해본 것 정도이고, 나머지는 재미로 단어를 익혀보는 정도이죠.

그런데 외국어를 하다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