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집착
모든 SNS를 실명이 아닌 덧이름으로 이용하고 있다. 각각 특성이 다르듯 내가 이용하는 방식도 다르다. 가장 많이 쓰는 페이스북은 감은빛으로 이용중인데, 대다수 실제로 아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겪어온 환경운동단체, 문화운동단체, 노동운동단체 그리고 출판사와 현재 활동하는 협동조합까지 부대껴온 사람들이 대부분 친구로 엮여 있다. 그들은 감은빛이란 이름으로 올린 글이 사실은 내가 올린 것이란 걸 아는 사람들이다. 익명성이 통하지 않는 곳. 그래서 이곳에선 공식적인 일정을 중심으로 홍보하는 공간이며, 남들이 올린 홍보성 글들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또 믿고 보는 몇몇 사람들이 공유하는 주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트위터는 초기에 좀 하다가 아예 접속도 안 한지 꽤 오래 되었다. 글자 제한이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나중에는 족쇄로 여겨졌고, 그 짧은 글 중심으로 이뤄지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인스타그램은 아주 늦게 시작한 편이다. 사실 사진이랑 별로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라서 별로 시작할 이유를 깨닫지 못했는데, 어쩌다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 사진 구경하는 재미로 이용한다. 인스타는 친구 개념이 아니라 트위터처럼 팔로우를 하는 사람과 대상의 관계라 상대적으로 페이스북 보다는 훨씬 덜 부담스럽다.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각종 SNS가 시간 낭비라는 의견이 많다. 나도 자주 접속하지 않지만, 가끔 들어가서 좀 보다보면 시간이 휙 지나가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필요한 경우에만 짧게 접속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여러 경우가 있는데, 제일 안타까운 건 좋아요에 집착하는 분들을 볼 때이다. 실제로는 못 뵌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가끔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접하는 분들 중에 예전에 출판계에 있을때 종종 어울렸던 선배 영업자가 최근 좋아요 숫자에 집착하는 내용의 글을 연달아 올리셨다. 좋아요을 많이 받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숫자가 다른 어떤 가치로 전환되는 것도 아닌데, 왜 좋아요 숫자에 집착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걸 그냥 혼자 생각만 하시는 게 아니라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 유튜브 운영자라면 좋아요 숫자는 광고 수입 등 돈과 연결되는 문제일 수 있으니, 차라리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좀 우습게 보이더라도 좋아요 구걸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 도대체 왜? 이건 그냥 나 좀 인정해 달라는 인정 욕구인 것 같은데, 너무 없어보이는 건 내가 너무 가혹한 건가?
인정 욕구
예전에도 알라딘에 인정 욕구에 대해 몇 차례 쓴 적이 있는데, 나도 인정 욕구가 꽤 강한 사람이라는 걸 자주 깨닫는다. 환경운동단체에 있을 때부터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에서 학생운동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그게 뭐 대단한 감투라고 학년대표를 맡았을 때와 학생회에서 간부를 맡았을 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환경단체에서 대형국책사업에 맞서 전국단위 행동이 있을 때 두각을 나타내어 주요 일간지 사회면 톱에 사진이 올랐을 때에도. 내가 맡은 사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 주위 사람들에게 그 공을 인정 받았을 때에도 늘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한 편으로 나는 늘 다양한 역할을 총괄하는 일을 해왔다. 열악한 시민단체의 형편 때문에 그랬지만, 한 사람의 활동가가 다양한 역할을 맡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몇 가지일을 동시에 맡아서 해내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때부터 항상 그렇게 일했다. 시민단체를 정리하고 출판사에 들어와서도 그랬다. 잡지 독자관리와 단행본 영업과 취재해서 잡지에 글을 쓰는 일과 단행본 책임 편집과 단행본 기획까지 출판 쪽에서는 제작과 디자인 일을 빼곤 거의 다 해봤다. 내가 일해온 분야에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마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렇게 전체를 종합적으로 경험해본 결과 한 두가지만 해본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 잘난 인간이니까 인정해줘 이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경험과 깊이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인 듯 하다.
인정받고 싶은 이유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인정받는 지가 얼마나 인정받는 지 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 이만큼 잘났어. 나 좀 봐줘 하는 수많은 콘텐츠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걸 어떻게 천박하지 않게 잘 포장해서 내놓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한계를 깨달으면 겸손해지는 법
아무리 잘난 사람도 한계는 있다. 내가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딱 거기까지다. 어느 분야에서는 혹은 어떤 자리에서는 아무리 잘난 척 하고 싶어도 내세울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게다가 누가 뭘 얼만큼 잘 한다는 건 보는 사람에 따라 매우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정말 멋진 강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강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감동적인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뻔한 이미지를 우려먹은 평범한 글일 수 있다. 애초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겸양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 그런 겸손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학교 강의
한 초등학교에서 3일 연속 6회(1회 2교시)의 강의를 맡았다. 혼자서는 도무지 할 수 없어서 내부에서 역할 분담하고 외부에서도 경험이 많은 강사 선생님을 모셨다. 학교 강의가 오랜만이라 느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작년에는 반드시 내가 가야만 하는 강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해도 괜찮은 강의는 모두 넘겨버렸다. 다른 활동가들도 점점 경험을 쌓아 성장해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강의가 내 강의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맡은 강의였는데, 너무 바쁜 시기라 사전에 준비할 여유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강의는 더욱 어려운데, 단어 설명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6회 중에 첫날과 마지막날 각 1회씩 2회를 맡았다.
강의를 맡은 사람 중 한 분은 마치고 나와서 "기를 다 빨렸다"며 무척 힘들어했다. 사실 힘든게 맞다. 2교시를 혼자 계속 떠드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학생들을 만나고 오면 오히려 힘을 받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과 반응들이 너무 대견하고 고맙다. 이번에는 간단한 강의 평가를 모든 학생들에게 받았다. 내가 맡았던 2개 반의 강의 평가서를 나중에 스르륵 훑어봤는데, 한 학생이 맨 밑에 따로 한 마디를 적어놓았다. 재미있었고,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반응이 바로 내가 학생들과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다.
하지만 늘 내가 욕심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닫는다. 조금만 욕심을 버리면 좀 더 여유있게 강의를 진행하고, 좀 더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을텐데, 늘 설명하다보면 조금 더 하고 싶고, 그러다보면 자꾸 시간에 쫓긴다. 점심 시간을 앞둔 마지막 시간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이 여유있게 식사하기 위해 5분만 일찍 마쳐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는 생명의 근원인 탄소 이야기를 설명하다가 오히려 더 늦게 강의를 마쳤다. 그 순간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좀 더 노련한 강사였다면 시간 조절을 잘 했을 텐데, 욕심 많고 시간 조절도 못 하는 강사를 잘 못 만나 애들이 밥을 늦게 먹게 된 것이 정말 미안했다.
사람은 실수에서 배워야 하는 법. 다음부터는 꼭 욕심을 줄이고 전달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하리라.
장바구니 비우기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읽을 시간과 돈은 부족하다. 한동안 신간은 동네서점에서 구매하고, 아이들 책과 구간은 알라딘 헌책방에서 구매했다. 예전처럼 여기 알라딘 온라인에서 몇 십만원씩 구매하는 일을 지난 몇 년간 잘 참아왔다.
그러다 최근에 도서상품권을 받은 것이 있어서 보관함을 뒤졌더니, 장바구니에 무려 20만원 이상의 책이 들어갔다. 추리고 또 추려서 간신히 15만원 수준으로 맞췄는데, 계속 결제를 미루고 있다. 책장에는 아직 읽을 책이 넘치는데 또 이렇게 책을 사는 게 과연 잘 하는 짓인가?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지 벌써 한 달은 지난 것 같다. 빨리 장바구니를 비우고 택배를 기다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