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십대 초반은 동정심 만발의 시대였다.' 훗날 나의 이때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표현할까봐 겁난다. 우습지 않은가. 동정심이란 게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좀 밉살스러운 감정이다. 자기가 놓인 상황이 좀더 낫다고 자위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서 슬쩍 베푸는 감정처럼 보여서 말이다.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고도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감정. 싫지만 그런데 자꾸 불쌍한 게 많아진다.
상황 일; 이십층 주공아파트 맨 꼭대기에서 후배와 자취를 한다. 지은 지는 얼마 안 된 건물이라 승강기가 고장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가끔 정기 점검이라도 할라치면 삼백 개나 되는 계단을 거의 미친척하고서 올라야한다. 팔 층까지는 신나게 뛰어 올라가는데 그 이상부터는 간신히 기듯이 오른다. 다리가 후들후들해서 계단 난간을 붙잡은 채. 그렇게 힘들여 이십 층을 올라간 적이 있었기에 점검을 하는 날이면 그 일이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아니면 다시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오는 식으로. 어제는 선배에게서 뮤직박스를 선물 받은 뒤라서 룰루랄라하며 승강기 앞에 섰다. 아저씨들이 승강기 안쪽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점검하는 날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승강기 여닫이문에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창이 깨져서 그걸 갈음하고 있었다. 일하시는 아저씨는 어떤 놈이 술 먹고 이걸 손으로 아님 발로 차댔는지 부서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다음에 이런 거 보면 관리실로 곧장 연락해 달란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저씨는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를 강조한다. "인천에서라나 어디서라나. 이 창이 깨져 있으니까 꼬마가 이 안이 어떻게 돼있나 궁금했던 거지. 그래서 이 안에 머리를 빼꼼 넣어서 보고 있지 않겠어? 그러다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 당했잖아." 나는 순간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저씨는 창틀에 흰 접착제를 짜 붓고는 다 됐다며 이제 타라 한다. 이십 층까지 올라가면서 그 조그만 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호기심 많은 아이의 머리와 내려오는 승강기 영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 가슴에 찌릿찌릿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은 오래도록 갔다. 지독하게 아팠다.
상황 이; 친구 S는 이 학년 때 독문과에서 우리 과로 전과했다. 일 학년 때 자길 잘 챙겨줬던 선배를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수업 들으러 가야해서 다음에 만나자며 기약없이 말하며 헤어졌는데 이후에 줄곧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을 하더란다. 할 얘기가 있는가 싶어서 그럼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저녁시간을 잡았단다. 그리고 그 날 선배는 자기 원룸으로 데려가더니 참 진리에 대해 말하더란다. 수도라나 뭐라나. 증산도라든지 대순진리교라고 하는 거. 이른바 '도를 아십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S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믿음은 변치 않는다 했다. 상심해있던 선배는 어딘가에 연락을 했단다. 곧 예쁜 아주머니가 오더니 또 한번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진리에 대해 설파한다. 그런 말을 하면서 조상님에 대해 제사를 잘 드려야한다는 둥, 만복을 누릴 상이나 그늘이 하나 있다는 둥하면서 관상을 봐줬단다. S는 제사 얘기에서는 꿈쩍도 안 했는데 그늘 얘기가 나오자 솔깃했다고 한다. 생기발랄이 모토인 녀석이 S이지만 저 안에 슬픔이나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솔깃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꿋꿋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는 걸 털어놓고 싶었다고 한다.) 슬슬 지쳐가서 간만에 만난 선배에게 자길 반가워한 그 마음만 가져가겠다고 하고 바삐 나왔다고 한다. S의 그늘을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악을 부리는 이들이나 위선을 떠는 이들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들이 세상을 사람을 견뎌내는 안간힘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그늘을 짐작해본다. 그의 밝음 이면의 그 무엇을. 어떻든 S의 그늘의 구체적인 모습을 혼자서 상상하다가 슬퍼졌음은 당연한 거다. 얼마후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S야. 네 그늘의 정체는 뭐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너한테는 말할 수 있지만 남들한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거. 예를 들어 내가 잠 잘 때 심하게 코곤다는 거." 나는 웃고 말았다.
상황 삼; 현대문학을 가르치시는 Y. 그의 어깨는 굽었다.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 늘, 별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왜 별로인지에 대해서 이율댈 때도 사소한 일들 나열 투성이었다. 어느 날 수업 도중에 그의 어깨가 유난스레 눈에 들어왔다. 거슬렀다. 얼마나 어깨를 웅크려서 책을 읽었으면 어깨가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거기에 멈추지 않았고 Y의 어깨를 곧게 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 몰입하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침잠한다. 그의 내면은 수렁같이 질퍽하니 깊고 위험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의 젊을 때를 이끌었던 무엇은 어떤 걸까? Y에 대해 넘겨짚고 오해한 것을 다 토로하고 가만히 그의 말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행여 Y가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비웃겠다. 저 까짓게 뭐나 되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그의 굽은 어깨에 대한 안쓰러움은 오래 갈 듯하다.
상황 사; 달리기를 한다. 비가 오는 날 빼고 몸이 찌뿌드드한 날 빼고. 한결같은 꾸준함이 없는 나로서는 운동하는 날보다 빼먹는 날이 더 많긴 하다. 어떻든 저녁 여덟시에서 한 시간 정도를 뜀박질한다. 비슷한 시간대에 나가다보면 얼굴을 익히는 사람들이 생긴다. 대부분 눈인사를 나누거나 밝게 "안녕하세요?"하기도 한다. 더러는 날더러 "파이팅" 외쳐주고 달려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숨을 헉헉거리면서 달리고 있는 데 앞서 오던 사람이 흥건히 땀이 난 내 손을 부여잡는다. 가만 봤더니 낯만 익다. 예전에 제과점을 했던 사람이다. 대학로의 어느 곳곳의 상점 주인들은 내 얼굴을 기억한다. 우르르 어울려 들어갔다가 소지품을 한가지씩 빠트리고 나오는 터라 그들이 그것들을 맡아두기 때문에. 집 열쇠를 두고 가거나 가디건이나 지갑, 피스 같은 걸 두고 온다. 그 제과점 사장님도 그래서 얼굴이 익었다. 두툼한 바인더를 두고 와서 가지러 갔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거 펴봤나 보다. 자기도 대학 다닐 때 나와 같은 과였다고 하면서 길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제과점은 이내 주인이 바뀌었던 거다. 우연히 만나 손까지 부여잡으면서 인사를 건넬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도 동시에. 갑작스러워 열없이 인사말을 하고 돌아오면서 또 그녀의 반가움, 혹은 쓸쓸함이 나에게 전이되었다. 좀더 반갑게 따듯하게 맞아줄 수 있을 텐데...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꼭 물어보리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의 감정이 내게 전이된다고 느낀다면 나는 분명 무슨 병에 걸린 거겠다. 그렇다고 말하긴 싫지만 지금 나의 상태는 그렇다. 가랑잎이 굴러도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는 여고생도 아니고 무슨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반응을 할까? 가만 속에 담아두는 걸 못하는 말 많은 나로서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러면 그들의 태도는 한결같다. 의아해하며 걱정 어린 눈빛 반, 한심해하는 눈빛 반. 가장 무서운 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넘어서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 J는 나를 정신병원에 감금시켜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격리시켜야겠다고 한다. 행여 일어날지 모르는 나의 발작을 미연에 방지시키기 위함이라나 어쩐다나. 그런데 어쩌나. 나는 너무도 자주 네가 아프고 그들이, 그것들이 아픈데. 마음이 아프다는 추상성말고 실지로 가슴께로 육중한 통증이 느껴지는데. 나의 동정심 만발의 시대가 어서 훌쩍 지나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