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은퇴' 이회창, 창 빼들고 정치복귀?
이회창(李會昌)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진짜 마음을 비웠나?
지난 대선의 패장(敗將)인 이 전 총재 주변에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다시 정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이 총재 측이 정치 재개의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해왔지만 그 가능성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느낌이다. 요즘 이 전 총재 주변에서는 “총재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말도 들리고 “오해를 사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활동공간을 넓히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도 나돈다.
또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이 전 총재에 대한 지지세가 예상외로 굳건하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돼 주목을 받았다. 이 전 총재는 지난 1월 27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질문에 고건 전 총리(46.9%),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32.5%), 이명박 서울시장(29.4%)에 이어 25.9%의 지지율로 4위를 차지했다. 이 전 총재는 지난해 9월 ‘한겨레 21’의 조사에서도 4위를 차지했고, 작년 12월 국민일보 조사에서는 6위를 기록했었다. 정계를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세가 쉽게 꺾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조선일보 조사에서 이 전 총재는 TK(대구ㆍ경북) 지역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했다. 이 전 총재에 대한 TK 지지율은 39.2%로, 2위인 박근혜 대표(38.0%)를 근소한 차로 앞섰다. 고건 전 총리(33.4%)는 3위, 이명박 시장은 29.1%로 4위였다. 이 전 총재는 이밖에도 강원ㆍ충청ㆍPK(부산ㆍ경남)에서 지지율 3위를 기록해 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지지세가 높았다. 이 전 총재는 연령별 지지율에서 20대 1위(27.4%)라는 예상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이는 정치적 무관심층인 20대가 지명도에만 의존해 답한 결과로 해석됐다.
이번 조사에서 이회창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아성인 TK 지역에서 박근혜 대표를 누른 것에 대해 당의 진로를 놓고 갈등을 겪는 한나라당 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다. 한 소장파 의원은 “변화에 둔감한 TK 지역 특유의 보수 정서가 표출된 것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두 번의 대선 패배를 안긴 이회창 총재 측이 이런 일로 괜히 들썩거리면 곤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 TK 의원은 “박 대표로서는 텃밭에서 이회창 표가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는 이유를 잘 새겨봐야 한다”며 “박 대표가 잘못하니까 창(昌)이 뜨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회창 총재 측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지만 싫지는 않다는 표정이다. 측근인 이종구 전 특보는 “자꾸 그런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 것이 부담스럽다”면서도 “TK 사람들 의리는 있다”고 말했다.

▲ 작년 9월 이회창 전 총재가 옥인동 자택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를 배웅하고 있다. | |
‘창사랑’ ‘함덕회’ 등에선 정치 재개 요구
물론 이 전 총재 측은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정치 재개 가능성과 연관지으려는 것에 대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이종구 전 특보는 “누가 뭐라든 총재가 다시 정치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특보는 “대선자금 문제로 서정우 변호사와 김영일 전 사무총장이 아직 감옥에 있는 마당에 총재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전 총재에게 정치 재개를 권유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이종구 전 특보는 “총재의 주변 친구들, 총재를 지지해온 일반인이 자꾸 ‘다시 하라’고 그런다”면서 “우리랑 전혀 상관 없이 ‘창사랑’ 회원들도 자신들끼리 회비를 내면서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11월 이회창 전 총재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공항에 몰려나왔던 ‘창사랑’ 회원들은 실제 요즘도 홈페이지(www.changsarang. com)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원들은 지난 1월 2일 이회창 전 총재의 옥인동 자택으로 신년인사를 갔고, 홈페이지에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이 전 총재의 정치 복귀에 대한 의견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정치 재개 권유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 자체가 이 전 총재가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결과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 총선 당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함덕회’ 인사들도 요즘 들어 이 전 총재에게 정치 재개를 주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전 총재의 참모로 활동했던 한 인사는 “함덕회 인사들이 한나라당의 보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면서 이 전 총재에게 정치에 나서라고 권유하고 있다”며 “이 전 총재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정치 원로로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함덕회란 2002년 대선 패배 직후 이 전 총재 측근 의원들이 제주도 함덕 해수욕장에 모여 결성한 모임으로 양정규 하순봉 정창화 김기배 목요상 최돈웅 김종하 유흥수 전 의원 등이 참여해왔다.
작년 9월 자택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에게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과 관련, “한나라당 소속 의원 121명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며 정계 은퇴 후 처음으로 정국 현안에 대해 언급했던 이 전 총재가 정치적 발언에 대한 스스로의 금기(禁忌)를 조금씩 깨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예컨대 정초 자택 개방을 한 이 전 총재는 정치인, 기자들과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다가 주미대사직을 수락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 전 총재의 옥인동 자택에는 손학규 경기지사, 안상수 인천시장을 비롯 의원 당직자의 발길이 이어져 “창이 건재하다”는 말을 낳기도 했다. 이 전 총재는 작년 10월 롯데호텔에서 17대 국회에 입성한 과거 특보단 출신 의원과 가진 만찬에서도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 미숙 등 정국 현안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 전 총재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 최근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회창ㆍ박근혜 연대설’이 나돌기도 했다. 박 대표가 지난 1월 대표 취임 후 첫 당직개편을 하면서 이 전 총재의 ‘복심(腹心)’으로 불리는 유승민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자 “이회창과 박근혜가 물밑에서 통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연대설에 대해 박근혜 대표 측은 “이미지에 도움될 것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소장파들과도 관계가 소원해진 박 대표가 보수층에 영향력이 남아있는 이 전 총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 적지 않아
이 전 총재가 작년 10월 마련한 남대문 인근 사무실에도 요즘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이 사무실은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의 장남 정연씨의 장인 이봉서 단암산업회장이 소유한 단암빌딩 내에 있는 30평 크기의 규모. 작년만 해도 이 전 총재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에 불과하다며 측근들이 사무실 위치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지만 요즘은 기자와 정치인을 비롯,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종구 전 특보는 “총재와 가깝게 지냈던 외국인이나 동포도 한국에 들렀다가 사무실에 인사차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사무실에 나와 독서 등으로 소일하고 있고, 이종구·이흥주 전 특보 등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이 전 총재의 행보와 관련해 앞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 전 총재가 과연 언제까지 무명(無名)의 개인 사무실(현재 이 전 총재 사무실에는 방 호수만 표기되어 있다)에 만족할 것이냐는 점. 본격적으로 정치 재개를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대선에 두 번이나 참가했던 지도자급 인사가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요즘 ‘재단이나 연구소 등을 차리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주변에 구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 재개로 비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공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묘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3전4기 신화의 산실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태재단을 벤치마킹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 전 총재의 심중에 대해 한 주변 인사는 “이 전 총재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들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