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14일 오후 서울 구로동 구로유통상가 박광수(42)씨의 전자부품 판매점. 성준(9),성진(7) 형제가 TV광고에서 본 노래와 율동을 하느라 열중해 있는 동안 아버지 박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두 아들은 노래를 마치자 준비해온 초콜릿과 양초를 박씨에게 선물하며 “오늘 밸런타인데이 이잖아요”라고 했다.
상업주의로 변질돼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알려진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초등학생 형제가 초콜릿을 들고 아버지 사무실을 찾은 것은 신길종합사회복지관이 준비한 밸런타인데이 행사 때문이었다.
복지관측은 수만원대 선물용 초콜릿이 나올 정도로 상업성이 덧칠된 밸런타인데이를 ‘가족사랑의 날’로 치르기 위해 지난달부터 ‘어린이 초콜릿 배달 프로젝트’ 참가자를 모집했다. 성준 성진이 형제 등 참가 어린이 42명은 이달 초부터 복지관에 모여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포장하며 밸런타인데이를 준비했고,이 날 각자 아버지 직장에 찾아가 초콜릿을 선물하는 깜짝 이벤트를 개최한 것이다.
박씨는 “외환위기 때 회사를 그만두고 전자부품 가게를 차린 뒤 두 아들 커가는 걸 보는 낙으로 살았는데 뜻밖에 이런 선물을 받으니 정말 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형제의 노랫소리를 듣고 찾아온 주변 상인들까지 가세해 박씨 점포에선 왁자한 웃음꽃이 피었다.
또 복지관 자원봉사자 29명은 이날 신길동 일대 독거노인 30여명과 노인회관 등을 찾아 초콜릿을 선물했다. 13년째 홀로 살고 있다는 심재천(66) 할아버지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초콜릿 선물을 받고 깜짝 놀랐다”며 “오랜만에 사람의 온정을 느끼고 옛 기억도 떠올리게 됐다”고 기뻐했다.
복지관 사회복지사 이은주(25·여)씨는 “외국에서 들어와 변질된 문화지만 밸런타인데이가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가족사랑의 날로 정착되면 우리 문화가 될 수 있다”며 “가족과 이웃간의 사랑을 되새기는 날로 자리잡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복지관측은 앞으로 매년 ‘초콜릿 배달 프로젝트’를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정동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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