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가 있다… ‘앙코르’ 는 없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지는 미로(迷路)다. 거대한 사원 앞에 서면 상식(常識)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힌두 전설이 새겨진 벽화와 마주하면 역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비록 역사가나 미술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유적지라도 보통사람들에겐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앙코르 유적지는 역사나 미학을 모르는 무지렁이에게도 울림이 크다.



유적지는 주눅이 들 정도로 거대하다. 앙코르와트를 비롯, 무려 1,000여개의 사원이 흩어져 있다. 불에 타서 검게 그슬린 바욘 사원, 붉은 벽이 인상적인 반테이스레이, 담장 틈새로 아름드리 거목이 뿌리를 내린 타 프롬….

그러나 사원을 들여다보면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침략전쟁과 도굴, 복원 실패 때문이다. 14세기 크메르 왕국을 침범한 태국인들은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신상의 머리와 사자상의 꼬리를 잘라버렸고, 현대에 와서는 일본인들이 사원을 복원한다며 무작정 해체했다가 조립을 잘못 하는 바람에 원형을 훼손, 비가 줄줄 샌다. 프랑스인들은 어이없게도 앙코르와트 사원 천장에 시멘트를 발랐다. 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 각국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유적지는 현대인의 오만과 무지, 그리고 세월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사원을 순례하다보면 시간의 끈을 놓치고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오가며 헤매게 된다. 앙코르 왕국은 9세기에서 15세기에 세워졌다. 당시 앙코르 유적지 일대의 인구는 무려 1백만명. 파리나 런던이 10만~20만명에 불과했다니 얼마나 그들의 문화가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태국 남부와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진출했던 크메르인들은 붉은 빛이 도는 홍토로 기초를 다진 뒤 사암을 깎아 피라미드형 사원을 올리고 왕궁을 만들었다.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고, 벽마다 신화와 역사를 새겼다.

앙코르 왕국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남긴 13세기 원나라 사신 주달관은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통해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이 우뚝 서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들과 돌로 만든 수백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략)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앙코르 제국은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나라라며 감탄했다’고 썼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앙코르 유적지를 다녀간 탐험가들은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밀림 속에 숨어 있었다고 흥분했다. 앙코르와트 사원 하나만으로도 당시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7t짜리 기둥 1,800개, 돌로 된 방은 260개나 된다. 슈퍼컴퓨터로 설계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 사원은 불과 37년 만에 지어졌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유적지는 어떻게 건설됐을까. 현지인들은 천연덕스럽게 신들이 지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왕국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전염병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앙코르인들을 다 죽이고 떠났다는 학설도 있다. 베트남과 라오스, 몽골, 태국의 잇달은 침략에 수도를 옮겼다는 학설이 있지만 1백만명의 대이동이라면 인접국가의 역사에도 나올 법한데 아직 어떠한 단서도 없다. 전염병이라면 유골이라도 남아있을 법한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밀림속에 묻혀있던 앙코르 유적지는 16세기 이후 일부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해 발견됐지만 유럽인들은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스의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유적지가 어떻게 동남아에 있을 수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어 책이 나온 뒤에야 앙코르 왕국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앙코르 유적지는 신이 만들어놓은 퍼즐이다. 다 쓰러진 사원 귀퉁이에 앉아서 멍하니 조각상을 보고 있거나 꼼꼼하게 책을 읽으며 해답을 얻으려고 해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평생을 연구해도 벽화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압살라 여인상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화 속의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것은 행복하다. 앙코르 유적에 반해 털썩 주저앉은 사람도 많다.

“배낭여행을 왔다가 너무 맘에 들어 앙코르 유적지에 들어온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앙코르를 보고 귀국했다가 짐을 싸들고 3일 만에 캄보디아로 돌아온 한국 여성 동료 가이드도 있어요.”(현지 한국인 가이드 조지형)

사람의 생각과 현대 과학의 잣대로도 정확하게 풀 수 없는 앙코르 유적지. 아마도 신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이어주는 ‘비밀의 문’이 사원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캄보디아|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작성 날짜 : 200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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