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섧다네
눈 어두워 그렇지.
돋보기 안경 쓰고 확대경 손에 드나, 그래도 바로 안 보여 두 번 세 번 살핀다네.
늙으면 섧다네
귀먹어 그렇지.
남의 소리 반타작 묻어 귀에 지나가고, 재빠른 전화 소리는 정말 듣기 힘들다네.
늙으면 섧다네
무시당해 그렇지.
수에도 치지 않는 젊은이들 풍조로다.무언가 지들끼리만 쑥덕쑥덕 하누나.
늙으면 섧다네
짝 잃으니 그렇지.
백년 해로 약속 어겨 어느 한 쪽 먼저 가니. 남은 쪽 외로움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늙으면 섧다네
병들어 그렇지.
내 몸은 내 몸이나 내 맘대로 못하니, 옆에서 돌보지 않으면 꼼짝못해 답답하지.”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영선 목사님의 시이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장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인생의 연륜이 더해감에따라 나도모르게 검은 머리가 백발로 변하고, 팔 다리의 힘이 약해지게 된다.
이것은 생리적인 현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맡겨야 할 일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고해서 그 분들이 아예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많은 삶의 경험과 전문 분야에서의 지혜와 혜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때문이다.
성경에도 노인들의 지혜와 현명함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구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다(욥12:12)”고 했다. ,
우리는 노인들의 지혜와 명철에서 오는 경험담과 충고에 귀를 기울일줄 알야야한다.
그분들의 생각과 언행이 때로는 다소 보수적일 수도 있고 세대차로 인해 진부하게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기성세대로부터 배척당하거나 소외당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안에는 젊은 이들이 쉽게 넘불 수 없는 귀한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이든 어른들에 대한 공경을 우리는 그들의 허약한 몸을 부축해 주거나, 그들이 필요로하는 물질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잘못 이해 될 때가 있음을 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에 신중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노인의 공경에 대한 자세의 표출을 넘어 그들이 저녀온 삶에 대한 깊은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참으로 이상한 풍조에 젖어 살고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자녀들을 이해하라, 어린이들을 이해하라, 청소년들을 이해하라,.
신세대 젊은이들을 이해하라.” 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아무도 “부모님을 이해하라, 나이드신 분들을 이해하라, 어른들을 이해하라.”
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외당한 부모와 어른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고, 많은 어른들이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어린이들은 반항으로 자기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하지만, 어른들은 그저 참는것을 능사로 여길뿐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왔던 어른들에대한 생각들을 한번쯤 되돌아볼 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어든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분이요,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물려준 분들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현재와 나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그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명심할 것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것 또한 신앙을 지켜온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성을 다하여 노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들을 공경하며 섬길것을 다짐해야 할 때라고 본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옙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