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박강섭] ‘예전처럼 여행 오세요’
기사입력 : 2005.01.12, 18:09

“지진해일 피해지역은 태국의 경우 푸껫 한 곳뿐입니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인 관광객들만 파타야 등 안전지역의 관광지까지 발길을 끊어 안타깝습니다.”

지난 7일 방콕에서 만난 태국관광청 남아시아 지국장인 완사뎃 타와라둑씨의 푸념에 가까운 하소연이다.

가공할 위력의 지진해일이 태국 푸껫과 인도네시아,스리랑카,인도 등 남아시아 일대의 해안을 휩쓸고 지나가자 유엔과 국제구호단체는 앞다퉈 팔을 걷어붙이고 피해국가 돕기에 나섰다.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는 당초 쥐꼬리만한 성금을 약속했다가 ‘인색한 나라’라는 국내외의 따가운 눈총을 받자 성금을 5000만달러로 대폭 늘렸다. 선한사람들,월드비전 등 기독단체를 위시한 민간기구도 피해 현장에 구호팀을 파견하고 구호물품을 보내는 등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불리는 남아시아 지진해일 참사에 인류애 차원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던 태국 파타야와 말레이시아 페낭 등은 지진해일 피해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의 예약 취소가 잇따라 당사국들을 당혹케 하고 있다. 실제로 매년 이맘때면 겨울 성수기를 맞은 파타야 해변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지만 지진해일 이후 한국인 관광객은 60%나 급감했다.

푸껫은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현실적으로 관광이 힘들겠지만 지진해일과 관련 없는 방콕과 파타야까지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관광수입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태국은 이래저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태국 등 지진해일 피해국가로의 관광을 꺼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염병이나 치안 등 행여 발생할지도 모를 신변 안전상의 문제를 우려해서다. 여기에 한국인의 정서상 수많은 희생자를 낸 피해국가로 관광을 갈 경우 받게 될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연유도 크다 하겠다. 실제로 모 TV가 지진해일이 휩쓸고 간 몰디브 해안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도한 것도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가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태국 등 피해국가의 시각은 한국인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성금을 보내고 구호팀을 파견하는 것이 일시적 도움이라면 관광객이 피해지역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 찾아주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도움이라는 생각이다. “진정으로 태국을 돕는 길은 예전처럼 관광을 와주는 것”이라고 호소한 완사뎃 타와라둑 지국장의 말도 이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3년 전 태풍 루사가 강원도를 휩쓸고 갔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한 강원도엔 연일 줄을 잇던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피해복구에 구슬땀을 흘리느라 경황이 없는 ‘불난 집’으로 관광을 떠나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응급복구가 마무리된 다음이었다. 바닷가 횟집이나 숙박업소 등은 여전히 관광객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강원도와 강릉시는 ‘수해지역 관광은 오히려 수재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파격적인 광고까지 내보냈다. 여행업계에 강원도 관광을 호소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공무원과 주민들이 허리띠를 두르고 서울 도심에서 강원도 찾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농번기에 농촌지역을 관광하면 ‘죽일 놈’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농민들은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는데 팔자 좋은 도시인들의 관광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농촌체험마을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농민들이 경쟁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세상이 되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야’에서 ‘관광객은 천하지대본야’로 마인드가 바뀐 것이다. 이제는 농번기에 농촌을 찾는 것이 오히려 미덕인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진해일 피해지역을 돕기 위해 그곳으로의 여행을 권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떠날 계획이라면 과거의 따가웠던 눈총을 의식해 일부러 지진해일 피해국가를 여행 리스트에서 제외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대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피해국가로의 관광이 실의에 빠진 그들에겐 든든한 재기의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국 등 동남아엔 관광업에 종사하는 교민들도 많다. 현지에서 여행사나 식당 등 관광업으로 뿌리를 내린 교민들은 사스에 이은 조류독감,그리고 이번의 지진해일 등 3년째 계속되는 악재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제발 태국으로 여행을 오세요’라는 완사뎃 타와라둑씨의 호소는 현지 교민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스포츠레저부 박강섭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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