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3일 오전(한국시간) 국제문제협의회(WAC) 주최 오찬 연설을 한 미국 로스앤젤레스 레지스 호텔은 한국 및 미국의 외교·대북 전문가 250여명으로 꽉 찼다. 이들의 눈과 귀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재선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노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에 쏠렸다.
연단에 오른 노 대통령은 북핵이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한 목소리로 전했다. 북한이 왜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할 때는 호소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연설 중간쯤 노 대통령이 원래 준비했던 원고와 다른 내용을 언급하자 참모진은 일순 긴장하는 듯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경우 북한의 주장은 믿기 어려운 게 많지만,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한 합리성이 있는 주장이라는…”이라고 했다가 잠시 말을 쉰 뒤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말을 끊은데 대해 “내가 처음 원고에 준비했던 표현이 있는데,우리 비서들이 그 표현이 민감하다고 해서 고쳤다. 그래서 지금 고쳐진 원고를 보고 처음 했던 표현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 중인데 그 단어는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합리적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이 “그래서 처음 말했던 그 표현을 다시 찾아서 말하겠다”고 하자 잔뜩 긴장했던 장내에 그제서야 웃음이 터졌다. 노 대통령은 결국 ‘합리성이 있는 주장’이라고 했던 부분을 ‘일리가 있는 측면’으로 고쳤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합리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미국민이 매우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 말을 피하면서 사실과 상황에 부합하는 뜻을 전달하려면 이렇게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은 “그 부분은 원고를 준비할 때 참모진 사이에 마지막까지 논란이 있었다”고 전했다.
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특유의 솔직함을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슬아슬했다고 한다. 때문에 외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에 대해 참모진과의 원고 수정 과정까지 낱낱이 밝힐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로스앤젤레스=박주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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