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북한 '주춧돌'이 흔들린다

북한 내부 상황이 심상찮다. 외교소식통들에 따르면 '신'이나 다름없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김 위원장 부자를 모독하는 내용의 '삐라'가 북한 곳곳에 나돌고 있어서다. 일반 북한 주민들이 권력기관의 상징인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방북한 외부 인사들에게 몇 차례 목격됐다. 독재체제의 근간에 균열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권의 중진인사는 최근 "북한 내에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좋지 않은 조짐들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 내 심각한 상황 발생은 한반도 정세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김정일 '삐라'와 스프레이 페인트  북한에 정통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반김정일 '삐라'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 6월 중순쯤. 이후 지금까지 네 가지 내용의 서로 다른 '삐라'가 뿌려졌다고 한다. 첫 '삐라'의 제목은 '용천사고는 김정일 자작극이었다'.



이 '삐라'는 "우리측이 국제사회에 제공한 사진자료에는 룡천역 폭발사고 현장이 대략 70도 정도의 경사로 깊이 15~17m 패어 있었는데, 질산암모니아 화차와 유조화차가 복합적으로 폭발했다면 그런 깊이의 각도와 웅덩이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외부 전문가들의 의혹이다. 그러한 각도와 깊이는 폭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라고 시작한다. 이어 "또다른 의혹은 우리측이 제시한 '파괴된 룡천소학교' 사진자료는 76명의 학생들이 파편에 의해 즉사(우리측의 발표)한 현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괴된 벽면이나 잔해들이 깨끗했다는 것이다. 작은 건물에서 수류탄 한 발만 터져 2~3명만 죽었다고 해도 그 현장은 피범벅이 된다. 대형 폭발사고가 건물 근방에서 발생하면 일차적으로는 안쪽으로 파열되면서 날아드는 창유리와 콘크리트 파편들에 의해 현장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됐어야 하며, 이차적으로는 들이닥치는 초고열로 생존자들이 적어도 2~3도 이상의 화상을 입고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측이 제시한 사진자료의 피해 학생들은 다 옷을 입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삐라'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김정일의 신변안전이 곧 '조국의 운명' '사회주의의 운명'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1선 철도역'인 룡천역에, 더구나 김정일의 중국 왕래시점에 그런 어마어마한 폭발물을 적재한 차량이 과연 머물러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리용할 때는 며칠 전부터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할'정도로 각종 차량은 물론 일반 주민들이 이동도 전면적으로 금지시키며 수시로 무장성원들이 순찰을 진행한다(중략). 김정일의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동상이나 초상화 한 상에 대해서조차 단 한치의 착오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김정일이 통과하게 되어있는 당일에 '1선철도역'인 룡천역에 '지면이 70도 정도의 경사로 15~17m 깊이까지 패이고 '1,850채의 가옥파괴, 800여 명의 리재민 발생'과 같은 어마어마한 폭발물 적재차량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인민들로서는 도저히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일이며, 또 그 무슨 전기접촉 사고로 폭발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더더욱 웃기는 소리이다"는 것이다.   



이 '삐라'는 ▲더 이상 로동당의 선전을 들으려 하지 않는 전체 주민들을 다시 결속하며, 와해된 주민통제 체제를 복구하려는 의도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체제유지 시간벌이'를 위해 중국을 긴급방문하였으나 중국 수뇌부와의 회담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국제사회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 등을 자작극 주장의 배경으로 꼽고 있다.



두번째 '삐라'의 내용은 '김일성은 김정일이 죽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1980년대 말 모든 권력을 움켜쥔 김 위원장이 1994년 북핵 사태 때 김일성 주석이 국가경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핵 문제로 세계가 난리가 났다"고 하자 김 주석이 "잠시 아들한테 나라일을 맡겼더니 이렇게 됐다. 앞으로는 내가 틀어쥐고 하겠다. 이 말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꼭 전해달라"고 답변했다는 말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두번째 '삐라'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말이 아닐 수 있다.



세번째 '삐라'는 '김정일과 김일성 부자의 10대 거짓말'이란 제목으로 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다른 외교소식통은 "예컨대 김 주석이 70년대에 한 약속 가운데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준다'는 게 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쌀밥에 고깃국은커녕 최소생존량에도 못미치는 식량배급이 실시되고 있는 현실을 이 삐라는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네번째 '삐라'의 제목은 '유라는 소련으로 돌아가라'로 돼 있다고 이 소식통은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당국이 선전한 백두산 밀영(김 주석이 운영한 비밀병영) 출생이 아니라 옛 소련 하바로프스크 비압스카야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밝히면서 김 위원장에게 북한 통치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유라는 김 위원장의 소련 이름으로, 김 위원장은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 '삐라'는 북한 밖에서 제작돼 북한 내로 유입된 뒤 북한 내 일부 '반김정일' 세력들에 의해 베껴져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밖에서 누가 제작하고 북한 내로 유입시키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다만 '삐라' 제작자들이 일시 고용한 사람들이 직접 북한으로 갖고 들어가거나 기구 등을 통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북한 내에서 이들 '삐라'가 유포되고 있는 곳은 평양-남포-신의주 등 50여 개 시-군 지역으로 추정된다. 군 지역은 대체로 중국과 국경을 접한 평북, 자강, 양강, 함북도에 집중돼 있다.



북한이 최근 제작-배포한 '강연제강'은 "적들이 기구를 통해서 삐라나 라디오를 우리 공화국(북한)에 뿌리는 이것은 어찌하나(어떻게든) 공화국에 흠집을 내보려는 모략책동"이라면서 북한 군인 등에게 여기에 절대로 현혹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김일성 주석 및 김 위원장의 초상화와 당국의 선전구호를 훼손하는 '중대사태'가 '혁명의 수도' 평양과 남포, 신의주 등 북한 주요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다. 평양에서만 지난 6월 이후 세 차례 이상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인트를 뿌리는 대신 구호가 적힌 담을 허무는 일도 이따금씩 일어난다. 특히 이같은 '반역적' 현상은 올 중반부터 이뤄지고 있어 북한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한다. 지난 50여 년간 없었던 일들이 올들어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무너지는 보위부 권위  지난 5월 용천사고 피해주민들을 위한 지원물자를 갖고 남포항을 방문한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매우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남포항에는 용천주민대표들이 물자 인수를 위해 나와 있었는데 항구에 근무하던 보위부 요원들이 TV등 일부 지원물자를 빼돌리려 하자 이를 제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용천주민대표들은 보위부 요원들이 골라낸 물자들을 가져가려 했고, 이를 막으려고 보위부 요원들이 달려들자 몸싸움을 벌였다. 용천주민대표들은 이 과정에서 보위부 요원들에게 큰 소리로 "남조선과 외국에서 불도쟈를 10대 보냈다는데, 용천에는 3대밖에 오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보내진 살림살이를 가져가느냐"고 항의했다.



같은 상황이 신의주에서도 있었다고 중국 동포들은 전했다. 일부 용천 주민들은 보위부나 사회안전성 등이 가로챈 지원물자를 다시 빼앗아오기 위해 보위부 창고를 급습했다는 말도 전해졌다. 한 중국 동포는 [뉴스메이커]와의 전화통화에서 "용천물자 지원 당시 용천주민들은 북한 요원들이 조금씩 물자를 가로채는 것은 용인했지만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소리를 치거나 물자를 둘러싸 요원들의 접근을 막았다. 보위부 요원들이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면 슬그머니 물러나는 광경을 보며 크게 놀랐고, 북한이 엄청나게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계급사회'가 그곳에서 만큼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올 초 평양에서는 무역일꾼들이 불법행위를 적발하러 나온 보위부 요원들을 꾸짖는 일이 있었다고 중국의 대북경협관계자가 말했다. 일단의 무역일꾼들이 2개의 무역회사를 불법으로 통합한 사실을 알고 보위부 요원들이 단속하려 하자 "당국이 우리들을 먹여살리지도 못하면서 먹고살려고 하는 짓을 막느냐"고 대들었다는 것이다.



엘리트 계층의 반김정일화  지난 5월 모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국가를 방문한 북한의 한 엘리트인사는 해외교포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불쑥 "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이 자리에 있던 해외교포가 전했다. 이 인사는 "외국이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다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다른 참석자들이 주의를 주자 "조선에서도 우리끼리 모이면 김정일 욕도 하고 다들 이런 얘기들을 한다. 김일성 때는 그래도 먹고는 살았는데, 지금은 당이 먹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인심도 각박해지고 당을 욕한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또다른 엘리트인사도 방북한 외국인사들 앞에서 김 위원장을 공공연히 욕했다고 한다. 이 외국인사들은 당시 그 자리에는 이 엘리트 북한 인사를 감시하러 나온 보위부 요원이 있었는데도 거리낌없이 그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탈북자 구호단체 관계자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탈북자들이 식량난 등과 관련해 당-정-군 간부들을 탓하면서도 김 위원장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김 위원장을 원망하고 욕한다고 한다. 이는 한국으로 입국하려 하는 탈북자들과 식량을 구한 뒤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탈북자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북한과 연관을 맺고 있는 또다른 중국 교포사업가는 첨단업종과 무역 등 일부 분야에 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 기관간 유능한 인재를 서로 빼돌리고 빼가는 스카우트가 성행하고 있으며, 좀더 나은 업종으로 전업을 시도하는 새로운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이나 국가가 정해준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전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관행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 교포사업가는 올 초 첨단분야의 국가기관에 근무해온 간부직원 12명이 '돈 잘 버는' 무역회사로 가기 위해 "병에 걸렸다"며 한 달여간 집단 결근을 한 끝에 결국 전업에 성공한 사례를 소개했다. 해당기관에서는 이들이 무역회사로 가는 것을 뒤늦게 알고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한편 해당 무역회사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업가는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던 인재들이 권력이나 명예보다 돈을 찾고 있으며, 이는 엘리트 권력층뿐 아니라 주민들에게서도 일반화된 현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북한은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했다. 북한 주민들은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면서도 '김정일=조국'이라는 등식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가  올 들어 심화되거나 새롭게 돌출된 이같은 이상기류가 북한 사회 전체의 모습인지는 아직 예단하기는 어렵다. 여권의 중진인사도 "북한정권은 지난 50여 년간 숱한 우여곡절과 위기상황을 극복해낸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체제유지에 관한 한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지간한 일로 체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다만 최근의 사회기강 이완 현상이 전 계층에 걸쳐 일어나고 있고, 반김정일 움직임이 원한 등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례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94년 제기된 북한붕괴론은 북한은 40년 가까이 지배해온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북한 사회가 구심점을 잃고 급속히 생존력을 상실할 것이란 관측에서 나왔다. 실제로는 당시 북한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김 위원장의 통치로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한 가혹한 시기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생존'했다. 그러나 이번 고비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민들의 자유롭고 풍족한 삶을 광범위하게 보고 듣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 속에서 체제의 특성을 점점 상실해가는 상황 속에서 맞이한 것이어서 94년과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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