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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에게 반한 적도 없고 사랑을 느껴본 일도 없다. 그래도 10명이나 되는 애들을 낳았다.’
18세기 독일의 어느 평범한 재단사가 남긴 자서전의 한 대목이다. 보통 사람 헨들러라는 인물인데 소위 비망록이라는 걸 남긴 모양이다. 그의 기록은 어렸을 적 필부였던 아버지가 거친 글씨로 갱지 노트 표지에 ‘備忘錄(비망록)’이라는 표제를 달아 장롱 밑바닥에 두었던 것을 보는 듯하다.
생은 거대 담론 ‘국가보안법 폐지’처럼 요란할 것 같으나 이처럼 필부의 비망록과 같은 일상의 연속에 지나지 않다. 마치 방 안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먼지의 흐름까지 잡아내는 따분함 속에 세월은 흐른다. 그런데도 모두 이 따분한 행복조차 지키기 어려운지 필살의 자세로 적을 만들어 내 불편함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똘똘한 내 자식 바보 만드는 것 아닌가 싶은 고교등급제에 대해 흥분하고 오금이 저려 어찌해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성매매특별법 시행에 ‘독립투사’가 된다. 보안법 폐지에 이르면 목소리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미시사(微視史)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역사’ 즉 역사 속의 평범한 개인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학문인 것이다.
경북 예천 대저동에 살았던 박한광(1801∼1834)이라는 분의 기록으로 시작되는 비망록 ‘저상일월’은 우리의 대표적 미시사다. 늦은 중세에서 이른 근대(1834∼1950)까지 6대에 걸쳐 꼼꼼히 기록한 것으로 아버지의 기록을 이어받게 되는 아들들은 “아버지가 쓰던 일기의 수택(手澤?손때)을 보며 감읍할 뿐…”이라고 말한 뒤 이어간다.
‘사학(예수교) 사건으로 서소문 밖(현재의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건너 공원 자리)에서 남녀 10여 명이 처형 당했다고 한다.’(1839년)
‘첫 닭이 울 무렵 도적 7,8명이 칼을 차고 방 안에 들어와 돈을 요구했다. 말만 들었지 도적의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다. 가증스러운 일이다.’(1896년)
‘제천 군수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군수뿐만 아니라 이속까지도 외줄어 엮어 길게 끌고다녔다.’(1905년)
‘면장이 양반,유생가의 전토와 소 말 닭 개 그리고 과실나무 뽕나무까지 자세히 적어갔다.’(1910)
‘(좌·우익의 싸움으로) 원근간에 사상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소문이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1949년)
이처럼 나라 걱정에서 ‘셋째 아들이 아랫마을로 분가했다’거나 ‘친구와 함께 바둑을 두고 담화를 나누었다’ ‘학교 교사를 짓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갔다’는 등의 일상이 소소하게 기록됐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방대한 기록 어디에서도 약자를 억압하고 강자를 등에 업고 날뛰는 일을 찾아볼 수 없다. 또 가부장의 권위 의식으로 집안에서 아이와 여성을 홀대하는 경우도 없다. 20세기 초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 버나드 비숍이 여성의 비참함을 보고 “빨래하는 노예”라고 비아냥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박씨가는 ‘대구에 가서 시험을 보는 둘째 아이를 격려하고 하루 종일 단오를 즐기며 놀았다. 30년 동안 없었던 일이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수대에 걸쳐 가족과 일에 만족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겼다.
대개는 이렇게 소박한 필부필부로 살고자 바란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의 쟁점,직장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린다. 그런데 바로 오늘 옆 차의 운전자는 애써 다스린 마음에 부아를 돋운다.
그 새벽 출근길,거침없이 빠지는 도로 상황에도 결코 신호에 멈추는 일이 없는 차 한 대는 차량 흐름이 워낙 많은 신호등에서 어쩔 수 없이 멈췄다. 우연히 길의 방향이 같아 뒤늦게 그 차 옆에 멈춰서게 된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차 문을 내려 한 마디 하고 만다.
“아니 얼마나 빨리 간다고 그렇게 위반하세요?”
60대인 듯한 부부. 그 남편이 내게 쏘아붙이듯 한 마디 하더니 훽 사라졌다.
“너나 잘해 임마!”
그를 향해 돈키호테가 되고 싶어도 너무 멀리 달아나버려 멍한 상태가 돼버렸다. 그 사이 뒤차가 경적을 울리며 삿대질하며 지나간다. 그래,14년 운전에 과속탐지기에 두 번 찍혀 봤다. 이만 하면 잘 한 거 아니냐. 너나 잘 하라고.
일상을 예찬하려는 우리의 속내는 이처럼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제 자식 실력 점검도 안 해본 채 고교등급제에 다시 흥분하고,정보 제공자의 의도도 모르면서 보안법 폐지 반대 논리에 힘을 실어주며,성매매특별법 제정을 힐난한다. 집에 가면 뚱한 마누라와 밀려드는 카드사의 내역통보서가 기다리고 있다.
아,내일은 반.드.시 행복해야겠다.
전정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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