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의 진주 모로코

 
북아프리카의 북서쪽 끝자락, 스페인 최남단 지브롤터의 좁은 해협으로 유럽과 거의 맞닿아 있는 모로코라는 나라로의 여행은 뭔지 모르게 시작단계부터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남부 유럽과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시가지이며 드넓은 평원, 그런가하면 황량한 사막과 오아시스에서 옛날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소박한 모습, 고풍스러운 모로코 특유의 성채와 미로 같은 옛 도시의 구시가의 골목들…. 이 모두가 모로코라는 나라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카사블랑카를 출발한 일행은 90km 떨어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로 향했다.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의 상업적인 수도라면 라바트는 행정과 교육의 수도. 이곳에서 먼저 방문한 곳은 우다야라는 카스바(카스바는 성채라는 뜻으로 종종 사용됨)라는 10세기에 건설된 성채로 대서양과 라바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가까이에 현 국왕 모하메드 6세의 조부인 모하메드 5세와 부친 핫산 2세 가 잠들어있는 광장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을 달린 뒤 도착한 곳은 볼루빌리스라는 지역으로 북아프리카 최대의 로마유적이 있는 곳인데, 넓은 평지에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아직도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 사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이미 기원 전 3세기부터 약 25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을 비롯해 그리스인 유태인 시리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라틴어를 구사하는 수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위의 평원은 밀 생산지로 유명하였으며 수확 후 대부분 로마로 보내졌는데, 아직도 그 때 이용되었던 목욕탕의 타일과 도서관, 신전과 법원 건물, 그리고 개선문의 유적들이 이곳이 당시에는 얼마나 번창한 지역이었었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18세기까지는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나 인근에 메크네스(Meknes)라는 이슬람의 도시가 생기면서 그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건축자재들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유적이 해체되고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볼루빌리스의 방문을 마치고 페스의 메린디호텔에 도착할 무렵에는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호텔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멀리 앞쪽으로 페스의 구시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정은 우리가 묵은 호텔 옆 언덕의 회교도 묘지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묘지였는데, 하나같이 넓은 부지에 흰색의 직사각형 분묘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묘비에는 아무것도 그리거나 적혀있지 않고, 회교도의 묘지 답게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페스의 구 메디나로 페스 여행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데,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지역을 메디나라고 부른다. 모로코의 대도시에는 이와 같은 메디나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특히 페스의 구 메디나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거대한 미로(迷路)의 시가지에는 수 천 년을 이어 내려오는 페스 시민들의 생활터전이 좁은 골목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당나귀 한 마리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수많은 골목들은 야채와 의류, 감자, 밀가루, 가죽원단 등을 등에 가득 실은 노새와 상인들이 힘겹게 쉴 새 없이 드나들고 뒤를 이어 이곳에 사는 남녀노소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엉켜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다.



평생을 가야 햇볕 한줌 들어올 수 없을 이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방과 학교, 회교사원, 심지어 대학교까지 있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으면 외지인은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페스가 “세계 최대의 미로”라는 별명은 거저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행은 한순간 방심으로 길을 잃게 될까봐 앞사람 엉덩이만 보면서 마냥 부지런히 따라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한참을 돌고 돌아서 유명한 페스의 가죽 염색공장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천년 이상을 전해 내려오는 가죽 염색공장으로, 갓 도착한 가죽 원단을 부드럽게 하기위해 비둘기 똥에 담가서 손과 발로 무두질을 한 다음 염색을 하는 곳으로 과거 한 때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았던 바로 그 '모로코가죽' 원단 생산 공장으로 유명했던 장소이다. 모두 수공으로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아이들의 손을 빌어 짙은 악취 속에서 작업하는 모습은 무척 측은해 보였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면 모로코 도시는 대부분 성채를 중심으로 자연지형 그대로 발달한 것이 특징인데, 낯선 사람이 일단 시가지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얽히고설킨 미로에 정신을 잃게 된다. 모로코 도시가 이처럼 미로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은 성채가 함락되더라도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전술이라고 한다. 침입한 적군을 좁은 골목길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법으로 맞아 싸우겠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 모습을 거의 완전히 보존한 곳으로 유명하며 세계 최대의 미로라는 별명과 함께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천년의 고도 페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사하라 사막을 향해 출발하였다, 모로코를 여행하는 내내 놀란 것은 언제나 푸른 하늘과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를 들 수 있다. 맑은 햇살이 모로코의 기름진 들녘에 비치고 있었고, 널찍한 평원에는 양떼들이 작은 호숫가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사하라로 가는 도중 산맥을 하나 넘게 되는데, ‘리프’라고 불리는 산맥으로 모로코에서는 아틀라스산맥 다음으로 높고 큰 산맥으로 이 산맥의 높은 곳에는 ‘이프란’이라는 작은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제법 부유한 모로코인들의 휴양지로서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방하나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빼곡한 녹지와 아담한 호수, 그리고 그림 같은 집들이 어우러져 지금까지 보아온 모로코와는 너무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산맥을 넘자 이제부터는 여태껏 지나왔던 기름진 풍경과는 달리 척박한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거친 들판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집들은 돌을 주워서 쌓아올린 듯 낮고 투박하였으며 어린아이들과 아낙들의 얼굴은 다소 굳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일행은 도중에 잠깐 서서 마을의 어린 아이들과 노새를 끌고 가는 아낙들에게 사탕을 쥐어주고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오아시스들을 몇 개 지난 뒤 이윽고 사막 초입에 위치한 도시 에르푸드에 도착한 후 사륜구동 지프로 갈아타고는 사하라사막으로 향했다. 먼지 풀풀 날리는 평원을 한 시간 가량 질주하여 도착한 곳은 사하라사막 모래언덕이었고, 그곳에서 사막의 텐트 야영을 결정, 저녁식사로는 양고기 바비큐가 등장했고 와인을 곁들인 사막에서의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아 별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추억에 남을 만큼 낭만적인 밤이었지만 밤에 잘 때는 너무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다음날 새벽 모래언덕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아직 깜깜한 가운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낙타를 타고 언덕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처음 타보는 낙타라서 바짝 긴장하고 손과 어깨는 하도 힘을 주어서 뻣뻣해 질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모래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낙타에서 내린 일행은 모래언덕의 제일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멀리 서서히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은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으며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해가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일순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사하라 사막은 세계 최대의 사막으로 면적이 860만km에 달한다. 북쪽으로는 아틀라스 산맥 및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그리고 동쪽으로는 홍해와 접해있으며, 해안선의 총연장은 8,290km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에서 나제르, 수에 이르는 남북길이는 약 1,700km에 달하는데,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도가 높은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사하라사막의 일출구경을 마치고, 일행은 다시 텐트로 내려와 컵라면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사막과 인접한 마을과 가축시장, 야채시장 등을 구경하면서 카스바 안에 있는 베르베르인의 집에서'꾸스꾸스'라는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에르푸드로 돌아와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은 남쪽을 향해서 이동했다. 검은 염소 떼와 유목생활을 하는 베르베르인 노인가족을 잠시 만난 후 중간에 나지막한 모래언덕으로 이어진 곳에서 사진 몇 컷을 찍은 뒤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사막지역을 점차 벗어나며 황량한 광야로 들어서더니 점차 계곡들이 나타나고 언덕에 근사한 카사바가 나타나더니 계곡은 점점 깊어지고 어느덧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토드라(Todra) 계곡이라는 곳으로 황량한 모로코의 생명줄 같은 물줄기가 깊은 산속에서 계곡으로 흐르는 정말 근사한 곳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는 일단의 외국인들이 암벽을 등반하는 아찔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쩌다 보이는 오아시스 외에는 풀 한포기 나무한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황량한 들판이 이어지다 집이 한두 채 나타나는 듯싶더니 이윽고 버스는 와르자자트(Ouarzazate)에 도착하였다.



아침 일찍 호텔을 떠나 부지런히 북쪽으로 달렸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거리를 달려서 오후에는 마라케쉬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와르자자트 지역 내 최고의 명소인 아잇벤하투라는 성채에 도착했다. 이 성채는 아틀라스산맥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바로서 무려 천년에 걸쳐 부분적으로 더해져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불과 몇 가족 살고 있지 않지만 중세의 모습을 한 모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채로서, 17세기부터 모로코 남부의 아프리카 나라인 말리의 팀북투라는 곳으로부터 암염(巖鹽)을 거래하던 무역통로로서 아랍상인들이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고 가던 때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의 일부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러고 보니 모로코는 또한 예로부터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영화의 주요장면도 이곳 모로코에서 촬영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마냥 있을 수는 없고 카스바를 구경한 다음 우리는 모로코 최대의 산맥인 아틀라스 산맥을 넘기 시작하였다. 산맥의 계곡은 황량하고 거칠고 위험하였다. 산맥을 오를 때만 해도 잔잔하고 맑았던 날씨가 산을 넘어 내려올 무렵에는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하다가 짙은 황사와 함께 바람이 몰아치고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거칠어졌다. 밀폐된 버스 안에서도 먼지가 느껴질 정도여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을 정도였다. 아 이런 것이 모래폭풍이구나 싶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이미 사하라를 지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지금 사막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였다. 이 날 이후로는 우리가 모로코를 떠나는 날까지 여태껏 보았던 맑은 하늘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몇 개의 원주민 마을을 지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서 오후 4시 경 드디어 마라케쉬의 자말엘프나 광장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곳은 마라케쉬 최고의 광장으로 전통물장수를 비롯하여 갖가지 전통공예품상점 그리고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서인지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바람 때문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일찍 호텔에 체크인 하여 쉬기로 결정하였다. 밤에는 비가 밤새도록 퍼붓고 있었다. 사막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날씨 때문에 실망하였지만 모로코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로코는 그동한 7년이라는 오랜 가뭄으로 민심도 흉흉하고 농사를 짓기도 어려워서 서민들이나 농민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이번 비가 정말이지 단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버스를 타고 마라케쉬에서 30여km 떨어진 계곡의 전통 마을을 향해 움직였다. 비는 계속 내렸고 우리가 산기슭에 도착하자 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던 넓은 계곡은 붉은 흙탕물로 넘실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급히 흘러내린 돌과 흙더미로 곳곳에 길이 끊기고 있었다. 방문하려는 마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차를 돌려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결국 안전을 생각해 어렵사리 버스를 돌려서 마라케쉬로 되돌아 왔다.

마라케쉬로 돌아온 일행은 비속에서 쿠추비아 회교사원을 방문하였다. 이 건물은 마라케쉬의 대표적인 회교사원으로서 12세기에 지어진 것인데, 이곳에는 마라케쉬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높이 70m의 탑이 유명합니다. 이 탑과 닮은 것을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할 때 세빌리아 대성당 옆에 건축해 놓은 것으로 히랄다 탑이라 부른다. 사원의 정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고 있으며 무슬림(이슬람에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외에는 실내로 들어갈 수가 없어, 빗속에 사원을 한바퀴 돌아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음날 다행스럽게도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꽤 쌀쌀했다. 이곳에서 카사블랑카로 항하는 길은 아틀라스 산맥 저편에서 보아왔던 경치와는 전혀 다르게 풍요롭고 기름진 평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일행은 교민회관에서 모처럼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오후 답사에 나섰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왕궁, 메디나 광장, 그리고 아프리카 최대의 회교사원인 핫산2세 회교사원을 들러본 후 아인디압 지역의 해변가와 별장지대를 거쳐 다시 교민회관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하이얏 호텔에 체크인 해서 모로코의 마지막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하이얏 호텔의 1층 바에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연배우인 험프리보가트와 잉글릿버그만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기간은 공교롭게도 라마단(회교도들의 금식월)기간 중이라 여러 면에서 불편을 겪기도 했고, 또한 물가도 생각보다 비싼 편이였으며 현지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여의치 않아 기분이 언짢은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모로코는 아프리카나 유럽의 여행과는 또 다른 신비함이 가득한 세계였다.

<제공 레포츠 365·KBC여행사>
작성 날짜 : 200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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