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부모,빚진 죄인
기사입력 : 2004.10.17, 18:09

아들은 궁금했다. 때론 언짢기도 했다. 드린 용돈이 분명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항상 돈이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드린 용돈과 쓰신 곳을 따져볼 때 어머니가 아들 몰래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들은 안타까웠다.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신다고,또 돈은 모아서 뭘 하시겠다고 변변찮게 드리는 용돈을 모으시나 싶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쓸 곳이 있다며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요구하셨다. 아들은 순간적으로 안타까움과 짜증이 울컥하여 “필요하면 드릴테니 가지고 계신 용돈 아끼지 말고 쓰세요” 하고 모진 말을 뱉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용돈 없다”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아들에 대한 서운함이 스쳤다.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신 어머니는 아들,며느리를 부르셨다. 말기 암의 고통을 참느라 악문 어머니의 잇 사이로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을 말씀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아들,며느리에게 집 한칸 땅 한 평 물려주지 못한 게 한이 되셨단다. 특히 며느리 볼 낯이 없으셨단다. 그래서 손자에게라도 논 몇 마지기를 사 주고 싶으셨단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껴 이곳 저곳에 맡기고 감춰 뒀던 용돈을 털어 놓으셨다. 자그마치 3000만원이 넘는 돈이었다. 순간 아들은 목울대가 뜨거워지고 눈 앞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아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요즘 있는 논도 팔아야 할 판인데,누가 농사 짓는다고 논을 삽니까. 논을 사긴”하는 생뚱맞은 것이었다.

왜 우리 어머니들은 평생을,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에게 빚진 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가. 가뜩이나 없는 재산을 남편과 함께 멀리 보낸 뒤 홀몸으로 8남매를 건사하고 아들은 대학까지 보낸,그래서 주위로부터 치마만 둘렀지 남자 몇 몫을 한다고 찬사를 듣던 어머니였건만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게 항상 빚진 마음이어야만 하는가. 어머니의 피와 살을 깎아 먹고 자란 아들은 용돈 몇 푼 드리면서 큰 효도나 하는 양 당당했는데 말이다.

최근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던 90대 노인이 아내를 목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도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치매 증상을 보이던 80대 노인과 6·25 참전 국가 유공자였던 70대 노인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걸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작년 한 해에만 자살한 61세 이상 노인의 숫자는 무려 3653명,그러니까 하루에 10명씩이었다. 경찰의 공식 집계만 이러하니,집계되지 않은 노인 자살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한층 더 늘어날 것이다.

노인 자살 이유의 대부분은 역시 생활고다. 그 중에서도 빠르게 진행되는 가족 해체 현상이 노인들의 자살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부모 봉양이 자식의 의무였던 시대에도 한 부모가 열자식은 키워도,열 자식이 한 부모 모시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전통적 가족관이 무너져버린 상황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지금의 노인세대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자식들에게 올인해 놓고 늙어 경제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59%가 생계를 자식들에게 의지한다고 한다. 반면에 공적 연금이나 개인 연금을 받는 비율은 1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아예 없거나,부양할 의사가 없을 경우 노인들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노인들을,우리의 부모들을 그렇게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여자 홀몸으로 8남매를 키워내고서도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것을 빚으로 여기는 게 우리네 부모들이다. 자식들의 사정이 오죽 딱하면 부모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식들의 짐을 덜어 줄 생각을 했을까만,자식들이 역으로 그런 부모 마음의 10분의1만 부모에게 가져도 비록 가난할망정 극한 상황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노인 문제는 지금이 최대의 고비인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정부의 노인 복지 정책도 좀더 충실해질 것이고 차세대 노인들은 세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도 갖출 것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과도기를 맞은 지금의 노인 세대들의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통적 가족관이 얼마간이라도 더 유지됐으면 좋겠다.

백화종 주필 wjba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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