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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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미래학자'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은 앨빈 토플러는 독자들이라면 책장에 한 권 이상 판형과 출간일을 달리해 꽂혀있을 화제작, 『제3의 물결』을 통해 수많은 열성팬들을 양산해냈다. 당시 그의 역사의 흐름 또는 발전에 관한 통찰력은 호두를 망치로 내려칠 때의 그 무수히 퍼지는 파편처럼 온갖 통념들을 수천 갈래의 조각으로 깨뜨려 사방 수십 킬로미터에 쏟아놓는 것이어서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농경기술에 기반한 제1의 물결과 산업혁명이 결과한 획기적 기술력이 선도한 제2의 물결을 거쳐 제3의 물결이 쏟아놓는 과학기술의 세례를 받는 데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물결'로 표현한 독창성도 그렇거니와 역사 흐름을 간단없이 3단계로 나누는 과단성과 단순함에 기가 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논조는 비관적이지 않다. 각각의 시대엔 그들 나름의 썩은 부산물이 발산하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정신의 고양이 서서히 사회를 장악하고 나면 끝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그 부산물의 양에 비할 때 섣부른 낙관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 책 『부의 미래』 또한 그런 그의 미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파장의 측면에서 전작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분석력은 보다 더 날이 섰다. 하지만 처방은 여전히 단조롭다. 그런 그의 교과서적인 해법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만드는 주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달리 보면 다수가 긍정하는 현실적인 처방이라는 것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임기응변 또는 임시처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확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라질 운명에 처한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 운동이 일례가 될 것이다. 처음 그 운동은 사람들을 보다 빨리 실어 나름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고차원적으로는 바쁜 사람들을 우선 배려하는 심성의 발로이므로 권장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전되었다. 그러다 최근 그것이 오히려 에스컬레이터의 한쪽에 하중을 높임으로써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주춤한 상태다.

 

가족 관계의 붕괴나 가치관의 분열 등 현대사회의 병폐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식의 비현실적인 선동이나 윤리 교육의 강화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현실을 꿰뚫는 정확한 지식의 필요성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다가올 미래사회는 그 지식이 제4의 물결을 형성하고 새로운 부의 원천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생멸을 거듭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 시장은 무용 지식과 진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지식 노동자는 과거 어느 때보다 지식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 또 다른 곤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과학은 진실을 가려내는 도구로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지적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이 책과 맥락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처녀작에서부터 이후 연속적으로 선보인 후속작에 이르기까지 토플러는 한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의 흐름을 맹렬히 추적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권력이 기술과 지식 등으로 이름을 달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식 기반의 사회를 살고있는 오늘 우리에게 지식의 향배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또 다른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 -『부의 미래』(앨빈 토플러, 청림출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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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예배
마이크 필라바치 지음, 채수범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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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희생이 일란성쌍생아라는 사실을 이 책만큼 실감나게 그려낸 책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희생 없는 예배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예배 없는 희생은 만용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려는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자기 만족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헌신을 자기를 드러내는 도구로 손쉽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과연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지', 자기 위안을 삼고자 '예배 시간에 참석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예배에 관한 한 실질에 있어서 지금도 모델로 삼고 있는 구약의 제사를 살펴보는 것이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첫 예배를 시작하는 장면과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오는 장면을 중첩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희생이 어떤 모양으로 구체화되고 있는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 22,000 마리의 소와 120,000 마리의 양을 불살랐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왕의 체신은 아랑곳 않고 옷이 흘러내릴 정도로 춤까지 췄습니다.

 

저자는 솔로몬이 바친 제물이 당시 이스라엘 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의 제사 또한 상식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의 성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무리 작은 거리라고 해도 여섯 발자국마다 제사를 드렸다면 불사른 제물의 수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을 했을까요? 양과 염소를 잘 고아 백성들에게 먹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가치를 더 높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연인의 태도와 견줄 수 있습니다.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장 좋은 것을 주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솔로몬과 다윗, 그리고 백성들은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표현 또한 제대로 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터무니없이 상식 파괴적입니다. 또한 현실 위에 붕 떠 있는 사람처럼 이치에 맞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면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충만함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 당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연인 관계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외면하고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독한 외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깨달은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 사랑이 어땠을까요? 시간 맞춰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에 만족했을까요? 말씀이 들려오든 들려오지 않든 무덤덤히 예배당을 나섰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애타게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가슴 절절하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위해 정말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관점이 바뀐 자의 애탄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벅찬 심정을 하나님이 가지셨을 것이라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솔로몬과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제물은 그것을 표현하는 한 조각 애닮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면 좋을까요?, 하고 묻는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책은 어느새 정례회의처럼 돼버린 우리의 예배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다시 그 예배에 불이 붙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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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약국 갑시다 - 무일푼 약사출신 CEO의 독창적 경영 노하우, 나는 4.5평 가게에서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배웠다!
김성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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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평 가량의 약국을 일약 지방 군소도시 제일의 약국으로 변모시킨 저자의 이야기가 화제다. 서울대 재학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졸업 후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약학대를 지원한 저자는 졸업하고 나서도 약국을 낼 돈이 없어 빚을 얻어 마산 변두리에 간신히 약국을 내기에 이른다.

 

버스도 오지 않는 외딴 지역에 주민들의 통행마저 뜸한 약국 위치는 그야말로 경쟁 원리로서 시장 선점이나 타깃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구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졸업 동기들은 전망 좋은 지역에 큰 약국을 열고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전략을 하나둘씩 세우고 본격적으로 약국을 알릴 채비에 나선다. 그 첫 번째가 약국을 마산의 랜드마크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바라는 대로만 되면 홍보는 물론 수입 또한 보장되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어느 누구도 변두리 4평의 작은 약국을 알아주지 않았다.

 

택시를 탈 때마다 그는 “육일약국 갑시다”, 고 외치기 시작했다. 육일 약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운전기사들에게 약국 위치를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한지 3년 만에 드디어 육일 약국은 마산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약국이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비좁은 약국의 평수를 늘리기 위해 약국 내 방 면적을 축소하고, 손님이 뜸한 저녁에도 약국 이름을 알리기 위해 통상적인 밝기를 무척 상회하는 네온사인으로 교체하였다. 당시로선 터무니없이 비쌌던 자동문을 마산에서 두 번째로 설치하기도 했다. 수입과 비교해 볼 때 어리석은 투자로 보였던 그런 조치들은 약국을 알리려는 데 전력을 투구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약국의 수입은 나날이 늘어갔다.

 

그렇다고 그가 수입구조에만 몰두했던 건 아니다. 그는 손님의 니즈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약사의 의자 높이를 고객의 의자 높이에 맞추어 고객으로서 정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고, 고객의 이름과 병력을 되도록 모두 암기하고 상담시간을 대폭 늘려 친근감을 높였다. 이외에도 집을 찾는 데 애를 먹는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한편, 약을 살 돈이 없는 할머니들에게 간단한 약을 지어주는 등 수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라 해서 외면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행보로 그는 지역 주민들이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행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경영 원칙은 한가지로 집약된다. “고객을 최우선의 가치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세가 커지면 안주하기 쉽다. 안주하기 시작하면 동종업계에서 뒤쳐지는 건 시간문제다. “어렵게 가꾼 성공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게 했다“, 고 그는 말한다. 고객을 최우선 가치로 삼은 그에게 고객은 수입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고 하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려는 그의 의지와 맥을 같이 한다. 약국 명칭 또한 다르지 않다. 고객의 가치에 눈 뜬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그는 현재 메가스터디  엠베스트 대표로 있다. 또 다른 변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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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청년 2007-10-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21세기북스의 책을 찾아주셔서 넘 고맙고 반갑습니다^^
21세기북스 네이버 카페로 오시면, 저희 회사의 신간 이벤트와 서평이벤트 등 다양한 즐거움을 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책 저자와 기획자와도 만나보실 수 있구요...
위의 내용처럼 저희 카페에 남겨주시면 넘 감사하겠습니다^^
cafe.naver.com/21cbook 으로 놀러와주세요^^
 
영남민국 잔혹사 - 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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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선거철에 지면이든 방송이든, 저자거리든 사람들이 모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혼을 쏙 빼놓는 지역주의 문제. 이 지역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책이 나왔다. ‘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다소 긴 부제를 단 『영남민국잔혹사』는 가상인물과 인터뷰를 하는 형식을 빌려 주제의식을 심도 있게 끌고 가고 있다.

 

현세주의적인 속물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 페렝키와 지역주의문제를 다년간 탐구한 저자를 표상하는  인터뷰어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중심구도로 하여 현실 사회에서 떠도는 또는 학술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한편에서 소개되고 또 다른 한편에선 논박된다. 그러다보니 자연 독자로선 그들 사이에서 생멸하는 다양한 사실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말 속에서 과거 어느 시점의 또렷한 기억들이 쏟아내는 감흥 같은 것들에 젖기도 한다.

 

 어느 면에선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책이 이야기 구도를 취한 데서 온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논증마저 허술할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 학술적인 글만큼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논증을 이끌어가는 솜씨가 탁월하지는 않다 해도 저자가 이 시대 가운데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살아있는 글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뚜렷하다. 이 땅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역주의문제를 향해 “지역주의란 애초 없었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일로 지금은 정권교체에 의해, 또는 균형발전에 의해 크게 사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자꾸 지역주의문제를 끄집어 내다보면 생채기만 깊어질 뿐이다. 더 이상 지역주의는 없다”고 선언하는 제 세력을 향해 저자는 지역주의란 그렇게 떠든다고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역주의 문제는 수십 년간 실체로서 이 땅에 존재해온 굴절된 의식이자 어느 한쪽이 측은지심에서 시혜를 베푼다고 사라질 안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유다.

 

그렇다고 영남이 수십 년간 집권해 왔듯이 호남 또한 그와 동일한 시간 동안 집권하는 기계적인 균형을 갖추면 지역주의 문제 또한 사라질지, 아니면 옅어지기라도 할런지 의문이다. 정통성을 잃은 과거 군사정권이 폭압을 통한 통치 방식의 한 형태로 끊임없이 호남을 압박해오면서 호남의 살림 전반이 피폐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언제 우리도 그와 같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의식을 심어주고 그럼으로써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굴종의식을 내면화시켰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넓게 보면 그런 논리가 틀리지 않다하더라도 지역주의 문제가 다분히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가 키워온 기현상이라는 데에 시선을 갖다 둘 필요가 있다.

 

충청과 강원, 그리고 서울을 포함한 경기의 입장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 보면 지역주의는 영남과 호남 양 지역이 패권을 다투는 밥그릇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영남과 호남 어느 한쪽에 붙어야 연명할 수 있다는 굴종의식이 강제되고 있었다고 하면 억지일까?

 

지역주의 문제가 영남과 호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앞으로도 당분간 영남과 호남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 갖겠지만 그 사이에서 타 지역은 선택의 여지없이 피해자로 남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몰염치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이 영남과 호남을 넘어선 지역주의의 폐해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지역주의 문제를 영남의 눈으로, 또는 호남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찻잔 속의 태풍이 되지 않으려면 다층적인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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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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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한 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순간 정지 화면과 저속 촬영장면이 컴퓨터 그래픽과 조화를 이루며 볼거리를 제공했던 그 영화는 그런 화려함보다는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로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혹시 우리가 사는 이 현실도 실재하는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후 앞 다퉈 출판되는 각종 교양 철학책의 저본으로 쓰였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건 그 영화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던 화두를 잠시 빌리기 위해서지요. 그 화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는 해묵은 의문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문이야 평소엔 거의 잊고 살지요. 배울 것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중요한 의문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마터면 사장될 뻔한 유용한 지식들이 그런 의심과 의문들 속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았던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비단 특정 지식만이 아니겠지요.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단체나 개인이 목적을 위해 특정 인물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 그 인물과 관련해서 그런 평가만을 들어온 일반인은 그를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최근 실천문학사에서 『이현상 평전』을 냈습니다. 이현상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 대장입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공산주의로 물들인 모리배이며 국군을 수없이 살상한 흉악무도한 괴뢰도당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출판사가 그런 그를 재조명하겠다고 ‘그에 관한’ 책을 낸 것입니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출판사가 내세운 카피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피는 이렇습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왜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현상.’

 

남과 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엔 패역한 일이 되기에 그와 같이 흑백논리로 이현상을 보면 더 이상 얘기를 전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자택일의 상황논리를 잠시 벗고 그가 지향했던 가치를 들여다보면 판단은 달라집니다. 그 바탕 위에 이 책이 쓰였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역사책에 기록된 과거가 곧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역사를 함부로 기술해서는 안 되겠지요. 다음 세대가 제대로 된 역사를 통해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좋은 것은 널리 이어가도록 고무할 책임이 현 세대에게 있습니다.




저자가 과거의 현장을 헌 발로 찾고 고통스럽게 밟아간 긴 궤적 또한 그런 책무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의 이데올로기로는 인물이 투사하는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야 이데올로기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거철을 맞아 흑백논리가 여전히 판을 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균형감각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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