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민국 잔혹사 - 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유독 선거철에 지면이든 방송이든, 저자거리든 사람들이 모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혼을 쏙 빼놓는 지역주의 문제. 이 지역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책이 나왔다. ‘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다소 긴 부제를 단 『영남민국잔혹사』는 가상인물과 인터뷰를 하는 형식을 빌려 주제의식을 심도 있게 끌고 가고 있다.

 

현세주의적인 속물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 페렝키와 지역주의문제를 다년간 탐구한 저자를 표상하는  인터뷰어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중심구도로 하여 현실 사회에서 떠도는 또는 학술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한편에서 소개되고 또 다른 한편에선 논박된다. 그러다보니 자연 독자로선 그들 사이에서 생멸하는 다양한 사실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말 속에서 과거 어느 시점의 또렷한 기억들이 쏟아내는 감흥 같은 것들에 젖기도 한다.

 

 어느 면에선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책이 이야기 구도를 취한 데서 온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논증마저 허술할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 학술적인 글만큼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논증을 이끌어가는 솜씨가 탁월하지는 않다 해도 저자가 이 시대 가운데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살아있는 글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뚜렷하다. 이 땅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역주의문제를 향해 “지역주의란 애초 없었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일로 지금은 정권교체에 의해, 또는 균형발전에 의해 크게 사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자꾸 지역주의문제를 끄집어 내다보면 생채기만 깊어질 뿐이다. 더 이상 지역주의는 없다”고 선언하는 제 세력을 향해 저자는 지역주의란 그렇게 떠든다고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역주의 문제는 수십 년간 실체로서 이 땅에 존재해온 굴절된 의식이자 어느 한쪽이 측은지심에서 시혜를 베푼다고 사라질 안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유다.

 

그렇다고 영남이 수십 년간 집권해 왔듯이 호남 또한 그와 동일한 시간 동안 집권하는 기계적인 균형을 갖추면 지역주의 문제 또한 사라질지, 아니면 옅어지기라도 할런지 의문이다. 정통성을 잃은 과거 군사정권이 폭압을 통한 통치 방식의 한 형태로 끊임없이 호남을 압박해오면서 호남의 살림 전반이 피폐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언제 우리도 그와 같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의식을 심어주고 그럼으로써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굴종의식을 내면화시켰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넓게 보면 그런 논리가 틀리지 않다하더라도 지역주의 문제가 다분히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가 키워온 기현상이라는 데에 시선을 갖다 둘 필요가 있다.

 

충청과 강원, 그리고 서울을 포함한 경기의 입장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 보면 지역주의는 영남과 호남 양 지역이 패권을 다투는 밥그릇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영남과 호남 어느 한쪽에 붙어야 연명할 수 있다는 굴종의식이 강제되고 있었다고 하면 억지일까?

 

지역주의 문제가 영남과 호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앞으로도 당분간 영남과 호남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 갖겠지만 그 사이에서 타 지역은 선택의 여지없이 피해자로 남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몰염치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이 영남과 호남을 넘어선 지역주의의 폐해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지역주의 문제를 영남의 눈으로, 또는 호남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찻잔 속의 태풍이 되지 않으려면 다층적인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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