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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ㅣ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한 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순간 정지 화면과 저속 촬영장면이 컴퓨터 그래픽과 조화를 이루며 볼거리를 제공했던 그 영화는 그런 화려함보다는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로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혹시 우리가 사는 이 현실도 실재하는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후 앞 다퉈 출판되는 각종 교양 철학책의 저본으로 쓰였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건 그 영화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던 화두를 잠시 빌리기 위해서지요. 그 화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는 해묵은 의문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문이야 평소엔 거의 잊고 살지요. 배울 것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중요한 의문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마터면 사장될 뻔한 유용한 지식들이 그런 의심과 의문들 속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았던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비단 특정 지식만이 아니겠지요.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단체나 개인이 목적을 위해 특정 인물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 그 인물과 관련해서 그런 평가만을 들어온 일반인은 그를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최근 실천문학사에서 『이현상 평전』을 냈습니다. 이현상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 대장입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공산주의로 물들인 모리배이며 국군을 수없이 살상한 흉악무도한 괴뢰도당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출판사가 그런 그를 재조명하겠다고 ‘그에 관한’ 책을 낸 것입니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출판사가 내세운 카피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피는 이렇습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왜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현상.’
남과 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엔 패역한 일이 되기에 그와 같이 흑백논리로 이현상을 보면 더 이상 얘기를 전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자택일의 상황논리를 잠시 벗고 그가 지향했던 가치를 들여다보면 판단은 달라집니다. 그 바탕 위에 이 책이 쓰였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역사책에 기록된 과거가 곧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역사를 함부로 기술해서는 안 되겠지요. 다음 세대가 제대로 된 역사를 통해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좋은 것은 널리 이어가도록 고무할 책임이 현 세대에게 있습니다.
저자가 과거의 현장을 헌 발로 찾고 고통스럽게 밟아간 긴 궤적 또한 그런 책무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의 이데올로기로는 인물이 투사하는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야 이데올로기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거철을 맞아 흑백논리가 여전히 판을 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균형감각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