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험 - 바이오스피어 2, 2년 20분
제인 포인터 지음, 박범수 옮김 / 알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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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주 탐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주선 폭발 사고 이후 태양계와 그 너머까지 탐사선을 보내 고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와 지구 환경과 유사한 행성을 찾으려던 그 동안의 노력이 다소 주춤한 상태지만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여전히 힘찬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도 그 대열에 합류하는 의미있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비록 우주선에 탑승하는 수준에서 그쳐 아쉬움을 남겼지만 우주 과학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될 전망이어서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 '또 다른 행성'에 대한 막연한 관심과 희박한 가능성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생존 조건과 가능성에 관해 장기간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어느 행성에서든 생존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려는 실질적인 노력이 책으로 묶여 나와 반가움을 던져주고 있다.

 

1991년 9월 26일 일군의 과학자 8명이 외부와 차단된 바이오스피어2에 들어갔다. 그들은 장차 인류가 우주 공간에게 살게 될 때를 대비한 2년간의 실험에 자발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3개 구역(열대우림 생물군계, 사바나 생물군계, 사막 생물군계, 습지 생물군계, 대양 생물군계, 인간거주 구역, 집약농업 구역)으로 구획된 바이로스피어2에서 생활하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후와 토양의 변화 등 다양한 변화를 체크하고 관리하도록 명을 받았다.

 

바이로스피어2는 1,275 헥타르 면적에 세계 각지에서 공수해 온 3,800종의 동식물을 갖추고 있었다. 특정 면적에 세워진 구조물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제외하면 바이오스피어2는 지구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했다. 그래서 제2의 지구라는 의미로 바이오스피어2라고 명명되었다. 8명의 프런티어들은 2년,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들을 맞기 위해 바이오스피어2 밖에서 공식행사가 이뤄진 20분을 더해 총 2년 20분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책은 그런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자 과학적 연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인 제인 포인터는 그 8명의 프런티어 중 한사람으로 학구적인 열심과 실행력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이 역사적인 발자취에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오늘날 이와 같은 책으로 이 땅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에 일종의 전율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녀의 기록은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꼼꼼하다. 마치 2년간 펜을 꾹국 눌러쓴 일기를 훔쳐보는 듯 그녀와 7명의 동료들의 삶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글은 유연하고 내용은 소설 읽히듯 자연스럽다. 과학적 주제를 다루는 글이란 대부분 어려운 용어와 현란한 도표로 뒤덮여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전부 내려놓아도 좋을 만큼 이 책은 형식 파괴적이다. 605 페이지라는 책의 두께가 무색하리 만치 속도감 또한 빠르다.

 

잠시 언급한 것처럼 우린 이제 우주 시대에 작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갈수록 나빠지는 환경과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기아, 나날이 고갈되는 자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 등 인류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할 이상의 문제들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그 실마리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다보니 인류는 일찌감치 외부로 눈을 돌려 지구와 환경에 유사한 행성을 찾는 데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행성은 과거 수십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설혹 그런 행성을 찾는 다해도 그곳까지 인류를 수송할 우주선의 개발이라는 난제를 현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우주선과 탐사선을 수억 광년 떨어진 우주 공간으로 날려보내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측면의 보상 효과를 노린 측면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 같은 것 말이다. 내부 정치 문제를 외부로 돌림으로 쟁점을 희석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현실적인 난제를 고려하지 않은 실험의 결과는 비현실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오스피어2는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인류가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진 화성에 바이오스피어2를 건설하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오직 태양광에 의존해 생존에 필요한 동식물과 산소 등을 성공적으로 획득한 실험 결과는 극히 고무적이다.

 

아울러 우주 건설 사업의 대안으로서의 비용 대비 효익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물론 2년의 20배 또는 무한의 생존 보장이라는 확고한 연구 결과가 선행되어야겠지만 이미 바이오스피어2는 그 점에 있어서 의미있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 실험을 필두로 연구가 계속 진행된다면 보다 완벽한 형태의 실행안이 도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 전적으로 이 분야의 과학자의 몫이지만 일반인 또한 연구가 지속될 수 있도록 관심괴 지원의 힘을 보탤 필요가 있다. 저자가 밝힌 바대로 이 실험에 대해서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실험'이라는 뒷말이 무성했으니 말이다. 인류를 위한 희생적인 행동에 박수는 보내지 못해도 훼방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처럼 10년의 세월을 분노 가운데 보내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이 책이 '인간실험'이라는 표제를 선명하게 단 이유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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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처음 만나는 성경 속 영웅 이야기 - 남자 영웅편
줄리 클레이든 지음, 안젤라 졸리페 그림 / 가치창조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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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 아이들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에서나 행동하는 것이 무척 어른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상상력마저 어른스럽다면 문제겠지요. 하지만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 교육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이들에게 창발성을 고양시켜줄 방법을 모색하고 꾸준히 실천해 왔습니다. 아직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지만 기존 시민의식에 긍정적인 균열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이 교육교재와 사교육계에 의미있는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계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교육에 관한 한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보면 어느 단체라고 뒤질 수 있겠습니까. 화려한 그래픽과 호감도 높은 인물 묘사, 재미와 교훈을 두루 갖춘 정감 넘치는 스토리 등 과거와 견주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이 최근 아이들을 위한 기독서적의 출판 동향에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책, 『우리 아이 처음 만나는 성경 속 영웅 이야기』 또한 그런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색감은 아이들의 정서에 맞춰 극히 따뜻하고, 스토리는 아이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단순 명료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단어를 선택하고 특정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낸 점 또한 돋보입니다. 인물의 특징을 잘 살려 놓아 아이들이 각 인물들에게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높이 살만합니다.

 

성경학교와 어린이 예배를 통해 자주 만나는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이들 편에서 보면 식상해 할 요인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또 그 이야기야” 하는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자주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때 인물들을 다른 시각에서 볼 줄 아는 안목이 발휘된다면 떠났던 아이들의 시선은 돌아오기 마련일 것입니다. 물론 성경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특성은 대부분 정형화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캐릭터가 나오기도 할 것입니다. 이 책의 주안점도 그 부분에 있다고 믿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책을 읽는 일곱 살 난 셋째 아이를 보면서 전 달리 생각했습니다. 좋은 책이란 아이들에게 읽히는 책이며 아이들의 호기심을 발동하는 책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인물을 해석하고 그린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바람직한 영웅의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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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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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욕심을 내도 채울 수 없는 것을 꼽으라면 공부도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공부에 맛을 들인 사람 치고 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일가를 이뤘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점 충분히 이해되고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자신에 대해 은근히 자랑 놓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공부도둑이라 칭하고 있지 않은가.

 

사정은 이렇다. 옛이야기 중에 아비 도둑이 아들 도둑과 함께 도둑질하러 들어간 집에서 부러 소리를 내 주인을 불러내고 자신은 도망함으로써 아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 상황에서 아들은 여러 가지 꾀를 내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경위를 따져 묻는다. 그제서야 아비는 몸으로 배운 것만 남는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과연 아들은 대단한 도둑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후 저자는 물건을 훔친 도둑에 빗대 자신이 공부를 훔쳤다 하여 '공부도둑'이라 이름한 것이다. 더불어 정교한(?) 도둑질을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은 아비처럼 자신 또한 공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연유야 어떻든 저자의 이력을 보면 수긍 못할 바도 아니다. 공고를 나와 남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대학에 진학하고 저자 말마따나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재가 모두 모인 물리학과를 남다르게 졸업했으니 그럴만하다. 더욱이 저자는 그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저자의 이 책은 그런 그의 이력과 병진하지 않는다. 평소 쌓아둔 재력과 학력에 무임승차하여 이후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달리 저자는 현직에 있던 때와 그렇지 않은 때에 상관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공공부냐 인생공부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형태든 자신의 부족을 일치감치 깨닫고 그것을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인생과 학문을 대하는 가장 겸손한 태도라는 점에서 저자의 행보는 본받을만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저자에겐 일종의 풍모가 느껴진다. 비록 이 책이 명료한 주제의식 갖추고 특정 주제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진 못해도 책에 실린 저자의 글편은 공부와 인생에 관한 짧지 않은 경륜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대하는 독자에겐 진중한 발걸음이 요구된다. 


 

이 책, 『공부도둑』은 열두 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가 이 책을 신명나는 놀이터로 삼아 자신의 삶을 온통 풀어헤쳐 놓으려고 작심한 듯하다. 글의 전개방식이나 형식, 심지어 말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거침이 없다. 언뜻 가보지도 않은 몽고 벌판을 연상하고 연이어 그곳에서 뿌연 모래먼지 날리며 내달리는 말떼를 단박에 떠올린 것은 적어도 그의 글이 날것처럼 입안 가득 씹혔기 때문일 것이다.

 

목구멍에 넘긴 후 모래를 퇘, 하고 뱉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그런 생짜를 맛보는 기분이란 마치 방 문고리마저 손에 쩍쩍 달라붙는 매서운 겨울날 화롯가에 앉아 고구마 구어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 하나를 조심스레 건져 올린 감상처럼 뒷맛이 오래간다.

 

구닥다리 나이, 70에도 여전히 생기있는 글맛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얼핏 그의 삶이 도둑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도둑질, 거기다가 잡히지 않으려고 온갖 기술을 연마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두루 갖추는 일이 어디 쉬울까마는 그만의 독특한 비법이라 하기엔 이젠 너무 잘 알려진 박이정(博而精, 나무도 보고 숲도 봄)의 태도가 그와 궤적을 같이하는 한 그는 늙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박이정엔 총명한 냄새가 난다. 오래 묵은 내. 누렇게 바랜 책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종이 내음에 모처럼 취해볼 요량이라면 이 책이 제격이다. 새파란 어린이들에겐 훈장 선생이 되어 줄 것이고 다 큰 어른들에겐 고향의 손맛을 선사할 테니, 이 책 고르고 크게 후회할 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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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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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누가 발사했는지 찾을 수 없는 미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총기를 나는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나 그가 죽기를 기다렸겠니. 아, 그런데도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에 신통력을 갖고 싶었다. 아! 소리치며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할 수 있으려면 그 누군가가 평생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거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 곧 누군가가 심장에 켜켜이 애증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곁에서 24년간 병 수발을 할 당시 저자가 남편에 대해 품은 뜻은 어서 낫기를 바라는 심정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고 근친이 낫기를 바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마는 하루 두 해가 아닌 수십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차압당한 채 기약 없는 수발을 들어야 했던 저자에게 그 일은 천형보다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심경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저자를 부도덕하다고 욕해도 할말이 없게 생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저자의 심경 토로가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24년의 병 수발이라는 맥락이 정도는 달라도 유사한 경험이 없을 수 없는 독자들에게 심정적으로 이입이 쉽도록 이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저자가 남편과 겪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시계열로 기록한 다큐멘터리이자 치부와 격정을 가감 없이 기록한 자기 고백서다. 그런 만큼 빠른 공감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런 공감은 대부분 내가 저자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무거운 부채감에서 비롯한다. 일정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누군가에게 닥친 불행이 더 이상 남의 일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급작스러울 정도로 날이 선 저자의 외침이 비경험이라는 외피를 벗고 공감각적으로 전달되고 그와 다른 시대와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동시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리라. 깨알 같이 적힌 활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나와 울음을 '꺽꺽' 삼키며 격정을 토하는 듯한 착각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의무감으로 쓴 글과 메마른 글에 식상하여 에세이란 말의 상찬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편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이 안성맞춤이다.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에 허기를 느껴왔던 독자라면 이 책이 더더욱 제격이다. 생기를 부여받은 활자와 속에 있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울컥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칠지 모른다. 그래서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회한에 잠길지 모른다.

 

하지만 곧 뻥 뚫린 듯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심경의 토로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하는 순간 마치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옥죄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린 듯한 경험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은 외양은 저자의 고백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고백에 감정이입한 나의 고백이자 우리의 속 깊은 얘기가 된다. 오랜만에 맛보는 가슴 시원한 역설적인 얘기를 거침없이 권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골방에 꼭꼭 숨겨둔 어둡고 슬픈 저마다의 과거가 이 책을 통해 밝은 광장으로 걸어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어느 현자는 말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할 때 그것이 지고의 경지라고. 그래, 나는 지금 물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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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도박 - 유럽을 뒤흔든 세계 최초 금융 스캔들
클로드 쿠에니 지음, 두행숙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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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의 형식을 빌려 실존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소설, 『거대한 도박』은 무대로 삼은 영국과 프랑스가 장식적 요소 외에 별다른 장치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장쾌한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어 아쉽다. 물론 그 한계는 이 소설이 실존 인물을 전면에 배치한 한계 내에 존재할뿐더러 예상과 달리 그 한계라는 것이 상수로 작용함으로써 스토리의 자기서술성과 자기 완결성을 방해하고 있음은 충분히 변명의 여지가 된다. 주인공이 걸어간 행적의 디테일한 부분들은 창작이 가능하지만 그와 얽힌 굵직한 사적 기록은 변형이 쉽지 않은 제약조건 내에서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주인공은 알려진 대로 '전설적인 도박사이자 천부적인 수학자, 최초의 백만장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화폐개혁자'로 묘사된다.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화폐를 시장에 도입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이라는 것이 결국 저자가 말한 바 최초의 금융 버블 또는 금융 투기라 할 수 있는 '미시시피사건'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씁쓸한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지불수단으로서의 활발하게 유통되는 지폐의 효용성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는 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당시로선 어느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금융이라는 분야에 뛰어들어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해밝은 실물 경제를 바탕으로 한 나라의 경제 프레임을 재설계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그가 처음부터 돈을 노렸건, 호의적으로 평가해서 경제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혁신하고자 했건 어느 경우에도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적이라는 암초를 그 또한 피해가지 못했으니 이점은 두고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실험은 개인적인 차원에선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금융 시스템과 지폐의 활발한 유통은 현대 경제의 기조를 탄탄히 구성하고 있으니 이 또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엄연한 소설이면서 또한 당시 시대상을 내밀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미시사를 관련 자료를 찾는 수고와 관련 자료들이 파편적으로 담고 있은 사실(史實)을 퍼즐을 맞추듯이 촘촘히 연결한 노력은 이 소설의 또 다른 가치가 될 전망이다. 역사란 일면 우월한 자의 입장에 선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낸 점도 돋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본래 주어야 할 재미를 상당 부분 사적(史的)으로 기록된 인물의 행적에 잠식당하고 있는 점은 다시 말해도 아쉽다. 드라마틱한 인생에 초점을 맞추려는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더 많은 같은 부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책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점은 장점대로 승계하고 마찬가지로 단점을 단점대로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소설의 전형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이 책의 소임은 아쉽지만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인물소설의 장르가 일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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