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그 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누가 발사했는지 찾을 수 없는 미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총기를 나는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나 그가 죽기를 기다렸겠니. 아, 그런데도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에 신통력을 갖고 싶었다. 아! 소리치며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할 수 있으려면 그 누군가가 평생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거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 곧 누군가가 심장에 켜켜이 애증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 곁에서 24년간 병 수발을 할 당시 저자가 남편에 대해 품은 뜻은 어서 낫기를 바라는 심정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고 근친이 낫기를 바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마는 하루 두 해가 아닌 수십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차압당한 채 기약 없는 수발을 들어야 했던 저자에게 그 일은 천형보다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심경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저자를 부도덕하다고 욕해도 할말이 없게 생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저자의 심경 토로가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24년의 병 수발이라는 맥락이 정도는 달라도 유사한 경험이 없을 수 없는 독자들에게 심정적으로 이입이 쉽도록 이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저자가 남편과 겪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시계열로 기록한 다큐멘터리이자 치부와 격정을 가감 없이 기록한 자기 고백서다. 그런 만큼 빠른 공감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런 공감은 대부분 내가 저자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무거운 부채감에서 비롯한다. 일정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누군가에게 닥친 불행이 더 이상 남의 일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급작스러울 정도로 날이 선 저자의 외침이 비경험이라는 외피를 벗고 공감각적으로 전달되고 그와 다른 시대와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동시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리라. 깨알 같이 적힌 활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나와 울음을 '꺽꺽' 삼키며 격정을 토하는 듯한 착각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의무감으로 쓴 글과 메마른 글에 식상하여 에세이란 말의 상찬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편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이 안성맞춤이다.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에 허기를 느껴왔던 독자라면 이 책이 더더욱 제격이다. 생기를 부여받은 활자와 속에 있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울컥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칠지 모른다. 그래서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회한에 잠길지 모른다.

 

하지만 곧 뻥 뚫린 듯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심경의 토로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하는 순간 마치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옥죄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린 듯한 경험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은 외양은 저자의 고백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고백에 감정이입한 나의 고백이자 우리의 속 깊은 얘기가 된다. 오랜만에 맛보는 가슴 시원한 역설적인 얘기를 거침없이 권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골방에 꼭꼭 숨겨둔 어둡고 슬픈 저마다의 과거가 이 책을 통해 밝은 광장으로 걸어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어느 현자는 말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할 때 그것이 지고의 경지라고. 그래, 나는 지금 물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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