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욕심을 내도 채울 수 없는 것을 꼽으라면 공부도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공부에 맛을 들인 사람 치고 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일가를 이뤘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점 충분히 이해되고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자신에 대해 은근히 자랑 놓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을 공부도둑이라 칭하고 있지 않은가.

 

사정은 이렇다. 옛이야기 중에 아비 도둑이 아들 도둑과 함께 도둑질하러 들어간 집에서 부러 소리를 내 주인을 불러내고 자신은 도망함으로써 아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 상황에서 아들은 여러 가지 꾀를 내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경위를 따져 묻는다. 그제서야 아비는 몸으로 배운 것만 남는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과연 아들은 대단한 도둑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후 저자는 물건을 훔친 도둑에 빗대 자신이 공부를 훔쳤다 하여 '공부도둑'이라 이름한 것이다. 더불어 정교한(?) 도둑질을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은 아비처럼 자신 또한 공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연유야 어떻든 저자의 이력을 보면 수긍 못할 바도 아니다. 공고를 나와 남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대학에 진학하고 저자 말마따나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재가 모두 모인 물리학과를 남다르게 졸업했으니 그럴만하다. 더욱이 저자는 그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저자의 이 책은 그런 그의 이력과 병진하지 않는다. 평소 쌓아둔 재력과 학력에 무임승차하여 이후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달리 저자는 현직에 있던 때와 그렇지 않은 때에 상관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공공부냐 인생공부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형태든 자신의 부족을 일치감치 깨닫고 그것을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인생과 학문을 대하는 가장 겸손한 태도라는 점에서 저자의 행보는 본받을만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저자에겐 일종의 풍모가 느껴진다. 비록 이 책이 명료한 주제의식 갖추고 특정 주제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진 못해도 책에 실린 저자의 글편은 공부와 인생에 관한 짧지 않은 경륜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대하는 독자에겐 진중한 발걸음이 요구된다. 


 

이 책, 『공부도둑』은 열두 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가 이 책을 신명나는 놀이터로 삼아 자신의 삶을 온통 풀어헤쳐 놓으려고 작심한 듯하다. 글의 전개방식이나 형식, 심지어 말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거침이 없다. 언뜻 가보지도 않은 몽고 벌판을 연상하고 연이어 그곳에서 뿌연 모래먼지 날리며 내달리는 말떼를 단박에 떠올린 것은 적어도 그의 글이 날것처럼 입안 가득 씹혔기 때문일 것이다.

 

목구멍에 넘긴 후 모래를 퇘, 하고 뱉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그런 생짜를 맛보는 기분이란 마치 방 문고리마저 손에 쩍쩍 달라붙는 매서운 겨울날 화롯가에 앉아 고구마 구어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 하나를 조심스레 건져 올린 감상처럼 뒷맛이 오래간다.

 

구닥다리 나이, 70에도 여전히 생기있는 글맛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얼핏 그의 삶이 도둑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도둑질, 거기다가 잡히지 않으려고 온갖 기술을 연마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두루 갖추는 일이 어디 쉬울까마는 그만의 독특한 비법이라 하기엔 이젠 너무 잘 알려진 박이정(博而精, 나무도 보고 숲도 봄)의 태도가 그와 궤적을 같이하는 한 그는 늙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박이정엔 총명한 냄새가 난다. 오래 묵은 내. 누렇게 바랜 책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종이 내음에 모처럼 취해볼 요량이라면 이 책이 제격이다. 새파란 어린이들에겐 훈장 선생이 되어 줄 것이고 다 큰 어른들에겐 고향의 손맛을 선사할 테니, 이 책 고르고 크게 후회할 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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