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흔의 나이를 훌쩍 넘긴 두 아들과 딸이 못살겠다고 어미 집에 기어들어왔다. 어머니는 화장품 판매 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먼저 들어온 건 큰아들이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에 유난히 먹는 걸 밝히는 큰 아들은 둘째가 들어온 날, 자기 몫을 빼앗길 걸 염려한 나머지 동생과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허구한 날 형에게 맞던 옛날의 동생이 아니다. 팽팽한 기 싸움이 흐른 후 그들은 공생을 택한다. 아들 둘이 어머니 집에 얹혀살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데도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가난한 집은 엎친 데 덮친다고 했던가. 시집간 딸마저 못살겠다고 손녀를 대동하고 그 집에 눌러앉는다. 이제 바야흐로 어머니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손녀의 동거가 시작됐다. 중학생 나이에 벌써부터 되바라진 손녀는 삼촌들과 섞이지 못하고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킨다. 삼촌이라고 어디 제대로 된 삼촌이라야 대접을 하지. 삼촌들의 짓이란 조카가 사온 피자 뺏어먹기, 학원 빼먹은 약점을 잡아 용돈 빼앗기, 마흔을 넘겨도 제 밥벌이 하나 못하면서 조카가 예절 없이 군다고 말로 치고 받기, 조카가 많이 먹을세라 허겁지겁 고기 먹기 등등 가히 인간말종이 달리 없다. 돌파구란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는데...




그들의 화려한(?) 이력을 살펴보자. 큰 아들은 학창시절부터 싸움질을 잘 했다. 당연 폭력배의 길로 들어섰고, 하여튼 그 바닥에서 잘 나갔다. 몇 번인가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그, 그 일에 신물이 났는지 도통 집밖을 나가는 일이 없다. 둘째? 명색이 영화감독이다. 단 한편의 영화로 아주 물먹은 그는 충무로에선 알아 모시는 실패자다. 그에게 돈을 댄 제작자를 그 영화 한편으로 파산시키고 말았는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수일을 굶고 죽기로 결심한 날, 닭죽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무작정 달려왔다. 셋째 딸은 어엿한 남편을 두고도 바람을 피우다 들킨 지 여러 번이다. 바람을 피우더라도 제발 소문내지 않고 피라고 애원하는 남편을 보란 듯이 조롱하던 딸은 동네에 '소문난 바람녀'로 명성이 자자하다. 손녀라고 나을 리 없다. ‘척하면 삼천리’라고 복잡한 가정사에 치이다 보니 앞서 언급한대로 말본새부터 남다르다. 나중에 밝혀지는 어머니의 과거까지.




한집에 모인 다섯 식구의 면면은 막장인생의 집합소처럼 불안 불안하다.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중반에 이르도록 소설은 잔잔한 가정사(?)를 이어간다. 여전히 먹성 좋은 첫째와 그런 형을 증오하는 둘째, 그새 특기를 살려 연하 남을 꿰찬 딸, 용돈 끊길 것이 염려돼 학원 문턱만 줄기차게 밟는 손녀의 일상이 가히 난공불락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가 쪽지 하나 써놓고 훌쩍 집을 나간다. 이때부터 그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복잡한 가정사의 이면이 드러나는데...




그로 인해 첫째도 집을 나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둘째는 조카를 찾는 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리고 포르노 영화감독 제의를 받아들인다. 계약금을 받은 그가 조카를 찾아 대문을 나서려는데, 집 나간 형이 조카와 함께 들이닥친다. 사연은 이랬다. 그 또한 조카를 찾기 위해 바지 사장을 자청했고 조직두목의 힘을 빌려 지방에 있던 조카를 불러올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그 바닥 생리대로 조만간 감방에 대신 들어갈 처지에 직면한다. 이후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는데... 이것마저 말할 순 없다. 하여튼 이름하여 《고령화 가족》, 대박을 낸다.




'막장인생이라고 돌파구가 없겠느냐'고 묻는 작가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한편으로 사회의 마지막 교두보인 가정은 언제든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건강성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승리를 보여준 데 감사한다. 우리 사회는 한참 전 ‘사오정 세대’ 운운하던 시절을 지나 오늘 ‘88만원 세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양각화한 그와 같은 용어에 기선을 제압당한 게 사실이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일이 사치스러운 시대가 된 요즘 세태에 “그래도 보듬어줄 가족은 살아있다”는 저자의 격려가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 땅의 청년과 중년 모두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길 바란다. 《고령화 가족》의 작가는 〈고래〉를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에 올린 천명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의 미덕은 반전에 있다. 꼬일 대로 꼬인 사건을 독특하지만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끈덕지게 추적해가는 주인공의 집요한 추리도 묘미지만, 주인공의 화려한 추리에 넋을 놓은 독자들이 그 추리에 기대어 결말을 예상할 즈음 둔탁한 망치로 뒷머리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에 비견될 결말을 마주할 때의 그 기분이란, 다시 말하지만 역시 최고다!




그 기분은 극도로 긴장된 머리와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인 가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지려는 마지막 순간 스르르 풀려나는 해방감에 비할 만하다.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어렵게 찾아든 바닷가에서 가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훌훌 털어내던 때의 심정에 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딴 소다수 한 잔에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한 기분에 견주기도 하겠다.




어느 것이든 추리소설은 사건의 현장에 찾아들어 그 현장을 관찰하고 단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예정된 수순에 반기를 들듯 연이어 터지는 '반전에 반전'에 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살인자들의 섬》은 별 다섯 개를 줘도 좋다.




영화를 먼저 본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디테일한 부분을 확인하는 재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영화에선 암호로 ‘제4의 법칙’과 ‘67번째 환자가 누구인가?’ 하는 두 문장에 한정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보다 복잡한 암호체계를 다양한 숫자에 담아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셔터 아일랜드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테디 다니엘스의 혼란을 근접 관찰할 수 있다. 아울러 전개될 스토리 내에 잠재된 정신병리학적 혼돈에 빠져들며 결말로 치닫는 소설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내느라 두 눈이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병동을 탈출한 환자를 찾기 위해 파견된 연방보안관, 테디 다니엘스와 척은 첫날부터 셔터 아일랜드의 잡역부들에게서 어떤 단서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잡역부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당연시하며 사사건건 이상한 행동과 말로 수사 혼선을 부추긴다. 마침 테디 다니엘스는 탈출 환자의 방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쪽지엔  ‘제4의 법칙’과 ‘나는 47, 그들은 80이었다’, ‘+당신은 3’, ‘우리는 4, 하지만 누가 67?’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무공훈장에 빛나는 퇴역군인으로 익히 수사에 관한한 그 마당에서 영웅대접을 받는 테디 다니엘스는 예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용의주도한 사건해석으로 셔터 아일랜드의 실체에 한발 한발 접근해 간다. 몸통에 다가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두통과 거듭되는 환영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이긴 하다. 사실 오래 전부터 테디 다니엘스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정신병자들을 상대로 세뇌실험을 벌인다는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다. 이번 파견도 동일선상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자원한 것이었다. 다만 척이 동행하게 되었을 뿐 달라질 건 없다. 더욱이 셔터 아일랜드엔 아내를 불태워 죽인 앤드루 레이디스가 수감되어 있다지 않은가.




세뇌실험의 장소로 등대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척을 뒤로 하고 테디 다니엘스는 그곳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곳엔 어떤 수술 장비도 수술진도 없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 마지막 방을 밀치고 뛰어든 테디 다니엘스 앞에 버티고 선 닥터 존 코리가 너무도 태연하게 그를 맞는다. 곧 테디 다니엘스는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힌다. 박사가 테디 다니엘스의 이력과 행동을 너무도 자세하게 풀어냈던 것. 이어 67번째 환자가 밝혀진다. 테디 다니엘스가 덫에 걸린 건지, 그가 실제 악한 앤드루 레이디스인지는 알 수 없다. 척에게 섬을 탈출할 계획임을 밝힌 테디 다니엘스 앞으로 병동 잡역부와 닥터가 서서히 다가선다.

 

 

정교하게 짜인 스토리와 결말을 둘로 가르는 모호한 상황설정이 이 소설의 묘미며 잡음(?)의 원인이기도 하다. 영화와 소설이 완전히 끝난 뒤에도 관객과 독자는 화면에서 눈을 거두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도 못한다. 추리로 포장한 종전의 작품들은 모두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의혹들을 전부 털어냄으로써 관객과 독자에게 완벽한 배설감과 무한 카타르시스를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결말은 예측 불가능 상태로 남겨있고, 테디 다니엘스를 중심으로 사건과 결말을 두 경우의 수로 구분해 놓아 봐도 그 각각에 아쉬운 구석이 없잖다. 마치 아귀가 맞지 않은 바퀴가 삐걱 이듯 두 추리 모두 어색한 양상을 띠며, 그 정도의 추리 밖에 못했느냐는 조롱을 발뒤축 너머로 연신 흘려낸다. 도대체 결론이 뭐냔 말이지!!! 테디 다니엘스의 착란? 셔터 아일랜드의 덫?




독자와 관객마저 가둬버린 섬, 셔터 아일랜드. 누구든 그곳에선 탈출이 불가능하다. 연방 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든, 지금 여기서 영화와 소설을 본 당신이든 상관없다. 도서관의 독자든 영화관의 관객이든 폎자리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셔터 아일랜드에 당도한 당신은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당신에게 닥터 존 코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당신한테는 파트너가 없습니다. 당신은 여기 혼자 왔어요.” 셔터 아일랜드는 끝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티, 나의 민들레가 되어 줘 - 시테솔레이의 기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정화영 지음 / 강같은평화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남미 열대지역에 면해 풍부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카리브해의 옥빛 해안을 끼고 무한히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사철 과일이 영그는 곳. 대자연의 향연이 낮밤을 달리하여 연신 춤을 추는 동안 인간은 권태로운 오침에서 막 깨어나 나른한 일상을 한방에 날릴 별난 어떤 것을 기대하며 뽀얀 먼지 쌓인 거리를 나선다. 저녁이면 붉게 타는 노을이 비낀 해변가 해먹에 몸을 뉘어 감상에 복받친 눈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는 멋이 과일 보다 잘 익는 그곳을 우린 열대를 보며 멸망한다. 가보지 않은 곳에 다다를 꿈, 오지를 향한 끝 모를 동경이 결합돼 또 다른 상상이 별처럼 쏟아진다. 과연 그런 걸까? 미지는 늘 그렇듯 풍요롭고 항상 평화로울까?




적어도 아이티는 아니다. 웅덩이 물을 마셔야 하는 아이들은 기생충에 감염돼 배가 불룩하고 말린 진흙을 쿠키 대용으로 먹어 대부분 병에 취약하다. 아이들이 이러니 어른들의 삶이라고 나을 게 없다. 회색 시멘트로 두른 집 지붕은 양철로 둘러 정오의 뜨거운 태양열을 막아주지 못했고 그마나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햇빛마저 막을 길 없다. 집안이라고 해봐야 잠잘 곳이라곤 달랑 낡은 침대 하나, 가족들은 밤을 나눠 침대에서 잔다. 일 나가는 남편과 첫째 아이가 밤 시간을 둘러 쪼개 자는 데 익숙하다. 아내와 아이 둘은 낮잠으로 대신한다. 형편이 이런데 먹을 것이라고 넉넉할 리 없다.




“아이티는 전체 인구 900만명의 7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서반구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 유엔지원군이 파견돼 최소한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대규모 자연재해가 빈발하며 아이티인들의 고통을 더했다. 2004년 홍수로 3000명이 사망했고,4개의 허리케인이 휩쓴 2008년엔 1000여명 사망에 8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때의 충격에서 채 회복되기도 전에 200년 만의 대지진까지 닥치면서 아이티인들은 눈물을 흘릴 사치마저 빼앗긴 참혹한 고난사를 덧붙이게 됐다.” 지난 달 29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글(〈아! 아이티… 카리브해 연안 흑인 노예 후예들의 서글픈 역사〉)의 일부다.




지난 대지진 때 구호물자를 먼저 가져가려고 다투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언뜻 이해는 되면서도 혀를 찼던 일이 새삼 가슴을 저민다. 지진이 났다는 단순한 지식만으로 아이티를 바라본 나는 여느 사건사고를 대하듯이 아이티를 다시 기억하지 못했다. 나와 내 주변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설 테지만 아이티의 일은 내 영역을 침해할 소지가 전혀 없던 탓이다. 내가 편하면 남의 곤란을 돌아보지 못한다. 올챙이 적 시절을 잊지 않는 건 어렵다. 작가처럼 영적 돌파구를 욕구하지 않았다면 아이티는 여전히 먼 나라의 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로 그곳 소식에 마음 아파하는 선에서 책을 덮고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관행에 터 잡지 않았다. 저자가 경험한 아이티라고 해야 2 내지 3개 도시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들려온 이야기는 아이티 전체의 현실을 대변하고도 남았다. 그와 같은 일은 저자가 진심으로 그곳을 읽고 따뜻한 팔로 보듬고 강한 발로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명확한 목적의식 없이 도착한 곳이었지만 저자는 그곳에서 선교사로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백삼숙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으로 불러내 그 땅의 현실을 전하도록 하셨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는 아이티를 다감하게 썼다. 아이티의 고단한 현실과 비루한 일상을 기록하되 가슴은 냉철한 눈과 달리 그 땅을 구원하고 회복하실 하나님을 붙드는 소망으로 뜨거웠다. 그는 그 백미를 두 개의 삽화로 적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목사님), 전도사님 ~ 생일 축하합니다.” 카드와 선물을 들고 목사님과 전도사님께 전달을 하는데 왜 청승맞게 눈물이 고이는 걸까. 목사님은 왜 눈가를 훔치고 전도사님은 시선을 피하실까. 우리는 이렇게 작은 일에 감동하고 행복해하며 감격해하는가. “아, 모두에게 음......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엄마는 박수를 치는 자식들에게 ‘고맙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인사를 전한다. 그 말이 얼마나 생명력 있는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가난한 나라에서 가족이 된 우리가 풍성한 식탁보다 더 풍요로운 가슴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원천적인 말, ‘사랑한다는 말’뿐이었다.》(〈사랑합니다. 사랑해요〉, p91)




저자는 한 달여의 일정으로 아이티에 온 터였다. 귀국할 날을 앞두고 그가 자청해서 이틀 간격으로 있는 목사님과 전도사님의 생일상을 차리기로 했다. 저자는 하루 종일 전을 부쳤고 자식들(물론 고아다.)은 노래와 율동을 연습했다. 그날 저녁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밤새 그들은 잠들지 못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 그것은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 땅을 회복하실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어어엉.... 어... 엄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어어엉!” 이런,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드라마가 아닌가. 괜히 나도 울고 전도사님도 운다. 겨우 한나절, 아침에서 늦은 오후까지 집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 탕자가 돌아온 듯 엄마는 아들을 껴안는다. .....(중략).... 그런데 엔나가 뭔가를 꺼내놓는다. 밥이었다. “그건 또 뭐야?” “이거, 다빗 밥이에요. 점심에 다빗 밥을 챙겨 놨어요.” 다빗이 언젠가 돌아오면 먹이겠다고 엔나가 밥을 챙겨놓은 모양이다. 쭈뼛거리며 비닐봉지를 여는데 밥이랑 반찬이 뒤섰인 게 볼품없지만 모두의 표정은 행복해진다. 다빗과 아이들 모두 깔깔 웃는다. 나와 전도사님도 한번 눈을 마부치고 하하! 웃었다. 가족은 그런 것이다. 집 나간 동생을 위해 아랫목에 공깃밥을 넣어 놓는 사람이고, 오빠가 혼나는 것이 마음 아파 먹은 것이 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울고 있는 아들을 보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용서되는 엄마, 이것이 진짜 가족이 아닐까.“》(〈너희가 가족인 이유〉, p137-138)




사랑의 집을 방문한 땁땁이(대중교통버스를 그렇게 불렀다.) 운전사에게 돈을 구걸한 다빗은 받은 돈으로 먹을 것을 사먹었단다. 운전사의 경찰 친구를 불러 다빗을 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목사는 아침 금식을 선언했다. 그길로 아이들은 거리로 나가 흙을 주워 먹었다. 아차, 싶어 목사님은 다빗을 하루 동안 땁땁이 운전사의 집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엄마 말 안 듣고 집 나가면 얼마나 힘든지 알기를 바랐던 엄마의 사랑의 매였다. 성큼 옷가지를 챙겨 나서는 다빗. 하지만 한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집에 혼자 남겨진 다빗은 밥도 먹지 않고 울고 있더란 것. 서둘러 다빗을 데려왔고 이어 위 상황이 벌어졌다. 가족을 통해 사랑을 알아가고 그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체험해가는 건강한 아이들을 보며 저자와 목사님, 그리고 전도사님이 얼마나 감격했을지 그 느낌이 깊이 전해온다.




내동댕이친 현실은 전혀 녹록치 않고 끝 모를 절망이 문 앞에 엎드려 있지만 결코 그 현실과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은 일꾼들이 추수할 날을 고대하며 씨 뿌리는 그곳을 하나님이 반드시 고치실 것이다. 이 책, 〈아이티 나의 민들레가 되어줘〉는 그런 기대와 믿음의 실상이다.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듯 손에 잡힐 듯 써내려간 저자의 저민 가슴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기도한다. 목구멍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을 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모쪼록 이 책이 두루 읽히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처음본 건 ‘항소이유서’를 통해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회자되던 항소이유서를 작성한 이가 '그'라는 말을 들었고, 당시로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상당 기간이 흐른 후 우연한 장소에서 그 글을 읽게 됐다. 분명한 철학적 토대와 정치한 논리에 호소력까지 갖춘 글은 호흡을 길게 가져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후 토론진행자와 지식소매상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그가 나타났을 때 다소 이물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항소이유서에 피력했던 철학을 현실정치에 대입하려는 시도에 공감했다. 적어도 기개 넘친 청년의 실험이란 신선하기도 할 것이고, 잘 되면 새바람을 불어오리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러던 그가 주류에 편입한 것도 잠시, 여당정치인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권은 여가 쥐고 있었으면서도 여야가 뒤바뀐 참으로 이상한 구도에서 주류 아닌 주류로 행보한 그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남았다. 어딘가 불안한 청년. 그 굴레는 당시 386 정치인들이 공히 덧쓰고 있던 굴레였다. 386 정치인이 아마추어로 재단되던 시기를 거쳐 정치경제적 혼란의 주범으로 몰리며 마침내 정권을 넘겨주고 난 후 더 이상 386이란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라진 세대. 청년기가 오래되지 않듯이, 그리고 때가 되서 기억나기 전에는 그 시기가 송두리째 잊혀지듯이 386 세대는 잊혀진 세대의 전형이자 천형이 되었다. 그가 누구와 정당을 창당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와중에 책 한 권이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는 청년기의 그를 사로잡았던 지성의 산실을 책에서 길었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를 그는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험한 생각들'이란 부제에 담았다.

 

참다운 공부를 대학이 아닌 서클에서 배웠다고 소개한 그는 그 각각의 책을 통해 자신 안에 올곧게 형성된 세계관과 전망, 향후 지향점 등의 소회를 밝히는 한편 딸을 위시한 이 땅의 청년들이 엄혹한 청년기를 보냈던 선배의 삶을 기억해주기를 조심스럽게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 어느 때보다 필력은 밖을 지향하여 터지기보다 안으로 파고들고, 예의 거침없던 논지도 논술자의 그것처럼 설핏 건조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인용한 글에 대한 정치한 해석과 그 해석의 근거를 밝히는 데 있어선 여전히 항소이유서의 멋들어진 논리가 번뜩인다. 조용히 어르고 타이르는 어른의 말에 대꾸할 엄두조차 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앞으로 그가 어떤 실험을 계속해갈지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길에 청년정신을 견지한 지식인의 작지만은 않은 행보가 점점이 박혀있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소이유서에서 지식소매상시절의 글, 그리고 《청춘의 독서》에 이르는 동안 그의 글의 편력은 일정 궤적을 그리며 유영하고 있다. 세파에 부딪혀 잠시 우회가 길어지는 듯하지만 뚝심만큼은 더욱 그 골을 견고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청춘의 독서》가 맥없는 글의 상찬으로 여겨지지 않은 큰 이유일 것이다.

 

소매상은 한 몫에 큰 것을 얻지 못한다. 소매상의 시장은 도매상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그 작은 곳에서 소비자와 얼굴을 가깝게 마주할 수 있다는 장점을 향유한다. 소매상은 단골 장사다. 얼마나 많은 단골을 두느냐에 따라 소매상의 성패가 갈린다.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그가 지식소매상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행보를 놓지 않는 현실정치인으로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그 그림은 이 글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작은 실천 안에서 시민과 공감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그 그림이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어깨 힘을 뺀 정치, 섣불리 가르치지 않는 글 속에서 그림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당초 그가 항소이유서에서 품었던 이상으로 견고해질 것이다.

 

현실 정치와 지식인 사회의 벽이 높다하더라도 이상만 하겠는가. 높은 이상을 안고 살수록 그 인생은 고단하나 그 이상이 품은 그늘의 크기가 날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는, 하지만 힘겨운 싸움을 그래도 견지해주길 바란다. 그늘이 자꾸 사라져가는 세상에 그가 큰 나무가 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마케팅 하라 - 어느 스페셜리스트의 내밀한 고백
맹명관 지음 / 강같은평화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행복, 나눔, 교제 등등 세상엔 듣고 말하기에 좋은 말들이 참 많습니다. 살기가 아무리 퍽퍽해도 그런 말들과 친구를 맺는 한 좌절은 없습니다. 그런 말들은 의식적으로라도 자주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 생각을 바꾸고 바뀐 생각이 행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요즘 다들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들 합니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한파가 겨울이 오기 전부터 몰아닥친 터라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가계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지표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데 실질경제성장은 가시적 성과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이 심리적 부담감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경제나 정치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 상태를 ‘희망의 부재’로 투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기 목표와 장기목표가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살 걱정이 더욱 태산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희망을 이야기 하는’ 데서 더 나아가 ‘희망을 마케팅하라’고 등 떠미는 이가 있습니다. 현실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절망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희망을 언급해도 제각각 그 희망의 크기가 다를 것입니다. 저자의 희망의 근거는 감사에 있습니다. 현실 이면에 서서 한결같이 우리를 보듬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곧 고백해온 저자의 목소리는 절망과 희망을 꺼내기 전에 먼저 보아야할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희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그의 또 다른 고백입니다. 희망이 불완전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여전히 우리의 삶은 불확실하고 미래는 더욱 불투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본래 완전하신 이의 것이었는데 그가 그것을 특별히 아끼는 자녀에게 준 선물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이 경우 희망은 반드시 이뤄질 일을 표창하는 보증수표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응시하는 곳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선물은 답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정의 표현이자 선물을 받는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 가득한 나눔입니다. 선물은 상대방이 풀기 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선물의 용도대로 사용하는 것이 두 번째 순서입니다.



선물 안에 희망이 들었음을 안다 해도 그 희망을 내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희망은 절망을 몰아내는 촛불입니다. 그 촛불을 드는 데서 희망은 시작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고 했습니다. 높이 들수록 멀리 비춥니다. 저자가 4장과 5장에서 함병우와 임준오를 스케치한 이유를 전 희망을 등경 위에 두고 멀리 비추려는 의지로 읽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일터를 가꿔가는 이들의 삶과 철학을 8미리 카메라를 들고 구석구석 쫓는 저자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함병우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감각이 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행복을 찍고, 가능성이라는 보물을 렌즈 안에 담아내 희망을 연방 전파하는 함병우 특유의 긍정의 힘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임준오는 비즈니스계의 내비게이션이자 거침없이 돌진하는 3.5톤의 무소처럼 보인다.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인생에서 희망을 낚시한다.”



저자가 스케치한 두 인물의 특징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절하고 블루오션을 찾아 나선 적극성입니다. 어렵다고 또는 현재 잘 나가고 있다고 주저앉거나 버티지 않고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나를 품고 세파에 도전한 그들이기에 저자에게 아름답게 추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야기에 귀를 세운 독자들을 충격하며 또한 추동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전염성이 강한 특성을 갖습니다. 한사람의 희망이 그 주변을 파고들면 걷잡을 수 없는 확장세를 보입니다. 과거 어느 때고 되돌아보면 희망을 갖자는 말 한마디에 닥친 어려움이 얼마나 하찮게 보였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3:14-15)


롯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떠난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경우에 따라 아브라함에 닥친 현실은 룻에 대한 배신감과 이뤄놓은 것을 전부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점철되었을지 모를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너 있는 곳에서”의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있는 곳’이야말로 희망을 꿈꾸는 단초입니다. 지금 여기서 꿈꾸지 않는 것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을 적극적으로 응시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잘못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약속의 말씀처럼 지금 보다 훨씬 나은 보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당신에게 있는 ‘희망’을 마케팅하십시오. 희망이 있는 한 안주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한 번 더 언급하자면 희망은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다’(요한일서 4:4)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당신은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사용하면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희망을 마케팅하라’는 저자의 선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