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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처음본 건 ‘항소이유서’를 통해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회자되던 항소이유서를 작성한 이가 '그'라는 말을 들었고, 당시로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상당 기간이 흐른 후 우연한 장소에서 그 글을 읽게 됐다. 분명한 철학적 토대와 정치한 논리에 호소력까지 갖춘 글은 호흡을 길게 가져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후 토론진행자와 지식소매상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그가 나타났을 때 다소 이물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항소이유서에 피력했던 철학을 현실정치에 대입하려는 시도에 공감했다. 적어도 기개 넘친 청년의 실험이란 신선하기도 할 것이고, 잘 되면 새바람을 불어오리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주류에 편입한 것도 잠시, 여당정치인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권은 여가 쥐고 있었으면서도 여야가 뒤바뀐 참으로 이상한 구도에서 주류 아닌 주류로 행보한 그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남았다. 어딘가 불안한 청년. 그 굴레는 당시 386 정치인들이 공히 덧쓰고 있던 굴레였다. 386 정치인이 아마추어로 재단되던 시기를 거쳐 정치경제적 혼란의 주범으로 몰리며 마침내 정권을 넘겨주고 난 후 더 이상 386이란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라진 세대. 청년기가 오래되지 않듯이, 그리고 때가 되서 기억나기 전에는 그 시기가 송두리째 잊혀지듯이 386 세대는 잊혀진 세대의 전형이자 천형이 되었다. 그가 누구와 정당을 창당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와중에 책 한 권이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는 청년기의 그를 사로잡았던 지성의 산실을 책에서 길었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를 그는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험한 생각들'이란 부제에 담았다.
참다운 공부를 대학이 아닌 서클에서 배웠다고 소개한 그는 그 각각의 책을 통해 자신 안에 올곧게 형성된 세계관과 전망, 향후 지향점 등의 소회를 밝히는 한편 딸을 위시한 이 땅의 청년들이 엄혹한 청년기를 보냈던 선배의 삶을 기억해주기를 조심스럽게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 어느 때보다 필력은 밖을 지향하여 터지기보다 안으로 파고들고, 예의 거침없던 논지도 논술자의 그것처럼 설핏 건조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인용한 글에 대한 정치한 해석과 그 해석의 근거를 밝히는 데 있어선 여전히 항소이유서의 멋들어진 논리가 번뜩인다. 조용히 어르고 타이르는 어른의 말에 대꾸할 엄두조차 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앞으로 그가 어떤 실험을 계속해갈지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길에 청년정신을 견지한 지식인의 작지만은 않은 행보가 점점이 박혀있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소이유서에서 지식소매상시절의 글, 그리고 《청춘의 독서》에 이르는 동안 그의 글의 편력은 일정 궤적을 그리며 유영하고 있다. 세파에 부딪혀 잠시 우회가 길어지는 듯하지만 뚝심만큼은 더욱 그 골을 견고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청춘의 독서》가 맥없는 글의 상찬으로 여겨지지 않은 큰 이유일 것이다.
소매상은 한 몫에 큰 것을 얻지 못한다. 소매상의 시장은 도매상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그 작은 곳에서 소비자와 얼굴을 가깝게 마주할 수 있다는 장점을 향유한다. 소매상은 단골 장사다. 얼마나 많은 단골을 두느냐에 따라 소매상의 성패가 갈린다.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그가 지식소매상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행보를 놓지 않는 현실정치인으로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그 그림은 이 글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작은 실천 안에서 시민과 공감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그 그림이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어깨 힘을 뺀 정치, 섣불리 가르치지 않는 글 속에서 그림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당초 그가 항소이유서에서 품었던 이상으로 견고해질 것이다.
현실 정치와 지식인 사회의 벽이 높다하더라도 이상만 하겠는가. 높은 이상을 안고 살수록 그 인생은 고단하나 그 이상이 품은 그늘의 크기가 날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는, 하지만 힘겨운 싸움을 그래도 견지해주길 바란다. 그늘이 자꾸 사라져가는 세상에 그가 큰 나무가 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