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레슨 - 우리 아이 악기 선택부터 신나는 연주까지
스테파니 슈타인 크리스 지음, 정유진 옮김 / 함께읽는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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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해보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배워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사실 마음 같지 않은 게 있다. 개인적으로 그건 악기 연주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사촌형에게 속내를 털어놨더니 수주일이 지나 중고 기타 하나를 보내왔다. 쓰던 것이지만 알아주는 기타라는 말로 동생에게 새 것을 사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어쨌든 기타를 받아들고 무척 고무된 난, 친구들에게 대단한 상표의 기타라는 점을 누누이 밝히고 다녔다.

 

과연 잘 쳤을까? 아니면 잘 치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그때 무슨 기타 초급 연습용 책을 어렵게 구입해서 두 주간 열심히 기타 줄을 뜯었던 기억은 있다. 해변에서 멋진 기타 연주로 좌중의 흥을 돋우는 장면을 나름대로 연상하며 기대에 부풀기는 했다. 멋쩍게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기대감이 물거품으로 변해가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좀체 늘지 않는 실력의 벽에 갇혀 있기를 또 3주, 교본을 드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과 함께 기타의 관심 또한 서서히 줄어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아마도 악기를 연주할 최적의 기회였던 것 같기는 하다. 이후로 한 번도 악기와 친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기를 한 번 연주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고 그 중 셋째가 여섯 살 때부터 악기에 관심을 보였다. 마침 또래 유치원생이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걸 자랑했나 보다. 아이 성화에 못 이겨 한 달 학원증을 끊었다. 아이는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했다. 번듯한 피아노가 아니었으니 소리가 제대로 날 리 없었지만 장난감 피아노일망정 아이의 연주는 여느 연주가의 연주 못지않았다. 아이의 연주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아이의 성화에 앞서 아이에게 연주 가능한 악기 하나쯤 갖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악기 교습은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모습이 즐거워 그새 1년이 다 돼가고 있다.

 

굳이 연주가가 되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이 책, 〈뮤직레슨〉을 읽고 늦바람 같은 호기심이 생겼다. 아이에게 연주가의 자질이 있는지(음악에 강하게 관심을 보이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저자는 그 단초를 몇 가지로 정리했다.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거나, 어떤 곡이든 상관없이 따라 부르거나, 예전에 들었던 곡을 종종 다시 부르곤 한다. 비교적 정확하게 리듬을 따라서 한다. 집에 있는 어떤 악기든 싫증내지 않고 가지고 놀면서 때때로 어떤 음이나 곡조를 정확히 짚어낸다. 전체 곡 중 귀에 익숙한 어떤 특정 부분을 다시 듣게 해달라고 조른다.’

 

우리 아이의 경우 모두 맞아 떨어졌다. 사정이 그렇다고 당장 연주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다만 아이가 호기심을 가진 때 적절하게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는 게 기뻤다. 대부분 부모의 심정이 그것과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었다는 뿌듯함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아직 꿈 많은 여덟 살이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보겠지만 아이가 연주가와 화가 사이에서 어떤 꿈을 선택을 하든, 또는 전혀 다른 꿈을 찾아 떠나든 적극 응원할 마음 자세는 되어 있다. 이 책이 그런 마음을 다잡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준 것에 감사한다.

 

저자는 전문가의 입장이 아닌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어떤 악기에 소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음악이 악기 연주에 도움이 되는지 등등에 관해 소상히 전하고 있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모의 무관심과 부주의로 아이가 경험할 세계가 제한받지 않을까 하는 부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부모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아이의 꿈을 꺾은 게 아니었을까 싶은 후회가 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의식은 대부분 자신이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육상선수의 꿈이 좌절되면서 그 돌파구로 축구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축구공이 너무 갖고 싶어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사달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한 가지만 약속하면 언제든 사주겠다고 하셨다.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그럴 자신이 없던 난 또렷이 말씀드리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2학년이 될 때까지 내겐 번듯한 축구공 하나 없었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축구공 하나 사주면서 그런 엄청난 기대를 조건으로 거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그런 쓰라린 경험이 아이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고집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엄밀히 말해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어쨌든 그 경험이 되도록 현재 수준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면 그 범위 내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려는 마음은 갖게 했을 것이다. 다소 비싼 레슨비에 당혹스럽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더군다나 아이가 포기하지 않으면 그만한 돈을 매달 지불해야하는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저런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건 아이의 호기심이 줄곧 이어져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책은 아이의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정도와 강도를 확인하는 데 적절하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어떤 악기를 권해 줄 수 있는지에 관한 실제적인 도움마저 주고 있다. 좋아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연주가가 되는 건 분명 차이가 있다. 비록 아이가 연주가가 되지 않더라도 악기 하나쯤 제대로 다뤄줄 줄 알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모 앞에서도 좋고 나중에 아이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난 후 그 가족과 함께 음악을 즐겨도 좋겠다. 어떤 선택을 하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돌아보게 만든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굳이 예로 든 음악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새삼 관찰 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오늘, 우리 아이는 어떤 악기에, 그리고 어떤 음악에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더 넓게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할까, 곰곰이 따져보는 건 어떨까? 짐작컨대 아이가 더욱 사랑스러워 보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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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목소리 - 어느 나무의 회상록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 파란시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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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한창이다. 나뭇가지마다 연한 초록이 걸렸고 기지개를 크게 켠 꽃들은 꽃망울을 연신 터트리느라 온통 시끌벅적하다. 바람에 실린 오묘한 향기들의 근원을 떠올리다 제풀에 지치는 건 연신 밀려오는 소리와 소리들 때문이다. 아우성처럼 솟구치는 소리만으로도 봄날은 눈부시다. 봄날의 풍경은 그렇듯 부산하게 온다. 철마다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자연을 보고 있으면 감탄사는 기본이고 며칠만 저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 입새에 배나온다.




섬진강 시인은 “그래 딱 한달만 그곳에 살자”고 노래했다. 그의 말이 특히 이 봄날에 잘 어울린다. 자연이 주는 미감의 최고봉을 봄만큼 가슴 떨리게 전해준 걸 보지 못했다. 가을의 화사함도 좋고 겨울의 적막도 좋지만 봄이 주는 생동감에 비할 바 아닌 것 같다. 사실 돌아보면 어느 계절이고 덜하고 낫고 할 게 있겠는가. 어느 계절이든 계절을 타고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그 이름이 파생하는 형용사처럼 ‘자연스럽’다.




그런 자연이 ‘부자연’으로 바뀔 때 문제가 생긴다. 각종 재해와 오물이 그런 부자연의 결과물일 터다. 그것을 현대문명이 결과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자위하는 건 멋쩍다.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사람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런 부산물들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불가측의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 결과로 사건 사고가 전보다 크게 발생하고 있는데 잦다보니 무감각해져있을 뿐이다. 그런 불감증은 더 큰 혼란을 조장한다. 수년 전 전국민을 충격 속에 빠트린 대구지하철참사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공사장 참변 등은 불감증이 몰고 온 결과라는 점에서 단순한 사건사고로 읽히지 않는다.




위험사회론이 대두된 배경엔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대형참사가 결국 자연스럽지 않은 습관과 태도의 결과라는 자각이 한몫했다. 자연 파괴를 일상적으로 자행한 현대문명이 자연에 관심을 갖고 자연친화적인 문명의 틀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대문명 전반에 대한 내밀한 성찰 없이 외형만 자연친화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뭉스럽다.




이 책, 〈초록목소리〉는 그런 의뭉스러움을 정면 반박한다. 대상물인 자연에 생기를 넣어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제한적으로나마 들어보려는 저자의 의도가 책 전편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손자를 앞에 둔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처럼 서술구조는 느슨하고 호흡 또한 잔잔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여느 책보다 빠르게 전해져 온다. 제목만으로 가벼운 책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독자라면 순간적으로 당황할만하다.




더군다나 주인공인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경험하기도 했으며 일견 들어보았음직한 상황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공감이 상당하다. 읽기가 불편할 정도의 뻐근함이 뒷목을 타고 흐른다. ‘이런 짓을 사람이 하고 있었다’는 자책감 같은 거친 가래가 목구멍을 타고 거침없이 솟구친다.




그래서 대상물로만 봐왔던 사물의 이야기가 소중한 법일지 모르겠다. 대상물을 주체로 두고 사람을 상대화했을 때 사람이 비로소 속 깊은 성찰에 이르게 되는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소망스런 일이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이리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저지른 일들이 결국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일은 나무의 이야기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계에서 수많은 사물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연계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건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누리는 우월적인 지위는 사물이 제 기능을 갖추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계 내에서 누리는 지위일 뿐이다. 사물과 쉼 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는 사람의 현 상황에 대한 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자연을 소모품 정도로 격하하고 자연이 기능을 잃을 것을 대비해 대체물을 개발하려는 사람의 의지는 공존이라는 이상을 파기한 불안한 선택으로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욕망은 필연코 과도한 욕심으로 표출되고 공멸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지속가능한 발전이 운위되고 그 방법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의 많아진 현실이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경제적 발전이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남겨둔 상태 내에서의 발전을 염두에 두는 건 현 세대의 책임 있는 자세다. 최근 들어 ‘사회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한층 고무적이다. ‘경제적 가치’의 창출을 이상으로 삼던 세대가 배출한 부산물을 덜어내려는 시도로 주창된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보다 신장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가치 또한 경제와 사회 양면의 균형 발전을 지속하기를 바란다.




이 책이 경제적 가치에 경도된 현 세대에 들려줄 이야기는 통칭해서 ‘자연과 사회가 공존하는 세계’라는 이상에 부합한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타자의 시선이라는 유용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반복적인 오류를 막는 데 효과적이다. 결정적인 함정에 빠질 위험성을 차단하는 데도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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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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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지 않는 인간은 땀 흘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런 사람은 많은 독을 쌓을 뿐이다." 트루만 카포우트가 한 말이다. 사람은 땀을 통해 몸 안의 독성물질을 배출함으로써 정상상태를 유지한다. 반면 배출되지 않고 몸 안에 축적된 독성물질은 다양한 형태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꿈을 꾸지 않는 것이 땀을 흘리지 않아 생긴 결과와 다를 바 없다는 그의 말이 실감나게 들려온다.

 

'꿈과 희망 발전소'를 가동하기 위해 길 떠난 두 사람의 여정을 방해꾼들의 공작과 엮어 긴박감 넘치게 그려냄으로써 잊혀진 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있는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은 단편집 〈생리통〉에서 세밀한 문체와 디테일한 묘사로 존재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평가받은 이세벽의 신작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정의와 자유를 향한 꿈을 물질문명의 혜택과 맞바꾼 채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 외벽에 깊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결국 선택은 현대인들의 몫이다.

 

철수와 부장판사가 찾아 나선 꿈과 희망발전소는 그들이 가동한다해도 사람들이 꿈을 깨우지 않으면 소용없는 한계 내에 존재한다. 그것은 꿈을 찾아 떠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불안요소일 뿐 아니라 예측 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꿈과 희망의 발전소를 돌리면 저절로 불이 들어온다고 그랬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겠구나." "불을 켜고 안 켜고는 사람들 마음에 달려 있어요. 하지만 먼저 꿈과 희망의 기운을 사람들에게 보내줘야 해요." "안 켜면 헛수고만 하는 거 아니냐." "켜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점차 늘어날 테고."

 

그리고 그것은 꿈을 되찾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돈이야말로 진정하고도 영원한 행복지수거든. 내 밑에서 일하면 돈은 필요한 만큼 가질 수 있잖아. 필요한 만큼이 중요해. 돈을 너무 많이 주면 독이 돼. 조금은 모자라게 해 줘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거든. 그게 진정한 꿈이고 희망이지. 꿈과 희망을 얻기 위해서 나한테 충성하게 되고. 기브앤 테이크야. 주고 받는 거만큼 공평한 게임이 어딨어. 안 그래."

 

아무리 보잘것없는 꿈이라도 꿈은 성질상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꿈은 또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걷는 희망에 대한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말처럼 꿈을 잃으면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성립하기도 할 것이다. 꿈은 곧 다가올 내일을 여는 문이다. 문은 반드시 스스로 열어야 한다. 난관은 있다. 인상 험악한 문지기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 문으로 향하는 걸 겁내거나 아예 문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꿈을 가지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건 고단하다고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꿈꾸기를 그만둔다면 꿈이 후대를 타고 이어져 새로운 기운을 생성하고 새 삶을 보장한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한다.

 

"멈추어 섰던 꿈과 희망 발전소가 재가동 되었다. 골짜기의 뼈들은 서로 제 짝을 찾아서 결합하였고 그 위로 핏줄이 돋고 살이 돋았다. 죽었던 꽃과 나무들이 살아났으며 바람과 햇빛에도 생기가 스며들었다."

 

아홉 살에 지하철역에 유기된 철수는 어느 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황금쥐가 휘하를 시켜 지하철역 이정표를 모조리 떼어 가는 걸 목격한다. 황금쥐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갈등하던 부장판사는 이정표가 사라진 지하철역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된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우체통을 만난 그들은 우체통에게서 철수의 출생의 비밀을 듣게된다.

 

세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황금쥐는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경배의 대상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가 지닌 재력과 권력에 대항할 꿈조차 꾸지 않고 사람들은 그의 세계관에 동조하고 그가 벌이는 다양한 사업에 찬동한다. 얼토당토않은 식탐에 사로잡힌 황금쥐가 벌인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지하철역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 여파로 경영악화에 휘청거리던 지하철업계가 황금쥐 손에 넘어가게 되자 황금쥐는 지하세계 건설에 대한 오래된 꿈을 키운다. 그의 야심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꿈과 희망의 불을 지피는 것뿐. 철수와 부장판사의 손에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당도한 그들은 꿈과 희망 발전소를 힘차게 돌리는데....

 

엄마를 찾을 희망을 버리지 않은 철수와 정의로운 판결에 대한 이상을 품고 현실과 끝내 타협하지 않은 부장판사는 꿈을 지닌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의정에 속아 꿈을 방기할 때조차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들은 세상을 바꿀 동력으로 화려하게 탄생했다. 희망의 불씨는 작지만 불씨가 큰불의 진원지가 되듯이 그들이 단행한 고된 여정은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줌으로써 결정적으로 보상을 받았다. 작게는 철수는 엄마를 만났고 부장판사는 가족과 재회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지만 그것들을 뛰어넘는 꿈과 희망의 가치에 관한 깨달음을 전 인류를 향해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은 선구자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꿈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시대가 조금 덜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질과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에만 국한한 극히 즉물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런 꿈이 없다면 세상은 브레이크 잃은 열차처럼 속도를 내다 결국 송두리째 파멸하고 말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세계화 물결이 전세계를 휘감는 동안 대안 세계화는 철저히 잦아들었다. 실제 그들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로 잠긴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광풍처럼 우리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온통 점령해 버린 탓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된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게된 세계경제가 바야흐로 대안 세계화에 눈을 돌리게 된 건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 세계화라는 꿈이 없었다면 위기의 순간에 이 세계가 보았을 황망함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소수자의 꿈이라도 그것이 있기에 무한 독주의 야망을 잠시라도 접을 수 있었을 테고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 되돌아서서 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꿈은 어떤 형태라도 방기되어서는 안 된다. 꿈꾸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원대한 비전을 갖고 꿈을 꾸고 희망을 곧추세울 때 현실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한 꿈은 요원할 뿐이다. 보다 나은 내일의 꿈은 어느 때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철수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다가 갑작스럽게 부장판사가 등장하면서 그가 철수와 짝을 이뤄 문제를 해결해 가는 설정은 준비 없이 뒤통수를 맞은 듯 낯설고 소설의 주제로 선택된 꿈과 희망의 함의가 대중적으로 어필하기에는 진부한 면이 있다는 걸 숨길 수 없다. 황금쥐로 대표되는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와, 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찾아오려는 인간과 그를 죽이려는 대결구도 또한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엉킨 실타래처럼 난맥상이 심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 못할 구석이 없지 않다.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가 안타깝게도 사어처럼 변해 가는 이 시대에 그 의미를 의식의 정수리에 깊이 찔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진부함 또한 상당 부분 가려질 것이다. 꿈과 희망을 일깨우는 일, 무엇보다 시급히 요청되는 일이다. 요즘처럼 살기 힘들다는 말이 자주 들릴 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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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심리백과 - 완벽한 부모는 없다
이자벨 피이오자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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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모 방송인이 그가 진행하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된 심정을 리얼하게 표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그는 진통을 시작한 아내와 떨어져 전남 모처에서 프로그램을 찍고 있었다. 목적지로 이동하는 길지 않은 순간에 카메라가 잡은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몸에서 기대와 불안이 뚝뚝 떨어지고 나서 마침내 연락이 왔다. 감격에 사로잡힌 그는 동료들과 떨어져 조용히 숲 속을 걸어 들어갔다.

 

부모가 된다는 것, 그건 무척 가슴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에 자기와 꼭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모가 된다는 것과 부모로 산다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임에도 부모가 되면 마치 모든 게 다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부터 새로운 긴장관계가 시작된다는 걸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 책은 특히 아이와의 관계에서 부모가 겪는 혼란과 미숙한 대응 등을 솔직히 그려내고 있다. 남의 아이의 실수와 잘못은 쉽게 용서하면서도 자기 자식의 그것은 호되게 꾸짖는 부모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 그 예다. 저자는 여기서 더나가 자식의 실수와 잘못을 참을 만큼 참았다고 믿고 자식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부모의 심리를 거침없이 꼬집고 있다. 첫 장부터 쏟아지는 저자의 일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저자가 작심한 듯 펼친 부모의 의식과 행태 전반에 대한 비판의 칼날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공감의 폭이 상당히 넓고 크다.

 

이유는 저자의 비판이 대부분 실제 생활 가운데서 자주 겪는 일을 겨냥하고 있을뿐더러 그런 일들에 드러난 심리상태가 개인의 경험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데 있다. 이는 저자가 임상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책 곳곳에서 만나는 사례와 에피소드들은 주인공을 '나'로 치환해도 좋을 만큼 실제적이고 직접적이다.

 

우선 저자는 일상적으로 부닥치는 부모의 정서적 혼란을 활자와 행간 곳곳에 배치해놓음으로써 부모가 그런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도록 이끌고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다그치지만 실제로 자신의 불만족을 아이에게 투사하지는 않는지, 부모가 되면 이렇게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반복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오게되는 정서적 혼란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 저자가 언급한 혼란한 감정의 예들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런 문제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가 오래 담아둘 여유가 없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들은 해결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자 밖으로 드러나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런 부모의 혼란한 감정을 야기한 행동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자식들의 정서적 이성적 왜곡을 바로잡을 여지를 가질 수 있다.

 

자식은 부모와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함께 어울려 놀고 친구처럼 부모와 터놓고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부모는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답 같은 이유 말고 저자 특유의 분석적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저자는 완벽한 부모란 없음을 전제하고 이 책을 썼다. 저자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부모가 되려는 마음을 갖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벽한 부모'를 이르지 않음에도 자주 또는 은연중에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에게 지칠 뿐 아니라 일정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자식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비판이 직접적으로 부모를 겨냥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부모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완벽한 부모 되기'의 허상을 벗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하고 감정에 솔직해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 책의 부제를 '조금 느슨한 부모 되기'라고 붙여도 좋을 것이다. '어깨의 힘을 조금 뺀 부모', '아이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 덜어낸 부모',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하기보다 조금은 어이없어 보이는 행동을 아이와 같이 해보는 부모'가 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완벽한 부모보다 아이와 상대가 되는 부모가 좋지 않을까. 지나치게 긴장하고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고된 부모 노릇에서 잠시 비켜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세상에 슈퍼 우먼이 없듯이 슈퍼 페어런츠도 없다.

 

앞서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와 새로운 긴장관계에 들어간다고 쓴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긴장관계는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부모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혼란의 문제임을 알게됐다. 부담감을 벗은 부모에게서 자식이 건강하게 자란다는 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부모의 한계와 가계의 이력을 이해하고 자식의 행동을 세밀히 관찰할 때 전과 다른 관계성의 세계로 들어가리라는 기대도 해보았다.

 

저자의 '좋은 부모 되기' 처방은 자기를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지난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힘 또한 바로 그런 성찰에서 비롯한다. 이 책이 자식과의 관계가 긴장 관계가 아닌 사랑하고 아끼는 교호관계로 새롭게 바뀌길 열망하는 부모 모두에게 실제적인 지침서가 돼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갓 부모가 되었다면 '좋은 부모 되기'의 적절한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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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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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기준에 관한 모호성을 묘파한 책으로 단연 〈문명과 야만〉이 돋보인다. 문명 특유의 의식 또는 행동양식이 전혀 문명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인식적 전환을 이 책만큼 재간 넘치게 그린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책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의식, 생활양식, 준거)이 궁극적으로 문명과 야만의 구별 모호성 또는 구분의 불필요를 입증하는 근거가 됨을 묘파했다. 예를 들어 문명국에 고유한 행동양식을 야만국이 보인다면, 또한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던 특정 행동양식을 문명국에서 발견한다면 어떨까?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그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이와 논점은 다소 다르지만 이 책, 〈문명의 관객〉 또한 뒤틀린 시각들을 교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앞서 언급한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특히 통계 수치의 인용과 전문가 집단의 대외 자료를 근거로 제시된 각종 위험정보가 실은 관련 기업을 살찌우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공박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과거 황우석 파동을 겪은 우리 사회를 향해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특정 사안과 사건을 맹신하거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포장 하는 한 사안과 사건에 내재된 위험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폐해는 고스란히 사회의 몫으로 남는다. 열광이 성찰을 동반하지 않을 때 과열이 끓어오르고 그것이 오히려 과학을 선도하는 가치 전도 현상이 일어날 개연성이 높아진다.

 

황우석 파동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검증이 필요한 각종 조치들은 생략되었고, 위험하게도 그런 사전 조치들을 요구한 사람들을 마치 민족 반역자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사회 안에 팽배했다. 탈이성과 비이성이 주도한 사회는 세계 최초, 최고라는 찬사에 열광한 나머지 그 열광 뒤에 감춰져 있을지 모를 각종 위험성을 시야에서 간단히 치워버림으로써 다가올 위험을 예고했다. 실험 난자의 추출 문제만 보더라도 난자를 제공해야하는 여성의 건강과 존엄성 문제는 국가 위상을 절대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맹신 앞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이 점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다.

 

황우석 신드롬에 빠진 우리 사회의 집단적 광기를 강도 높게 비판한 저자의 혜안이 〈문명의 관객〉 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글은 보다 유연해진 반면 호소력은 더욱 높아졌다. 편지글 형식의 실험도 돋보인다. 친구의 편지를 대하듯 가볍게 읽히는 것도 장점.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가 저자의 폭넓은 학식과 통찰에 힘입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조류독감과 기름유출사고를 저자가 비켜갈리 없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달리 지난 10년간 일반 독감에 의한 사망자는 500만 명인 반면 조류독감으로는 246명이 목숨을 잃었단다. 조류독감 예방약을 발매한 제약회사는 2007년 한해만 21억 달러를 벌어들었는데 그 약의 약효는 검증되지 않았다. 조류에 전격 노출되었을 축산업자나 살처분에 동원된 사람들 중 누구도 조류독감에 희생되지 않았다는 지적에 이르면 더욱 기막히다. 공포의 생산과 확대재생산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름유출사고의 경우엔 보다 심각하다. 기름제거작업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점은 처음부터 알려지지 않았다. 기본적인 방제장비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름제거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작업은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기름 방제 작업이 '독성 물질'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은 나중에서야 알려졌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위험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셈이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는 데 정서적으로 호소하거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방식이 동원되는 사람들의 인권과 건강의 심각한 침해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무시한다는 데 있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약을 공포감을 조성해 팔거나 작업의 위험성 등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보 취득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한 채 국민정서에 일방적으로 기댄 기름유출사고의 뒤처리방식은 두고두고 곱씹을 구석이 많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 아닐까? 현상 뒤에 가려진 진실에 눈뜨도록 고무하는 그런 것 말이다. 진실이 가려진 곳엔 허위와 위선이 똬리를 튼다. 그리고 그것들이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결정적으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악순환을 재생산한다. 그 고리를 끊어내려면 현상에 대한 성급한 단정을 벗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통칭해서 사회적 공기라 할 수 있는 언론과 정부, 전문가 집단이 특정 목적을 위해 바람직한 부분만 부각시킬 일이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에 관한 정보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그 바탕 위에서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와 토대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황우석 파동과 조류독감의 공포,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비적절한 대응 등이 설자리를 잃게 된다. 어느 때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재가 반복되는 것을 참고 봐야 하는가. 성급한 판단과 비이성적 열광을 벗고 냉철한 비판의 잣대와 성찰의 도구를 서둘러 찾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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