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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목소리 - 어느 나무의 회상록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 파란시간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봄볕이 한창이다. 나뭇가지마다 연한 초록이 걸렸고 기지개를 크게 켠 꽃들은 꽃망울을 연신 터트리느라 온통 시끌벅적하다. 바람에 실린 오묘한 향기들의 근원을 떠올리다 제풀에 지치는 건 연신 밀려오는 소리와 소리들 때문이다. 아우성처럼 솟구치는 소리만으로도 봄날은 눈부시다. 봄날의 풍경은 그렇듯 부산하게 온다. 철마다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자연을 보고 있으면 감탄사는 기본이고 며칠만 저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 입새에 배나온다.
섬진강 시인은 “그래 딱 한달만 그곳에 살자”고 노래했다. 그의 말이 특히 이 봄날에 잘 어울린다. 자연이 주는 미감의 최고봉을 봄만큼 가슴 떨리게 전해준 걸 보지 못했다. 가을의 화사함도 좋고 겨울의 적막도 좋지만 봄이 주는 생동감에 비할 바 아닌 것 같다. 사실 돌아보면 어느 계절이고 덜하고 낫고 할 게 있겠는가. 어느 계절이든 계절을 타고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그 이름이 파생하는 형용사처럼 ‘자연스럽’다.
그런 자연이 ‘부자연’으로 바뀔 때 문제가 생긴다. 각종 재해와 오물이 그런 부자연의 결과물일 터다. 그것을 현대문명이 결과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자위하는 건 멋쩍다.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사람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런 부산물들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불가측의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 결과로 사건 사고가 전보다 크게 발생하고 있는데 잦다보니 무감각해져있을 뿐이다. 그런 불감증은 더 큰 혼란을 조장한다. 수년 전 전국민을 충격 속에 빠트린 대구지하철참사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공사장 참변 등은 불감증이 몰고 온 결과라는 점에서 단순한 사건사고로 읽히지 않는다.
위험사회론이 대두된 배경엔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대형참사가 결국 자연스럽지 않은 습관과 태도의 결과라는 자각이 한몫했다. 자연 파괴를 일상적으로 자행한 현대문명이 자연에 관심을 갖고 자연친화적인 문명의 틀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대문명 전반에 대한 내밀한 성찰 없이 외형만 자연친화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뭉스럽다.
이 책, 〈초록목소리〉는 그런 의뭉스러움을 정면 반박한다. 대상물인 자연에 생기를 넣어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제한적으로나마 들어보려는 저자의 의도가 책 전편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손자를 앞에 둔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처럼 서술구조는 느슨하고 호흡 또한 잔잔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여느 책보다 빠르게 전해져 온다. 제목만으로 가벼운 책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독자라면 순간적으로 당황할만하다.
더군다나 주인공인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경험하기도 했으며 일견 들어보았음직한 상황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공감이 상당하다. 읽기가 불편할 정도의 뻐근함이 뒷목을 타고 흐른다. ‘이런 짓을 사람이 하고 있었다’는 자책감 같은 거친 가래가 목구멍을 타고 거침없이 솟구친다.
그래서 대상물로만 봐왔던 사물의 이야기가 소중한 법일지 모르겠다. 대상물을 주체로 두고 사람을 상대화했을 때 사람이 비로소 속 깊은 성찰에 이르게 되는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소망스런 일이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이리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저지른 일들이 결국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일은 나무의 이야기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계에서 수많은 사물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연계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건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누리는 우월적인 지위는 사물이 제 기능을 갖추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계 내에서 누리는 지위일 뿐이다. 사물과 쉼 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는 사람의 현 상황에 대한 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자연을 소모품 정도로 격하하고 자연이 기능을 잃을 것을 대비해 대체물을 개발하려는 사람의 의지는 공존이라는 이상을 파기한 불안한 선택으로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욕망은 필연코 과도한 욕심으로 표출되고 공멸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지속가능한 발전이 운위되고 그 방법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의 많아진 현실이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경제적 발전이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남겨둔 상태 내에서의 발전을 염두에 두는 건 현 세대의 책임 있는 자세다. 최근 들어 ‘사회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한층 고무적이다. ‘경제적 가치’의 창출을 이상으로 삼던 세대가 배출한 부산물을 덜어내려는 시도로 주창된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보다 신장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가치 또한 경제와 사회 양면의 균형 발전을 지속하기를 바란다.
이 책이 경제적 가치에 경도된 현 세대에 들려줄 이야기는 통칭해서 ‘자연과 사회가 공존하는 세계’라는 이상에 부합한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타자의 시선이라는 유용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반복적인 오류를 막는 데 효과적이다. 결정적인 함정에 빠질 위험성을 차단하는 데도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