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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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

 

여행지의 정경과 소회를 담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전 그 힘을, 여행지의 정경이 바쁜 일상에서 놓여난 듯 한 대리만족을 준다면

소회는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를 꺼내놓은 '더도 덜도 말고 내 얘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직접 가진 못해도 저자와 함께 산을 오르고 들을 거니는 것 같이

생동감 넘친 글을 만나는 일에서야 그 글에 대한 내남의 평가에 높낮이가 있을 리 없고,

더욱이 그 글이 가슴에 직접 와 닿는 글임에야 켜켜이 두른 마음의 장벽이 무장해제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 또한 전혀 없을 겁니다.

그 탓에 아예 책을 들고 여행지를 향해 짐을 싸기도 하고 일상을 뒤로하고 호젓한 산길을 거듭 거니는 것이겠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몸과 마음에 공히 작동할 때 느끼는 감동으론 사진과 활자가 공교하게 얽힌 글편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 글이 지닌 감성에 날개를 달아준 〈끌림〉은 책의 제목이 아니어도 끌릴 만합니다.

 

저자 이병률은 등단 시인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었고,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표지 안쪽에 실린 다소 병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진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 여러 곳에 그가 나눈 낯선 사랑과 죽음 근처에 이른 가난한 초상이 새겨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덥석 베어 문 탓에 옥수수 행상을 하는 청년도 그도 잔돈이 없어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역으로 가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다 잡지 못한 시인은

거스름돈을 챙겨 자리로 돌아와 청년에게 그 돈을 건넵니다.

며칠 후 시인은 우연히 마주친 그 청년이 가는 길에 먹으라고 옥수수 두 개를 담은 봉지를 건네자 사라는 줄 알고 지갑을 꺼내듭니다.

무안해진 시인은 자신을 나무라며

행상을 만나면 ‘언제든 두 개를 사서 그 중 하나를 건네야 한다’고, ‘그러는 게 맞다’는 말로 갈무리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채근하는 성찰을 만난 대목입니다.

 

서너 달 전에 받은 편지를 따라 이집트로 날아간 시인이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편지 주인공이 오라던 곳에서 그와 조우할 수 없음을 알고도 아쉬워하는 장면이나

그와 동행하지 않고는 피라미드를 감각적으로 감상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도 비싼 택시값을 치른 채 역시나 감흥 없는 피라미드를 본 것이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즉시 이역만리 페루로 방향을 틀은 것에서

'생의 마지막을 사르기 위해 여행지를 떠도는 남루한 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리의 밤에 찾아든 숙소에서 ‘다음 사람에게’라고 수신처를 정성스럽게 적은 선물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섣불리 뜯지 못합니다.

다음 날 숙소 주인을 만나고서야 선물의 유례를 전해들은 시인은

그 방에 묵을 다음 사람을 위해 배고프지 말라고 파스타 묶음을 선물로 준비합니다.

이 부분에선 시인의 눈에 고인 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이지만 매력은 그닥 없는 한 여성과 메마르게 살을 섞고 또한 건조하게 헤어지는 장면에선

그가 다다른 애정의 깊이와 저변을 쉽게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작품이 널리 읽히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딱히 ‘이것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다다를 만하면 저만치 물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가없는 심연,

침울하지 않은 슬픔 같은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여백이 많다는 의미와도 통하지 싶습니다.

그렇다고 휑하게 찬바람 불거나 후텁지근하지 않은 여백은 아닙니다. 한두 번쯤 발 편히 뻗고 쉬었다 가도 좋을 여백이라고 말해두고 싶습니다.

 

 

사족

 

여행기의 맛을 몇 번 본 후론 나름대로 정한 ‘읽어야 할 목록의 책’을 밀치는 일이 보다 수월해 졌습니다.

사정이 그렇다고는 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있다는 부담감을 버리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큰 맘 먹어야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나 봅니다.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제학 서적을 읽는 속도와 그것에 비례해서 양마저 현저히 떨어진 요 며칠 동안

책을 손에 쥐고만 있거나 눈 가까이 두는 일로 위안 아닌 위안을 삼는 일이 잦았습니다.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마치 남 주기엔 아깝고 내 곁에 두기엔 그저 그런 애인처럼 읽긴 읽어야 하는데 싹 잘 읽히진 않는 배반의 흐름이 벽처럼 막아선 꼭 그런.

 

이 책으로 그 벽에서 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노을빛 기슭에서’ 잘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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