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평점 :
일시품절


정말 재밌다, 이 소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일어날 법한 이야기 또는 언젠가 한번쯤 벌어졌을 이야기,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현실로 불러와 그 이야기에 놀랍도록 현장감을 부여한 소설에 끌린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추리작가들은 소설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주변, 더 가깝게는 이웃에서 벌어진 이야기로 꾸민 사람들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소설 속 사건이 나 또는 가족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을 넣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꾸민 이야기인 추리소설의 생명력은 꾸민 이야기라는 인상을 최소화하는 데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작가는 거기서 더 나가 앞서 언급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범주에 자신의 소설을 끌어다 놓고자 애쓴다. 작가는 예의 돌발적 상황 전개와 정교하게 얽힌 복선, 예측불허의 심리묘사, 마지막 순간까지 행방이 묘연한 범인의 존재 등의 장치를 통해 작가적 상상력을 무한 증폭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작가의 노력이 한편의 잘 짜인 추리소설로 독자에게 선보이는 것. 문단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난 스스럼없이 그 반열에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등재하면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올려놓고자 한다. 단지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라서가 아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앞서 표현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요소들을 모두 갖춰 놓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오래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그 소설은 살인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그로테스크한 불안과 불안을 덮으려는 또 다른 음모, 그리고 음모 이면에 똬리를 튼 마을 전체의 공동정범의식 등을 신랄하게 드러내면서 독자를 그날의 사건 현장으로 데려간다. 현장을 지켜보던 독자는 순간 자신이 수사요원에게 동질감을 크게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수사요원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에 앞서 조각난 단서를 이리저리 조합해 장차 벌어질 일을 예측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다음 수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종 소설은 엄지와 검지를 가만두지 않았다. 책장은 쉴 새 없이 넘겨졌고 봄볕에 나가놀 생각에 이리저리 들썩이는 엉덩이를 한사코 의자에 붙들어 놨다. 하지만 그게 다 라면 그냥 그랬을 것이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작가와 간격을 적절히 유지하고 걸으면서 그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씽긋 웃어주는 센스를 적잖이 발휘했을 터였다.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간격은 그렇지 않아도 매일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테니 여타 추리소설이 그 간격을 메우지 않는다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간격이 추리소설의 맛이라고 내 나름대로 정한 ‘뒷목을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긴장감’에 어깃장을 놓더라는 그간의 감상이다. 그래서 언제고 한 번 마치 장자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처럼 ‘이게 소설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과연 이 소설은 간단히 그 경계를 허물더니 미처 준비되지 못한 독자를 그 중심에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야 거기서 빠져나왔으니 달리 할 말도 없다.

 

수년 전 독일작가의 소설 한편을 읽은 적이 있다. 장 그루니에의 인간체취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그린 그 소설은 동명의 영화, 〈향수〉로 재탄생돼 시중에 향수 바람을 몰고 왔다.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그 소설은 독일작가의 역랑을 알린 서곡이 되었고, 나와 같은 잠재적인 독자를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반가웠다. 그 반가움이란 작가가 독일인이라는 훌쩍 넘고 있었다. 독일 추리소설이 세계에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팩 표지 소개를 통해 새삼 탄탄한 문학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향수〉를 읽을 때만해도 고색창연한 독일 문학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중성과는 벽을 쌓았을 거라는 편견 또한 견고했다. 〈향수〉가 그와 같은 편견을 허물긴 했지만 〈향수〉야말로 ‘소가 뒷걸음치다 뭣 밞은 격’이라고 단정할 뿐이었다. 어쩌다 혜성같이 나타난 소설 한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거나 없을 소설의 영역에 〈향수〉를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천석고황처럼 굳은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허문 것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다.

 

누군 추리소설이 문학의 본류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소설이 문학성을 전취하든 대중성을 획득하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읽히지 않는 소설이란 허울 좋은 훈장일 뿐인 걸. 고작 몇 날 꺼내놓고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의 훈장 나부랭이라면 그것 갖다 뭐에 쓸까? 대중이 좋아한다고 모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기 위안적, 자기 만족적 문학성은 잠시 뒤로 밀쳐둬도 나쁘지 않을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수백 년 동안 독자의 심금을 울린 명작을 도매금으로 넘긴다고 단정하지 말기를. 문학이든 예술이든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문단 내부의 카르텔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쯤 알아주실 거라 믿는다.

 

아무튼 이 소설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다. 모처럼 짬을 내 창덕궁에 들른 지난 6일, 이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해 1시부터 4시까지 황금시간대 전부를 차압당했으니 더 덧붙일 말이 없다. 봄볕에 한껏 몸을 띄워보자던 당초 계획이 하릴없이 무산된 것은 물론 점심을 챙겨먹지 않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날 5시를 넘겨서야 저녁인 줄 알고 수저를 들었다. 이 정도면 흡입력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지 않을까? 백 마디 말보다 “무척 재밌다”는 말 한 마디가 더 낫기는 하겠다. 재밌다. 그것도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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