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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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지 않는 인간은 땀 흘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런 사람은 많은 독을 쌓을 뿐이다." 트루만 카포우트가 한 말이다. 사람은 땀을 통해 몸 안의 독성물질을 배출함으로써 정상상태를 유지한다. 반면 배출되지 않고 몸 안에 축적된 독성물질은 다양한 형태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꿈을 꾸지 않는 것이 땀을 흘리지 않아 생긴 결과와 다를 바 없다는 그의 말이 실감나게 들려온다.

 

'꿈과 희망 발전소'를 가동하기 위해 길 떠난 두 사람의 여정을 방해꾼들의 공작과 엮어 긴박감 넘치게 그려냄으로써 잊혀진 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있는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은 단편집 〈생리통〉에서 세밀한 문체와 디테일한 묘사로 존재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평가받은 이세벽의 신작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정의와 자유를 향한 꿈을 물질문명의 혜택과 맞바꾼 채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 외벽에 깊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결국 선택은 현대인들의 몫이다.

 

철수와 부장판사가 찾아 나선 꿈과 희망발전소는 그들이 가동한다해도 사람들이 꿈을 깨우지 않으면 소용없는 한계 내에 존재한다. 그것은 꿈을 찾아 떠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불안요소일 뿐 아니라 예측 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꿈과 희망의 발전소를 돌리면 저절로 불이 들어온다고 그랬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겠구나." "불을 켜고 안 켜고는 사람들 마음에 달려 있어요. 하지만 먼저 꿈과 희망의 기운을 사람들에게 보내줘야 해요." "안 켜면 헛수고만 하는 거 아니냐." "켜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점차 늘어날 테고."

 

그리고 그것은 꿈을 되찾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돈이야말로 진정하고도 영원한 행복지수거든. 내 밑에서 일하면 돈은 필요한 만큼 가질 수 있잖아. 필요한 만큼이 중요해. 돈을 너무 많이 주면 독이 돼. 조금은 모자라게 해 줘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거든. 그게 진정한 꿈이고 희망이지. 꿈과 희망을 얻기 위해서 나한테 충성하게 되고. 기브앤 테이크야. 주고 받는 거만큼 공평한 게임이 어딨어. 안 그래."

 

아무리 보잘것없는 꿈이라도 꿈은 성질상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꿈은 또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걷는 희망에 대한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말처럼 꿈을 잃으면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성립하기도 할 것이다. 꿈은 곧 다가올 내일을 여는 문이다. 문은 반드시 스스로 열어야 한다. 난관은 있다. 인상 험악한 문지기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 문으로 향하는 걸 겁내거나 아예 문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꿈을 가지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건 고단하다고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꿈꾸기를 그만둔다면 꿈이 후대를 타고 이어져 새로운 기운을 생성하고 새 삶을 보장한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한다.

 

"멈추어 섰던 꿈과 희망 발전소가 재가동 되었다. 골짜기의 뼈들은 서로 제 짝을 찾아서 결합하였고 그 위로 핏줄이 돋고 살이 돋았다. 죽었던 꽃과 나무들이 살아났으며 바람과 햇빛에도 생기가 스며들었다."

 

아홉 살에 지하철역에 유기된 철수는 어느 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황금쥐가 휘하를 시켜 지하철역 이정표를 모조리 떼어 가는 걸 목격한다. 황금쥐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갈등하던 부장판사는 이정표가 사라진 지하철역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된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우체통을 만난 그들은 우체통에게서 철수의 출생의 비밀을 듣게된다.

 

세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황금쥐는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경배의 대상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가 지닌 재력과 권력에 대항할 꿈조차 꾸지 않고 사람들은 그의 세계관에 동조하고 그가 벌이는 다양한 사업에 찬동한다. 얼토당토않은 식탐에 사로잡힌 황금쥐가 벌인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지하철역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 여파로 경영악화에 휘청거리던 지하철업계가 황금쥐 손에 넘어가게 되자 황금쥐는 지하세계 건설에 대한 오래된 꿈을 키운다. 그의 야심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꿈과 희망의 불을 지피는 것뿐. 철수와 부장판사의 손에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당도한 그들은 꿈과 희망 발전소를 힘차게 돌리는데....

 

엄마를 찾을 희망을 버리지 않은 철수와 정의로운 판결에 대한 이상을 품고 현실과 끝내 타협하지 않은 부장판사는 꿈을 지닌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의정에 속아 꿈을 방기할 때조차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들은 세상을 바꿀 동력으로 화려하게 탄생했다. 희망의 불씨는 작지만 불씨가 큰불의 진원지가 되듯이 그들이 단행한 고된 여정은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줌으로써 결정적으로 보상을 받았다. 작게는 철수는 엄마를 만났고 부장판사는 가족과 재회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지만 그것들을 뛰어넘는 꿈과 희망의 가치에 관한 깨달음을 전 인류를 향해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은 선구자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꿈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시대가 조금 덜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질과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에만 국한한 극히 즉물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런 꿈이 없다면 세상은 브레이크 잃은 열차처럼 속도를 내다 결국 송두리째 파멸하고 말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세계화 물결이 전세계를 휘감는 동안 대안 세계화는 철저히 잦아들었다. 실제 그들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로 잠긴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광풍처럼 우리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온통 점령해 버린 탓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된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게된 세계경제가 바야흐로 대안 세계화에 눈을 돌리게 된 건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 세계화라는 꿈이 없었다면 위기의 순간에 이 세계가 보았을 황망함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소수자의 꿈이라도 그것이 있기에 무한 독주의 야망을 잠시라도 접을 수 있었을 테고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 되돌아서서 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꿈은 어떤 형태라도 방기되어서는 안 된다. 꿈꾸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원대한 비전을 갖고 꿈을 꾸고 희망을 곧추세울 때 현실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한 꿈은 요원할 뿐이다. 보다 나은 내일의 꿈은 어느 때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철수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다가 갑작스럽게 부장판사가 등장하면서 그가 철수와 짝을 이뤄 문제를 해결해 가는 설정은 준비 없이 뒤통수를 맞은 듯 낯설고 소설의 주제로 선택된 꿈과 희망의 함의가 대중적으로 어필하기에는 진부한 면이 있다는 걸 숨길 수 없다. 황금쥐로 대표되는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와, 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찾아오려는 인간과 그를 죽이려는 대결구도 또한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엉킨 실타래처럼 난맥상이 심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 못할 구석이 없지 않다.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가 안타깝게도 사어처럼 변해 가는 이 시대에 그 의미를 의식의 정수리에 깊이 찔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진부함 또한 상당 부분 가려질 것이다. 꿈과 희망을 일깨우는 일, 무엇보다 시급히 요청되는 일이다. 요즘처럼 살기 힘들다는 말이 자주 들릴 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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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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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기준에 관한 모호성을 묘파한 책으로 단연 〈문명과 야만〉이 돋보인다. 문명 특유의 의식 또는 행동양식이 전혀 문명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인식적 전환을 이 책만큼 재간 넘치게 그린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책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의식, 생활양식, 준거)이 궁극적으로 문명과 야만의 구별 모호성 또는 구분의 불필요를 입증하는 근거가 됨을 묘파했다. 예를 들어 문명국에 고유한 행동양식을 야만국이 보인다면, 또한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던 특정 행동양식을 문명국에서 발견한다면 어떨까?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그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이와 논점은 다소 다르지만 이 책, 〈문명의 관객〉 또한 뒤틀린 시각들을 교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앞서 언급한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특히 통계 수치의 인용과 전문가 집단의 대외 자료를 근거로 제시된 각종 위험정보가 실은 관련 기업을 살찌우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공박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과거 황우석 파동을 겪은 우리 사회를 향해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특정 사안과 사건을 맹신하거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포장 하는 한 사안과 사건에 내재된 위험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폐해는 고스란히 사회의 몫으로 남는다. 열광이 성찰을 동반하지 않을 때 과열이 끓어오르고 그것이 오히려 과학을 선도하는 가치 전도 현상이 일어날 개연성이 높아진다.

 

황우석 파동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검증이 필요한 각종 조치들은 생략되었고, 위험하게도 그런 사전 조치들을 요구한 사람들을 마치 민족 반역자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사회 안에 팽배했다. 탈이성과 비이성이 주도한 사회는 세계 최초, 최고라는 찬사에 열광한 나머지 그 열광 뒤에 감춰져 있을지 모를 각종 위험성을 시야에서 간단히 치워버림으로써 다가올 위험을 예고했다. 실험 난자의 추출 문제만 보더라도 난자를 제공해야하는 여성의 건강과 존엄성 문제는 국가 위상을 절대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맹신 앞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이 점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다.

 

황우석 신드롬에 빠진 우리 사회의 집단적 광기를 강도 높게 비판한 저자의 혜안이 〈문명의 관객〉 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글은 보다 유연해진 반면 호소력은 더욱 높아졌다. 편지글 형식의 실험도 돋보인다. 친구의 편지를 대하듯 가볍게 읽히는 것도 장점.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가 저자의 폭넓은 학식과 통찰에 힘입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조류독감과 기름유출사고를 저자가 비켜갈리 없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달리 지난 10년간 일반 독감에 의한 사망자는 500만 명인 반면 조류독감으로는 246명이 목숨을 잃었단다. 조류독감 예방약을 발매한 제약회사는 2007년 한해만 21억 달러를 벌어들었는데 그 약의 약효는 검증되지 않았다. 조류에 전격 노출되었을 축산업자나 살처분에 동원된 사람들 중 누구도 조류독감에 희생되지 않았다는 지적에 이르면 더욱 기막히다. 공포의 생산과 확대재생산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름유출사고의 경우엔 보다 심각하다. 기름제거작업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점은 처음부터 알려지지 않았다. 기본적인 방제장비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름제거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작업은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기름 방제 작업이 '독성 물질'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은 나중에서야 알려졌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위험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셈이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는 데 정서적으로 호소하거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방식이 동원되는 사람들의 인권과 건강의 심각한 침해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무시한다는 데 있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약을 공포감을 조성해 팔거나 작업의 위험성 등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보 취득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한 채 국민정서에 일방적으로 기댄 기름유출사고의 뒤처리방식은 두고두고 곱씹을 구석이 많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 아닐까? 현상 뒤에 가려진 진실에 눈뜨도록 고무하는 그런 것 말이다. 진실이 가려진 곳엔 허위와 위선이 똬리를 튼다. 그리고 그것들이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결정적으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악순환을 재생산한다. 그 고리를 끊어내려면 현상에 대한 성급한 단정을 벗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통칭해서 사회적 공기라 할 수 있는 언론과 정부, 전문가 집단이 특정 목적을 위해 바람직한 부분만 부각시킬 일이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에 관한 정보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그 바탕 위에서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와 토대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황우석 파동과 조류독감의 공포,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비적절한 대응 등이 설자리를 잃게 된다. 어느 때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재가 반복되는 것을 참고 봐야 하는가. 성급한 판단과 비이성적 열광을 벗고 냉철한 비판의 잣대와 성찰의 도구를 서둘러 찾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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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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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한 녀석이 나타났다!! 틈만 나면 교회에서 제 선생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녀석, 아비 키 작다고 놀리는 녀석에게 '선빵'부터 날리고 보는 손 빠른 녀석!!! 녀석에 대한 시중의 평가,  '종잡을 수 없는 놈.'

 

가족은? 술집에서 작은 키에 중절모를 쓴 채 손님과 춤을 추던 아비는 여자가 엉덩이를 툭툭 친 대가(?)로 돈을 받았다. 나무랄 데 없는 춤이라도 작은 키가 핸디캡이었다. 허우대가 멀쩡한 삼촌은 아비에게 배워 제법 화려한 춤 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어버버' 투의 말 본새로 손님 '필'을 확 깨게 하는 포스만 없었다면 그 둘의 콤비는 손님을 배꼽 잡게 하는 데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데까지 두루 먹혔을 것이다.

 

공부하곤 담쌓은 아들, 완득이와 좀 다른 아버지, 강렬한 말 본새를 자랑하는 삼촌 등 주인공 가족의 캐릭터는 평범 그 이상이다. 이 책은 이들 가족의 '일상 다반사'다. 중심구도는 완득이의 생활에 맞춰져 있지만 완득이와 얽힌 다양한 군상들의 독특한 캐릭터가 깨소금냄새를 솔솔 풍기며 독자의 코를 비롯한 감각 전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제 수십 년은 족히 지났을 어린 시절, 야트막한 산 밑 키 작은 동네에 수십 채가 모여 밥짓는 냄새를 담장 안팎으로 주고받으며 정겹게 살았다. 찬바람에 콧물 날리는 것도 잊은 채 낮과 밤을 구별 못하고 사는 아이들의 소리가 골목마다 넘쳐흐르고 멋모르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채를 움찔하게 만든 제법 큰 개들의 짖는 소리가 정겨웠던 그곳. 철마다 떡볶이, 국화빵, 호떡 냄새가 가실 날 없던 그 동네에도 완득이가 있었을 터. 오늘 이 소설의 주인공, 완득이는 그 시절 아이들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좀 유별난 아이이긴 해도 악의 없는 말투와 상대를 봐가며 고개를 숙이고 쳐드는 품새며 욱하는 성질머리 등 꼬집어보면 누구에게 있는 성격이 완득에겐 조금 도드라져 보일 뿐 그의 일상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드리워진 시절의 자신 또는 가까운 친구, 어디선가 들어본 어떤 아이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일상을 파고드는 완득이의 일탈이 눈살 찌푸리지 않게 그려진 이유는 그런 탄탄한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울타리라고 불러도 좋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순응과 일탈 사이를 오가는 요즘 아이들의 일상이 그와 같지 않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을 지나온 중년의 삶이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아이의 순응과 일탈이 가족과 학교 사이에 그 경계를 두고 있다면 중년의 그 경계가 직장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라는 형식만 다를 뿐 두르고 있는 울타리라는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이 소설이 더욱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추억되는지 모를 일이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 들어가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여타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팩트가 살아있는 허구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내장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나 있을 어린 시절의 추억과 연동시킴으로써 독자가 자신을 주인공과 동시적인 존재 또는 주인공의 눈을 가진 가상의 존재로 설정하는 데 거리낌없게 만들어주고 있다. 독자의 강박적이지 않은 위치 설정,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인 감정이입의 소설독법은 대상에 대한 몰입을 극한으로 몰고 가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과 내뱉는 말투에 '키득키득', '컥컥' 하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동반케 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따라서 옆에 누가 있는지 우선 살필 일이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직장 상사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아주 어린아이라면 잠시 책을 덮고 속으로 음미하길 권한다.

 

이쯤에서 담임 똥주 이야기를 해야겠다. 완득이는 어찌됐건 자칭 조폭 선생인 똥주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때만 되면 교회에 가서 똥주 죽기를 기도했던 완득이조차 똥주의 사랑스런(?) 행동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 사랑스런 행동이라고 해야 그 또한 좌충우돌이라 '같은 과' 완득이에게도 썩 마음 드는 구석은 아니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완득이 아버지가 재개발 물결에 나가던 술집에서 본의 아니게 쫓겨나 전국 행상을 할 요량으로 똥차를 한 대 샀다. 어느 날 그렇지 않아도 밤마다 똥주가 옥상에서 완득이를 소리쳐 부르는 통에 성질이 날대로 난 앞집아저씨가 차체에 '씨불놈'이라 써놓았고 그걸 본 완득이가 아저씨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끌려간 장본인들 사이에서 똥주가 멋지게(?) 중재를 섰다. 하여 서로 애초 없던 일이 됐다. 그 때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었던 걸까? 베트남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도 똥주. 심부름을 시키면서 굳이 가는 곳에 어머니가 있다는 말을 뱉은 똥주를 용서한 걸 보면 완득이와 똥주의 밀월 관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지도.....

 

이 외에도 독특한 캐럭터를 지닌 인물들이 많다. '밤마다 쌍욕을 해대며 똥주와 싸우는 옆집 아저씨', '잊을만하면 등장해서 완득이를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핫산', '똘아이계의 본좌 혁주', '전교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면서도 완득이에게 관심을 갖는 윤하' 등등 그들이 발산하는 매력이 소설을 더욱 소설답게 한다. 그만큼 작가가 인물들을 잘 살렸다는 의미겠다. 더구나 이들은 중심인물이 아니면서 좀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로 각인된다. 단역들이 대부분 주인공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지원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과 달리 소설 속 단역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갖고 근거리에서 중심인물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스토리를 전체적으로 밀도 있게 잡아주고 있다. 주인공의 원심력과 단역들의 구심력이 적절한 조화 속에 균형을 이루는 소설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의 인물론을 들어보자. "완득이와 똥주는 남 보기에는 싸움도 잘 하고 자신감이 충만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자신감은 불완전한 거예요. 누군가 정곡을 콕 찌르면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신감인데, 이 자신감 마저 없으면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어 이를 앙다물고 살았던 거죠. 완득이와 똥주는 그림퍼즐 같은 관계예요. 나한테 없지만, 너한테 있는 조각이 맞물려 전체 그림이 완성되니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만들어낸 인물들입니다." "......간혹 독특한 행동이나 말투를 가진 분들을 보면 메모를 해둡니다. 간단한 그림과 함께 그들이 입었던 옷이나 들고 있는 물건 같은 것들을 기록해요. 이건 그저 제 습관이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실제의 인물 두 명의 캐릭터를 섞어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인물로 만들어내기도 하지요."(이상 큰따옴표 부분은 창비의 작가 김려령 인터뷰, 〈반짝반짝 빛나는 열정의 청춘을 위하여〉에서 인용)

 

생활주변에서 손쉽게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투를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한 작가의 집요한 열정이 소설 속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쓰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감탄했다. 잠시 눈을 돌리면 지금이라도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법한 인물들이라는 공감을 이 소설이 불러내는 이유가 사람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말이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따뜻하고 마음 흥겹게 읽히는 소설의 탄생을 축하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파트가 자기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 관찰한다는 설정'이 중심 테마로 그려질 그의 차기작을 서둘러 기대한다. 입심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등장은 설레기 마련이다. 대표적 이야기꾼인 성석제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마당에 김려령이라는 준비된 작가를 만나고 보니 가슴이 한참을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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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길돈 - 윤태익 위기극복 콘서트
윤태익 지음 / 지식노마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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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 먹기에 달렸다."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말 아닐까 싶습니다. 경영학 박사이자 인하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의 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어색한 책제목을 달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뜻을 세우고 길을 찾으면 돈이 따라온다."는 저자의 평소 지론을, 각 어구 첫 글자를 따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뜻길돈〉이 그것입니다.

 

제목만 봐선 언뜻 투자 지침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엔 돈 얘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하나마나한 이야기, 바른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타 투자 지침서에 질린 독자들, 특히 신물 날 정도로 돈, 돈 하며 목청을 높인 책들에서 맡지 못한 사람 냄새를 맡을 것 같아 이 책을 선택을 선택한 독자라면 이내 어이없어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경제 탓에 허리띠를 졸라매고도 모자라 근근히 입에 풀칠하고 사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돈을 눈에 잘 띄는 표지에 언급하고도 돈에 관한 내용을 빼먹은 것을 저자의 단순한 실수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해 출판사가 자의적으로 책 제목을 선정적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뜻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시중에 넘쳐나는 투자 지침서에 호된 신고식을 치른 서민들의 애끓는 가슴을 달래 줄 요량이었든지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북돋을만한 이야기를 담아야겠다는 선의에서든 책은 우선 진정성을 담아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처음이 책 제목으로 시선을 끌려는 얄팍한 상술을 버리는 데서 시작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나치게 호된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이 경멸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속과 달리 겉만 번지르르한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것과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내용물이라면 다신 그릇을 보고 선택하지는 않겠지요.

 

요즘 한창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아내에게 이 책의 출판 의도가 남다르니 읽어보라고 선뜻 건넨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선택의 제일 기준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같은 부류의 책과는 다른 구석이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에 전적으로 기댄 제 잘못이 우선 지적되어야 하겠지요. 선택은 독자의 몫이니 출판사의 잘못은 나중 문제겠습니다.

 

둘째, 진정성은 내용의 현실성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경제위기로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생활이 가능한데 그 원천이 상당부분 막혀 버렸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차상위 계층 여러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배가 부르면 남 사정 모른다'는 말이 제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화소연할 힘조차 잃은 분들의 고통스런 현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서푼짜리 지원'이나 위로랍시고 실제 도움도 되지 않는 '뻔한 말'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 알려주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이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조금 살만할 때나 가능한 말이지 않을까요? 지금은 당장 손에 돈이 쥐어져야 할만큼 어려운 때입니다. 고기를 어떻게 잡아야 한다고 말만 무성히 하지 말고 고기를 잡아주든지 고기 잡는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주든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선 직설화법으로 돈 버는 법을 가르쳐주는 투자 지침서가 보다 솔직하다고 해야겠지요.

 

저자의 이력이 책의 완성도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진 출판물은 시장에 좌절감이라는 부산물을 쌓을 뿐입니다. 자기계발서의 한계가 다 그렇다고 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이 책은 실제적인 재테크에 대한 도움을 얻으려던 아내의 손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겐 별 의미 없는 책이라는 인상을 부단히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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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중 처세어록 - 경박한 세상을 나무라는 매운 가르침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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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작가의 다른 책이 나왔다. 인문학 분야에서 잘 나가는 작가로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그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등을 썼다. 그는 조선지식인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단 권으로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2007년)을 썼을 뿐 아니라 〈다산어록청상〉을 연이어 냈다. 이 책, 〈성대중 처세어록〉은 조선 지식인 찾기의 두 번째 책인 셈.

 

2004년 〈미쳐야 미친다〉을 출간한 후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이들 조선지식인들의 인간적인 면이란 현대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는 질문에 그는 "그들은 벽(癖)에 들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주인되는 삶을 살다 갔다. 그 인간다움은 삶에 대한 통찰력을 일깨워주고 있다. 책에는 김득신이라는 조선중기 시인이 나온다. 그는 본래 아둔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많은 책을 수천번, 수만번씩 읽고 외웠다. 사기의 백이전은 10만번 넘게 읽었을 정도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으로 우뚝 선다. 노력하고 미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을 그 어렵던 시대의 조선지식인을 통해 체득할 수 있다. 자신의 노둔함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노력으로 삶을 일궈낸 그의 인간다움에서 현대인들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고 답했다. 그가 조선 지식인들을 재조명하는 이유다.

 

쉽게 얻으려 하고 얻은 것을 좀체 내주려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들려줄 말을 그가 조선 지식인의 입을 통해 대리 발설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다만 전작인 〈다산어록청상〉의 다산과 달리 성대중은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는 정도뿐이다. 저자의 의도가 '온고지신에 기반한 성찰'이라면 조선시대의 지식인 반열에 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에게 간택될 확률이 높은 법일 게다. 성대중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 조금 다르다면 이번엔 처세에 관한 글을 묶었다는 데 있다.

 

처세서에 대한 어감이나 인상이 좋지 않았던지 요즘엔 주로 실용서로 불린다. 여태 실용서에 대한 인식은 썩 좋지 않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적어놓고 당연하게 판다는 것이 주 이유다. 과거에 요즘 말하는 처세서가 있었을까 싶지만 과거라고 사람 사는 모양이 크게 다르진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맞다면 그 시절이라고 처세에 관한 책들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주로 몸가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지금과 다르다면 다를 터.

 

하지만 성대중 처세어록은 몸가짐에 한정하지 않았다. 저자가 10개의 주제어를 택해 선별 작업을 하고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후 제목을 〈성대중 처세어록〉으로 했을 뿐 이 책의 원전은 10편의 중국고사에 평론을 덧붙인 취언과 댓구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질언, 100여 편의 국내 야담을 모은 성언으로 이뤄진 청성잡기(靑城雜記)다. 성대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청직(淸職)에 임명 된 후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등과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당대는 북학파가 이용후생의 실천정신을 주도적 기치로 내세운 때였다. 당시(18세기) 조선은 존화양이라는 명분에 쌓여 있었다. 알려진 대로 성리학이 그 토대였다. 하지만 18세기 성리학은 성리학 본연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 측면을 유지한 채 실천철학적인 측면은 배제되어 있었다. 북학파는 정덕(正德) 이후에 이용후생이 있다는 성리학적 입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명분론에 앞서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북학파의 주장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그들의 실험은 실험으로 그치고 말았다. (앞서 청성잡기의 구성내용과 성대중의 교유 부분, 성리학의 토대 부분은 두산백과사전에서 인용하고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힌다)

 

그들의 정신만이라도 계승되었으면 좋으련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영조시대에 만개한 그들의 학문적 성취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상계와 정치계에 만연한 천석고황과 같은 성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대중이 자신의 호에서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노쇠하지 않는 푸른 성채(靑城)'였다는 점에서 그가 떠 안았을지 모를 시대적 모순이 아프게 전해져 온다.

 

〈성대중의 처세어록〉을 읽는 내내 그런 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대중의 전언은 때론 푸른 바다보다 깊고 청명한 하늘보다 높았지만 곧 비 뿌릴 하늘처럼 흐릿하고 어두워 보였다. 시대적 한계 내에 존재하는 지식인의 괴로움을 반영하는 듯 그의 글은 힘과 함께 현실 감내와 같은 저린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시대가 정신마저 묶어 둘 수는 없었을 터. 그의 정신이 이렇게 글로 남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다.

 

몸이 스러진다고 정신마저 흩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를 통해 보아야 한다. 정신을 값싸게 취급하는 현대인들에게 올곧게 살다간 그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 경제적 문제에 한정되랴. 정신이 살아야 물질도 제 위치를 찾는 법이다. 천민 자본주의의 폐해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그의 가르침이 매섭게 몰아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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