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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잘 안다’는 말과 통하지 않는 경우를 우리가 일본에 갖는 인상처럼 제대로 짚어주는 예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자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십수년 전에 ‘일본을 알자’는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그간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던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뒤로하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적극적인 자세가 바탕이 됐다.
그 때부터 일본에 관한 책들이 다양하게 출간되었던 듯하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정도의 정보전달 위주의 책이 양산되었지만 일부 문화적 측면의 분석서도 있어 당시 출판시장에 다양한 시각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던 일반 독자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본격서가 출현했다고 보기란 일렀다. 대부분 찬양일색 또는 무조건적인 비판 등 양극단과 극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특정 지점에 그 책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없다〉의 출간으로 그런 흐름이 전기를 맞았다. 그 책을 통해 비로소 일본과 일본사회에 대한 이성적인 시각과 성찰적인 비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일본 탐구의 붐이 일었다. 등등의 책은 그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은 없다’ 가 모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책 또한 지나치게 비분강개한 면이 있었고 책 제목에서 보듯이 고작 몇 년에 걸친 관찰을 근거로 ‘일본은 없다’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만큼 관찰과 분석, 비판, 수용이라는 프로세스에 기반한 본격서로서의 특질을 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후로 십수년이 지난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배용준이 결정적으로 촉발한 한류의 물결을 따라 최근 개그우먼이 방송시장에 진출하는 등 심심치 않게 화제를 몰고 오고는 있지만 그런 사실이 과거와 달리 우리가 일본을 많이 알고 있음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별개로 여전히 정치·경제·문화계 각각에 일본에 정통한 인물을 손에 꼽기가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는 한 특정 국가에 대한 시각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관성을 어느 정도 배제하기 위해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한다든지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3자의 시각이라고 해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편견을 온전히 배제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런 경우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최근 몇 년 새 그런 움직임이 탄력을 받고 있다. 이 또한 문제는 있다. 자국 내에서 자국을 제대로 비판하는 당사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이 점에서만 보면 이 책의 저자가 환영받을 이유로 충분하다.
저자 기타노 다케시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학생운동에 참여한 전력으로 중퇴했고 신랄한 독설로 인기를 모은 ‘투 비트’를 경성해 개그맨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영화배우로도 데뷔했다. 그가 감독한 영화, ‘하나비’가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투 비트‘에서 보인 신랄한 독설은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장소를 옮겨 현재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낸 책이 〈위험한 일본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의 현 정치·가정·사회의 문제를 직설적 화법과 각인도가 높은 단문을 사용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다. 때때로 허무맹랑한 주장에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그가 개그맨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비판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로서의 반어법으로 읽히기에 큰 무리가 없다.
그의 비판은 일반적인 비판론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는 사실에 기초한 비판과 주관적인 판단을 뒤섞어 얼마간 독자의 얼을 빼놓는다. 그런 탓에 ‘경청할만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뭐지?’ 하는 의문부호를 날리게 하는 그의 화법과 언술에 익숙해지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가 당초 제기하려했던 '언제나 불행은 우리 눈앞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행복은 늘 아주 먼 과거에만 있는' 일본의 현주소를 피해가려는 의도는 아니니 오해하지 않아도 된다. 개그맨의 자질이 그런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자국민이 자국을 비판하는 데 전통적·정서적 한계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지점에 균열을 일으키는 기제가 '주관의 객관화'법이다. 낯설게 하기, 비틀기, 거리 두기와 유사하다. 그는 그런 장치를 통해 독자가 보다 효과적으로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때론 개그다운 비판에 웃기도 하고 분석적 시각에 감탄하는 동안 일본의 현실과 그 현실을 대하는 일본인의 관점에 관한 정치한 시각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학술적인 비판서는 많았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고, 여행지의 골목길을 걷듯이 내밀한 곳을 관찰하는 묘미를 주는 책은 많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이다. 반면 이 책에 대해 희화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종종 보이는 어이없는 주장과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그런 비판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의도한 '일본 벌거벗기기'의 본질적 측면을 송두리째 거부할 만큼 그 결점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책은 대부분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할애되고 있다. 일본의 총리조차 그의 필봉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밀입국한 김정남을 고스란히 돌려보낸 후 "적절한 조치였다"고 한 고이즈미를 정신나간 총리라고 일갈했다. 반면 우린 풀려나기는 했지만 쓴 글이 문제가 되어 미네르바가 구속된 바 있다. 글을 쓰는 데도 건드리지 말아야할 성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런 이유로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행보가 새삼 부럽다.
그의 글에 담긴 함의는 반대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유효한 프레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니는 우리 정치는 대내외적 측면에서 이렇다할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가정은 저자가 그린 일본의 파괴적인 양상과 같이 관계의 해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는 각종 병리현상을 부산물처럼 쏟아놓고 있다. 과연 탈출구는 없는 걸까? 저자의 다소 과격하고 어이없는 주장에 깔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문제를 추적하는 날카로운 지성, 정치·사회적 권위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가 어두컴컴하다고 해서 과거 어느 한 때의 행복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더욱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되는 것일 게다. 과거라고 다 좋았던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좋게 기억하는 때의 기분과 분위기를 불러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그 때의 추억을 되살려 오늘 닥친 고통을 이겨내기도 하고 내일을 새롭게 준비할 수도 있다. 과거는 '지나갈 내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 앞서 과거와 현재에 가교를 놓으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