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이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을 재 가공해 만든, 순전히 자신의 판단만으로 만든 책이다. 또 그 안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 받아들인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의 글을 다시 읽는다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단숨에 읽었다. 김영훈이 말한 '중립적인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7쪽)'와 마찬가지로 나또한 편파적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트가 들어 간 건 확실하다.  

책을 열면, 나오는 시, "삼중당 문고[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 1988)"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었다는 동질감으로, 몇번을 곱씹어 읽게 했다. 150원 했다는 삼중당 문고가 나의 기억에는 300원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최소 두세권씩 구입해서 그랬는지, 또는 친구들이 두권씩 선물 준 기억으로 그랬을까... 암튼, 얼마큼 알고 알아야 남의 글을 읽고 가타부타(?)는 아니더라고 소견이라도 첨부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 시대에 함께 살아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위로받는다... 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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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를 넣은 빵 -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에서 가려 뽑다
장정일 지음, 김영훈 엮음 / 마티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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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문학작품에 열광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독서일기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책읽기를 배웠다. 나는 장정일의 독서와 사유에 편승했다. 착각이어서 부끄럽지만 내가 읽지도 않았던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독서일기]에 수록된 책을 읽으며 작가의 감상이 내 것이라 믿었다. 미숙했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책을 읽던 시대의 추억이다. (7쪽)

내가 시에서 희곡으로, 희곡에서 소설로 마구 장르 이동을 하게 된 이유도 어쩌면 나의 삶을 독재자처럼 휘둘렀던 그 변신 욕망, 여러 겹의 삶을 살고 싶다는 안타까운 욕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비록 내 삶을 뿌리부터 ‘갈이‘하지는 못하였으나 장르 이동은 시인이 아니라 극작가로, 극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19쪽)

하루키의 소설에 대책 없이 등장하는 플로베르, 테너시 윌리엄스, 헨리 제임스, 카잔카키스, 로맹 롤랑, 피터 폴 앤 메리, 밥 딜런 등의 옛 가수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상실의 세계를 버팀하는 양식으로 일용하는 문화적 할부일 뿐 아니라, 하루키가 독자를 유인하는 미끼이다. (25쪽)

물론 [즐거운 사라]가 이러한 선의의 해석을 감당할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함께 문학을 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종종 간과되는 문제로써, 특정 작품의 수준이나 미적 형상화가 미흡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표현과 출판의 자유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구실은 이념문학이 수난을 받던 80년대에, 긴급구제를 바라는 작품에 대한 서명을 피하는 핑계로 흔히 쓰였다. (34쪽)

요즘 말로 하자면 신라는 세계회가 가장 늦게 진척된 후진국이다. 그런데도 삼국 통일은 신라가 했다. 김용옥은 그 까닭을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168쪽에 언급해놓았는데 나는 그것이 아주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신라가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토착성이 강했다는 것이고 그 줏대(주체성)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저력이자 동력이었다. 이 사실은 새로운 천년을 맞는 한국인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216쪽)

서른여섯 명의 표류자들을 받아들인 조선 왕실은 벽안의 표류자들을 신기한 구경거리로 삼아 술잔치의 어릿광대로 이용했을 뿐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빼낼 수 있는 기술과 정보에 대해 눈감았다. 그래서 강준식은 조선에서의 13년간을 일지로 기록했던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그것의 해제를 담은 이 책에다 다소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우리는 코레아의 광대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220쪽)

똑같은 책을 ‘자투리 독서‘로 한 달이 걸려 읽은 독자와 한달음에 읽어치운 독자는, 엄밀히 말해 다른 책을 읽은 것이다. 동일한 책이되 두 사람이 받은 임팩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243쪽)

그(전태일)는 많이 봐줘 봤자 고작 중학교 1학년 정도의 학력밖에 지니지 않았지만, 마르크스가 평생 런던의 왕립도서관을 출입하며 버렸던 노동의 원리와 변증법을 혼자서 깨달았다.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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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의 탄생]을 읽으면서 왜 이와 같은 책을 자주 읽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일한 책의 내용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알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겹쳐지는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여기서 책을 선택하고 선호하는 부분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괜찮은 읽을 책을 손쉽게? 찾기 위한걸까. 그러면서 우와,, 이렇게 괜찮은 책이 많다니, 빨리 읽고 싶다, 가지고 싶다를 외치면서 몇권을 주문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부럽다. 부러움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무슨 책을 읽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면 되는거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과 돈을 들여 아주 작은 마음의 점하나 정도만 얻어도 되는가, 꼬리를 무는 생각들, 어찌됐던 마음의 미동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다행아닌가. 아니 화석이 되어가는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책읽기라 생각하는데, 그것으로 되었지, 뭘 더 바라겠어...비가 오다 말다를 되풀이하며 더위는 약해지고 가까이 오고 있는 가을을 알 수있다. 여행의 휴유증은 아직까지 하품과 졸음을 가져오면서 잠은 왜 이리 안오는지 매일 내일에서 자고 있다.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생각만 남아 있는데도, -요즘은 금요일만 기다린다. 팬텀싱어, 쇼미더머니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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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의 탄생 - 온전한 나를 위한 세상 모든 책과의 대화
장동석 지음 / 현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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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문법의 변화는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발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입니다. 문화적 문법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문제로 제기되고 인식되기 어렵습니다. 결국 저자의 말마따나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를 부단히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헛된 자만심이 아니라 자기분석과 자기비판을 거친 정신적 성숙의 과정입니다. 비판의 칼날을 나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 벼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15쪽)

*문화적 문법: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사고방식(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성유보는 우리 언론이 시종일관 시민을 뉴스의 주인공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일갈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는"으로 시작하는 뉴스가 도배를 했고, 독재 정권에서는 대통령의 이름만이 뉴스를 장식했었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싶었지만, 이후 재벌 기업의 목소리만 추가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는 결코 주권자가 되지 못하고, 관료 독재와 천민 자본가의 노복이 된다"라는 지적은 뼈아프고 "언론은 언제나 변함없는 정격유착의 충실한 동맹자였다"라는 일갈은 후련합니다. [미완의 꿈]이 보여주는 언론 자유의 꿈은 민주주의 가치 실현과도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139쪽)

문명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물질이 풍족해진 것만큼 우리의 마음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의 존재 의미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159쪽)

클라우제비츠가 규정한 전쟁 중 ‘나의 의지‘는 어떻게 정치로 귀결되는 것일까요.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집합적 욕구는 반드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고, 그렇게 결집된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폭력 행위, 즉 군사적 성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상의 전쟁입니다. "추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절대전쟁", 즉 극단적인 전쟁은 하나의 개연성으 바탕으로 시작되고, 종결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전쟁은 거의 대부분 ‘우연‘의 산물입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왔습니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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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에서 삶의 방향을 찾다..... 파리다녀오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나리자를 보면서, 인기있는 이유는 어디에 서서 보던지, 나만 보는 것같고, 나에게만 위로를 전하는 미소 때문이지 않을까..... 단어를 보기만 봐도 어려운 라틴어 공부에서 각자의 고민에 해답을 얻었으리라. 어려운 일을 해 냄으로써 그 아래의 자잘한 힘듦은 쉬이 통과할 수 있고, 절로 힘을 얻었으리라. 그래서 삶이란, 삶의 목적과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각자의 답을 찾았으리라...... 이름과 명사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여행내내 친구에게 혼만났다.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고 명명해 주는 일이 중요한데, 나의 것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내가 가이드이기 전에는 알 필요가 없으니까, 알 수가 없다. 온전히 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풀어갈 때야 비로소 정확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만약, 내가 가이드라면 달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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