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 저책을 읽다 말다가, 그러다 여기 저기 다니기도 하고, 지금은 비 온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라디오에서는 생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11월은 처음이라 한다. 내린천 단풍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어영부영 그냥 지나가고, 제주도 반달살기라도 하자 했는데, 뭐뭐해야지, 뭐뭐하자, 그러고 만 것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에 하자... 그러다 도서관 서가에서 눈에 띈 '그리운 곳이 생겼다'. 그리운 곳도 있지만 그리운 사람도 있다. 저자는 박완서님의 딸이다. 그래서 글쓰는 것은 손해가 있을 법하다. 아니면 저자의 부족한 역량일 수 있다. 내가 누구를 어떻게 무엇으로 가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소소한 것, 들꽃, 바닥 돌, 거리 등을 많이 언급된다. 멀리 가지 않고 그리운 곳을 가 볼 수 있는 것은 책이 있어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다녀 온 곳이 나오면 좀 더 세심하게 관심이 간다. 동일한 지역에서도 각자 보는 것이 완전 딴판이다. 자작나무는 나도 좋아한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누구나 좋아한다는 건 편견일까, 동생네 전원주택도 자작나무로 도배했으니... 저지난주는 동생 생일 축하로 온 가족이 모였다. 으싸하면서 50대 자축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제부와 여동생 탁구대회를 겨울 가족 여행지에서 하기로 했다. 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모두들 들떴다. 기분이 좋다. 실시간 탁구연습하는 영상도 보게 되니. 나머지 가족들은 베팅...      

지난주는 서해에서 낙조를 보았다. 엄청 많은 사람들, 일일 갱신하는 확진자 수로 겁도 났다... 

너무 큰 것은 감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 조성진의 빗방울변주곡 듣는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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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이 생겼다 - 호원숙의 여행 이야기
호원숙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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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번 여행은 어머니에 대한 관찰도 포함된다. 어머니에 대한 살뜰한 배려와 돌봄보다는 멀리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또 남편에 대한 연구,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풍요롭게 잘 지낼 것인가를 그의 행동을 보고 연구한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곧 부질없다고 느껴진다. 그냥 보는 대로 느끼고 마음을 풀어놓자. 연구할 필요도 없고 관찰은 또 무슨 필요? 기운이나 느끼고 오자. (19-20쪽)

나라야니 강을 건넌다. 어머니가 먼저 배를 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연습 같다. 안개에 싸여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강이건만 아득하다. 아침이기 때문인가 모두들 조용하다. 천천히 노를 젓는 소리와 끼룩끼룩 오리들 소리도 이승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 않고 마치 환청과 같다. (44쪽)

시내에서 떨어진 숙소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자작나무 숲이 쭉쭉 뻗어 밤인데도 희끗희끗 빛을 내며 번득인다. 피곤감이 사라지며 눈이 번쩍 뜨인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이구나. 이 숲을 보러 온 것이다. 야생동물의 눈처럼 번드깅는 하얀 자작나무는 정신이 번쩍 나게 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힘이 있다. 그냥 하얀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마다 조각을 한 듯 날카로운 문양이 들어 있다. (96쪽)

자신의 실수로 카메라를 잃어버렸는데 누구를 탓하랴. 너무 아낀 것도 죄라면 죄다. 물건에 대한 지나친 애정도 죄다. 꽃에 대한 지나친 친밀감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냥 바라보았어야 했다. 예쁜 꽃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유유히 걸어갔어야 했다. 머릿속에 담아두었어야 했다. 악착같이 내 물건에 담아두려고 했던 건 소유욕 때문이었다. (103쪽)

내가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길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 나라와 나라를 건너가는 길을 보고 싶었다. 버스나 기차 속에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며 동경했던 유럽의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여행의 목적은 충분했다. (123쪽)

너무 멀리 왔나 보다. 집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생각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여행에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히 내려 기다리는 버스를 탄다. (164쪽)

폼페이 유적 무너진 집터에서 주는 비애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불가리아의 집들과 강들이 사랑스러웠다. 역사적인 유적이 감동을 자아내려면 시간과 예술성 그리고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173쪽)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혼자서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 나는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가까이 어정거리는 시간을 즐긴다. 약간의 고독감도 좋지 않은가. 비행기 안에서 주리를 트는 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본다. (202쪽)

가이드는 내리막길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길이 없어 등산 가이드를 꼭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타국의 산속, 길 없는 길을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밭에 길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이라도 찔금찔금 흘리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떻게 되겠지 뭐 하는 배짱이 생긴다. 앞서가는 여자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256쪽)

여행에서는 무엇보다도 잔재미가 중요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유럽의 역사나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이나 패권의 역사보다는 골목 바닥에 깔린 반들반들한 돌의 감촉을 더듬는 것이 좋다. 그 돌바닥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다. (273쪽)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으로 간다. 메밀밭 유채밭의 넓은 벌판에 십자가 무더기 언덕이 있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박해로 죽은 사람, 무덤도 없이 어딘가에서 죽어간 사람을 위해 사람들이 십자가를 갖다 놓아 언덕을 이루었다. 그 십자가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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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군더더기가 없고 허투른 것 하나 없는, 단어 하나, 문장까지 정수에 가깝다. 그렇게 살아오신 분 같다. 감사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감사의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그러한 삶. 그 분의 모습(24쪽, 44쪽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늙고 싶다. getting older lik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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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일반판)
올리버 색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알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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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원소와 생일은 늘 하나로 얽혀 있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원자번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랬다. 열한 살 때 나는 "난 나트륨이야"라고 말했고(나트륨은 11번 원소이다), 일흔아홉 살인 지금 나는 금이다. (15쪽)

이어진 기나긴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갖 기억이 엄습해왔다.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었지만, 대부분 감사하고픈 기억들이었다. 내가 남들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었다는 데 대한 감사. (16쪽)

오든이 죽은 지 사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꿈에서 종종 그를 본다.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고, 예전 환자들도 마주한다. 다들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내 삶에서 내가 사랑했고 내게 중요했던 사람들이다. (18쪽)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 선택에 달렸다. 나는 가급적 가장 풍요롭고, 깊이 있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26쪽)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29쪽)

그날 안식일의 평화, 세상이 멈춘 평화, 시간 밖의 시간이 주는 평화는 꼭 손에 잡힐 듯했다. 주변 모든 것에 평화가 스며 있었다. 나는 어쩐지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애석한 감정에 젖어서 자꾸 ‘만약에‘를 떠올렸다. 만약에 A와 B와 C가 달랐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55쪽)

그리고 이제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한때 단단했던 근육이 암에 녹아 버린 지금, 나는 갈수록 초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이 쏠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안식일, 휴식의 날, 한 주의 일곱 번째 날,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곱번째 날로 자꾸만 생각이 쏠린다. 우리가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느끼면서 떳떳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그날로.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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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다, 지나간다, 로만 여겼는데, 시간은 멈춰서 고여있기도 한다, 아니에르노처럼 형체로도 만질 수 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세계를 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수단인 책을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며 살아가고 있다. 1941-2006 사이의 기록이다. 자신의 삶을 제3자, 그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어느 순간 정지해 있고, 어느 순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사라질 것들을 기록이라는 수단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즉 세월을 기억하면서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옮기면서 우리 모두가 꿈꿨을 그러한 인생을 나와 그녀, 그, 우리는 어떻게 단어를 고르고, 무슨 말로 쓰고 있는지...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9쪽)

옛날 학창 시절, 자신의 방에서 글쓰기를 꿈꿨을 때, 그녀가 점술가들처럼 신비로운 것들을 밝히는 낯선 언어를 찾아내기를 희망했었다. 책을 완성하는 것을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높은 업적으로, 영광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어릴 적 그녀가 자고 일어나면 스칼렛 오하라가 되어 있기를 바랐던 것처럼 [작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내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후로, 40여명의 학생들이 있는 시끄러운 학급에서, 슈퍼마켓의 카트 뒤에서, 공원의 벤치 유모차 옆에서 이 꿈들은 그녀를 떠났다.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 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302쪽)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것.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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