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 사이 엄청 큰 변화가 있었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 나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그 어떤 맛도 느끼도 못하고, 소리도 웅웅대고, 말은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하니 버벅대었다. 어찌 이럴수가. 아들을 논산에 내려놓고 채석강의 일몰을 보고 바닷물이 철석대는 소리를 밤새 들으며 잠들었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오크밸리에서 부모님 생신을 축하했다. 눈내린 창밖의 경치를 통창문을 통해 보면서 바람소리 들으며 즐겼다. 눈내리는 풍경까지 좋았다. 오는 길은 느릿느릿 왔다. 부대에서 온 아들의 옷과 편지에 눈가가 촉촉하고. 분명 포상으로 했을 전화를 운전중이라 못 받은 것이 엄청 견디기 힘들었다. 보이스피싱일거라고 주변의 위로가 있었지만... 한주 후 부대 홈피에서 본 의젓한 모습, 열한명의 분대원 중에 가장 잘생긴 아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친구에게 가장멋진 군인을 찾아보라 했더니, 웬걸 모두 다 멋있단다. 얘일까? 저애일까? 하여 여기 제일 잘생긴 아들을 일러주며 씩씩대며 웃었다. 자식에 대한 콩깍지는 영원할거다. 서로가 즐겁게 견디는 바램으로 도서관을 오가고 있다. 그곳에 가면 나의 미래가 보인다. 어르신들이 많다. 오랜시간 책을 가까이 하여야만 그 자리에 오셔서 책과 마주하고 있으리라. 책냄새와 더불어 나이들고 싶다.

김영하가 말한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저성장 시대, 감성 근육으로 다져진 영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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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잇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28쪽)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35쪽)

서재는 오래된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에 접속하는, 일상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타자를 대면하는 공간입니다. 사실 우리가 낯선 것을 가장 안전하게 만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80쪽)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이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 기술의 발전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아니라고 믿는 이들. 현대화된 이사 서비스는 과연 집에 대한 인간의 오랜 신화적 두려움도 없앨 수 있을까요? 벼락이라는 자연 현상은 피뢰침의 발명으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오직 문학만이 답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의 관심사입니다. (126-127쪽)

독자는 문학작풍이라는 이 기묘한 상품을 사서 그것과 고유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여기에 작가의 자리는 없습니다. 반면 작가 역시 자신의 작품과 나름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작가 역시 자아를 해체하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 독자라는 추상적 존재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작가-작품-독자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작품......작품-독자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169쪽)

소설을 쓴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듣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써나가는 동안 작가 자신이 해체됩니다. 해체되지 않고 새로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가장 낯선 곳에서 작가는 일을 시작합니다.......어쨌든 작가는 매번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규칙으로 새로운 인물들을 겪어야 합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작가의 말 따위는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딴전을 피워댑니다. 마침내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따라서 ‘듣기‘는 윤리이기 이전에 작가가 직면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신념, 지식, 습관, 정치적 성향, 취향)을 서서히 해체하면서 엄청난 노동을 투입하여 한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지나고 보면 그것이 결국 ‘받아적기‘ 혹은 ‘듣기‘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73-174쪽)

한국소설의 세계화와 관련해서도 ‘한국소설은 뛰어난데 번역 때문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많은데, 물론 뛰어난 소설들이 있겠지만 ‘잘 썼다, 잘 번역했다‘고 해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은 여러 문화으 혼종을 통해 빚어진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기획하여 생산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게 만약 실현된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도 한국의 정서를 잘 살린 문학이 아니라 이상한 것, 어지럽게 뒤섞인 것, 도저히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류를 지속시키기를 원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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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글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이고 고급진 언어로 집중하지 않고는 따라가기 어렵다. 쉽지 않은 문장을 읽으면서 글에서 권력이 느껴진다면,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의 예시를 들어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숙자에 가까운 예수를 생각만 해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예수를 만남이 생을 뒤집는 혁명의 시간이 될 정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정도가 되어야, 좁은 문의 희망을 구체화 하려는 노력을, 생활을 돕는 종교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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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간단히 정리하자면, 국가는 대자본의 현실을 돕는 안전망이자 심지어 여리꾼 노릇을 하고, 종교는 자본의 성취와 번영에 대해 뒷북을 치며 축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와 자본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체계(세계)는 신화라는 지평의 테두리를 통해 완결된다‘(니체)는 격언 속의 ‘신화‘를 종교(개신교)에 대입시켜보면, 주중의 근실한 노도오가 욕망 그리고 주말의 충량한 믿음과 나눔을 통해 마침내 자본제적 삶의 형식을 완결시키는 종교의 역할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요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A의 신앙적 독실은 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일까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19쪽)

종교와 몸의 자리가 얼핏 대극적이긴 하지만, 실은 그 상극의 외피가 거대한 원환을 이루면서 내밀한 상생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56쪽)

타인들과의 관계, 특히 한나 이렌트가 ‘정치적 사랑(philia politike)‘-‘세계‘의 공간 사이에 설정한 거리로부터 누군가를 존겨앟는 것-이라고 부른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얻지 못한 인격적 카리스마는 종종 나르시시즘에 되먹힌 채 우스꽝스러운 꼴을 연출한다. (83쪽)

‘많이 벌어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얹혀 있는 자리가 실은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들로 얽혀 있는지,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이란 완벽한 물신학일 뿐이며,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란 게 자본을 향한 호객을 멈추지 않는 여리꾼들의 가면-다만 자신의 몸에 몹시 가까운 탓에 마침내 제 몸이 되어버려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계급‘ 혹은 신분에 관한 얘기다. (93쪽)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evenement)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의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107-108쪽)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인데, 거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풍수를 비롯하여 지역의 민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더러 과감하게 지원하는 이유도 ‘지금-이곳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그의 일관된 ‘세속적‘ 관심-이것은 가히 사이드(E. Said)를 따라 ‘세속적 관심‘이라고 할 만하다-때문이다. (130쪽)

나는 종교의 완성-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그자체가 어패가 있긴 하지만-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 있는 생활양식, 그리고 그 생활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정서와 분위기, 생활양식과 희망은 이미(역설적이게도) 종교의 것을 넘어간다. 종교는 스스로 빈 것으로 남아, 늘 종교가 아닌 것을 도우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규제해왔던 현실을 뒤집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종교를 완성시키는 식으로-그러니까 종교가 생활을 도와, 바로 그 생활이 다시 종교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재배치되어야 한다.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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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연말에는 가족들과 동해로 여행을 다녀왔고, 연초에는 카페를 다녀왔다. 활자에 대한 지속적인 목마름이 엄청 컸다.

사랑하여 결혼한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너와 내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반응하였는지 알게 된다... 

사랑받기에서 사랑하기로 나아가는 길은 멀다. 완벽하다고 믿는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걱정을 견뎌 낼 힘과 너를 대하는 나의 반응은 어릴 적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서 생긴 감정이라고 아는 것. 관계에서 서툼을 아는 것. 사랑이 성숙함에 이르는 여정에는 갈등, 다툼, 배신 등이 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일상의 삐걱거림을 성찰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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