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 교육으로부터의 해방, 제2판 오자와 컬렉션 1
오자와 마키코 지음, 박동섭 옮김 / 서현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테스트와 치료는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어쩌면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닐까? 정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낫게 한다는 것은? 낫는 것은? 이러한 물음과 함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그것이 불리한 입장에 놓인 약자에게 어떤 일의 결과로 생긴 모순이나 불리한 조건 등을 떠넘기는 구도, 심리학(지금까지는 임상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이 지배자 측의 기대로 어떤 역할을 담당해왔는가를 좋든 싫든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8쪽)

예를 들면 심리테스트는 아이의 발달이나 내면 측정에 목표를 두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이를, 예컨대 정상/비정상, 건강/장애 그리고 우등/열등 등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또 심리치료는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경시하고 그 문제를 개인의 내면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심리학이 사회가 낳은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전가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들이 바로 그것이다. (12쪽)

발달과제라는 것은 개인이 정상적인 발달을 성취하는 데 있어 각각의 발달단계에서 달성하는 것이 기대되는 과제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 정상을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이고, 달성을 기대하는 것은 지배하는 측이다. 따라서 당사자가 "나는 이대로 좋습니다. 제발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말해도 그게 통용되지 않는 구도이다. (40쪽)

내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학교 과제를 안다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사상=현상의 어느 한 측면이 보이게 됨과 동시에 다른 측면이 보이지 않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선이라는 것은, 따라서 우리를 어떤 의미에서 기만하는 주문이고 그 주문에 취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49쪽)

학교는 ‘공‘이 ‘사‘에게 어떤 특정한 지식의 체계를 제공하는 곳이다. 그 ‘특수성‘을 ‘그것‘이라고 느끼지 안고, 그 대신에 ‘당연한 것‘이라든지, ‘평균적인 것‘이라든지 ‘중립‘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공이 사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증거이다. (64쪽)

상담이 과학적이고 전문적이기 때문에 중립적이며 인간적인 관계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것은 확실히 부드러운 자세와 특성을 갖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부드럽게 붙잡아 묶어둔다는 의미에서 한층 더 상대하기 벅찬 무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상담이라는 방법의 부드럽고 친절한 스타일 때문에 상담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문제성, 기만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23쪽)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자기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든 조정하면서 아이도 살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일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어른도 아이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마치 왕처럼 취급하여, 어른이 아이에게 종속되는 것 또한 역으로 아이에 대한 굴욕이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생활 사정이, 아이에게는 아이의 그것이 있다고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는 어른보다는 약자의 입장이므로 신중하고 현명하게 반응하는 데 어른 이상으로 진지하다. 따라서 아이가 선택한 방식은 그 나름대로의 무게를 갖고 있다. (155-156쪽)

어느 아이라도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넉넉함과 여유로운 시선이 사라져버리고 보다 바람직한 아이상과 그것을 키워내는 바람직한 부모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쟁과 분단, 그리고 배제되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다른 배제를 낳는 구도가 확대되고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심리학은 개개의 전문가의 선의와 노력과는 별개 문제로서 구조적으로 앞의 도식을 지지하고 강화시키는 데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66쪽)

누군가의 탓, 그것도 어릴 때의 엄마-아이 관계 탓으로 돌려버리면 엄마 이외의 관계자는 문제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입장에서 쉽게 도망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등교거부는 아이의 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교가 앓고 있는 병 때문이라는 것을 정면에 내세우는 학교관계자가 적은 것이 이러한 점을 잘 대변해준다. 어릴 때의 양육방식으로의 환원은 현재관계자와 위정자, 그리고 사회 입장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편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책임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면죄되기 때문에, 심리학기 과학성과 전문성이라는 미명으로 이 구도를 지지하며 부모들을 억압해온 것은 아닐까라고 전문가이면서 부모인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169-170쪽)

굳이 ‘부모교육훈련‘ 테크닉을 빌리지 않더라고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화합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의 기본이다. 우리 어른끼리는 언제나 그렇게 해 왔고,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왜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는가? 왜 전문가가 제공하는 기법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모는 훌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 미숙한 아이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이 부모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79쪽)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인간적이 활동은 인간 자신보다 큰 체계를 끌어오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고, 그 활동의 기원은 아동의 인격 내부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