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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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이 평생 사용하는 단어들은 마치 자신의 손가락[지문]과도 같다. 그 단어들은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정체성뿐 아니라 심지어 지금까지 살아온 그들의 배경을 밝혀내는 데도 점점 더 많이 쓰일 수 있다. (11쪽)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단어인 이유는,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고 말하는 사람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기 때문이다. (13-2-13쪽)

즉 단어 사용은 일반적으로 그 단어를 쓰는 사람의 심리 상태에 영향을 미치거나 유발한다기 보다 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36쪽)

특히 흥미로운 점은 대개의 차이가 가장 흔히 쓰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단어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38쪽)

우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능어를 듣고, 세고, 분석함으로써 그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고, 그들 스스로 인식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측면마저 알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이 기능어를 사용하는 스타일은 우리가 그 사람들 자체와 그들의 메시지를 인식하는 방식에 미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64-65쪽)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전달할 때는 그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자신은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풍부하게 떠올릴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때 우리의 몸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다. (162쪽)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 그리고 특히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사물에 투사한다고 한다. (229쪽)

나는 나의 이메일, 강의, 논문, 추천서 등에서 내가 사용하는 단어도 몇년에 걸쳐 분석해 보았다. 결과는 가끔 예상대로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예상이 들어맞지 않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운다. 사실 내가 보는 나의 행동과 객관적으로 보는 나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순간들을 볼 때가 늘 가장 놀라운 법이다. 이런 경험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즉 나 자신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할지, 내 행동을 바꾸어야 할지,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바꾸어야 할지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239쪽)

그렇다면 왜 사회적 계층의 차이가 기능어 사용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학생들의 인생경험과 가정교육의 어떤 측면이 그들의 단어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한 가지 유력한 견해는 애초에 각각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가정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275쪽)

두 사람의 언어 스타일이 일치한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기능어 사용 스타일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좋아하거나 믿지는 않을 지 몰라도 최소한 서로 지켜보고 귀를 기울인다. 다행히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려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좋은 친구들이나 연인 사이의 대화는 언어 스타일 일치도가 높은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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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때의 기억이 진심이고 진짜일까에서 부터 각색과 윤색을 거친 기억의 단편을 믿고 싶어 '사랑을 믿다'를 펼쳤다. 여전히 애매모호하여 깨닫지 못하는 서로의 사랑, 아니 사랑일까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와서 옛사랑 한 조각의 느낌을 확대 해석하고 내맘과 마찬가지로 너의 맘도 그러하리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서로가 맞닿은 한 지점에서 다시 올라 온 느낌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래서 너와 나의 그 간극을 무엇으로 메울까에 노심초사하는데 자꾸 피곤해지는 이유는 뭘까. 나만 모르는 일들이 여전히 너에게 일어난 건 아닐까. 나는 과거에 머물러 그 순간을 현재에 재현하고 있는데, 너는 현재에서 과거의 순간을 활용한다는 느낌이다. 설령 아니더라도 사랑한다는 꿈이라도 꿔보자. 언제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까... 봄날이니,   

'문라이트' 영화보다. 타인의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대하여, 주인공에 대한 세번의 버전. 그러면서 수없이 놓치고 애써 놓아버린 일, 관계에 대한 부분도 떠 올랐다.   

*권여선 글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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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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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은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23쪽)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41쪽)

기억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무르는 장소에서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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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분밖에 없는 예수의 얼굴이 이리도 많다니, 수세기 동안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많은 얼굴들을 만들어 낸 우리들이 대단하다. 수 많은 얼굴에 화장까지 시켰으니,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예수는 진짜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나또한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예수를 빙자한 또다른 모습의 예수를 쫓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알고 있는 거조차 고통스럽기에 외면하고 있다. 나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면죄를 받기 위해 그 틈을 찾아 예수에 관해 이책 저글을 인용하고 찾고 있을 수 있다.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213쪽)'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의 변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예수의 진심을 알고자 하는 태도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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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의 예수 - 김용민, 인간 예수를 좇다
김용민 지음 / 동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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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는 어땠을까. 평지가 많고 호수가 있어 아주 비옥했다. 하지만 땅 주인 다수는 이곳에 거주하지 않았다. 땅 주인 대부분은 부촌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러니까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평화란 전쟁 없음을 말하지만 실은 분배 정의를 밑바탕에 둔다. 그러니까 이곳은 평화가 부재한 곳이었다. 민중 봉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반로마 저항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일했고,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30쪽)

하나님의 나라는 씨처럼 시작된다. 그 배아는 이미 현재의 삶 속에 선사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경험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경험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히 뿌리내린 희망의 경험과 회상 속에 있다. 씨는 자라고, 집을 떠난 사람은 귀향하고, 질병으로부터 나온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며, 억압에서 해방된 사람은 자유의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이고 사회성을 띈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의 역할과 활동은 ‘지금 여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통적 신학과 현재의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직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내세적, 종말론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회 구조적인 문제 따위는 무시하며 오로지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종교는 세상과 담 쌓을 때 필연적으로 변절된다.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한국 개신교가 대표적이다. 모든 교회의 문제는 세상과의 단절에 있다. (32쪽)

[로마서] 3장 2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스스로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것이 곧 율법이다.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케 해 주는 그 힘의 실체를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성경은 율법의 길, 즉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피해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 이 가운데 우리가 있다. (87쪽)

하나님은 인간을 무엇을 해야 인정받는 존재Human Doing가 아닌,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존중되는 존재Human Being로 여긴다. 광인이라서, 병들어서, 특정 지역 출신이라서, 가난해서, 허름한 집에 살아서, 생산성이 낮아 무능해서...... 이런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부질없는 편 가르기 논리일 뿐이다. 이렇게 가르고 또 갈라서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고 지배 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 나라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래서 예수를 해방의 아이콘이라고 부른다. 그 예수를 바라보자. (104쪽)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 결핍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최대 단점이다. 없는 것도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은 더 있다고 해야 하는 시대에 세상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가치가 바로 결핍이다. 그런데 이런 결핍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늘의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 엄청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11-112쪽)

예수의 분노는 결국 고난을 불렀다. 예수는 갈릴리에 나타나 민중의 지지를 받더니, 예루살렘에까지 진출해 종교 기득권의 총아인 성전을 뒤엎어 버렸다. 당대 기득권층 입장에서 그런 예수를 방치하는 것은 위험을 키우는 꼴이었다. 이즈음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의 ‘사회 지도층‘은 예수의 제거를 획책한다. 예수는 이 사실을 몰랐을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153쪽)

내가 예수가 되는 길이 어려울까.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 자백하는 것이 어려울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를 기념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예수를 못 박은 죄인에 다름 아닌 우리의 실존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성전을 정결하는 주체가 아닌, 정결당한 대상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친소 관계 또는 이익 관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관계들은 ‘바르고 옳은 것‘의 뒷전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난을 받는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이며, 부활 신앙을 계승하는 예수의 제자 아니겠는가. (156쪽)

한국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덕 볼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인간의 죄성 탓으로 돌린다. 사회 구조적 문제가 모두 인간의 죄성 탓이라는 단언은 너무아 위험하다. 노동자들이 절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두고, 자기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인간의 죄 탓으로 돌리거나 몇몇 못된 기업주의의 죄 탓으로 돌리는 게 온당한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눈 감는 기독교인은 ‘맛 잃은 소금‘이라 단언할 수 있다. 예수는 정의를 위해 싸웠고, 그 대가의 냉혹함에 결코 기죽지 않았다. 냉소주의의 틀로 숨어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세상은 총체적으로 퇴보하고 있다. 침묵하고 타협해야 하는가. 행동을 하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치러야 하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신앙이다. (167-168쪽)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성과 양심을 주었는지 고찰하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 그들이 오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성찰 없는 ‘오직 예수‘가 숱한 종교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 사안이다. 신학, 역사, 철학, 문학 등 특히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모든 낱말들에 직면해야 한다. 선대 연구가들의 고민이 나의 생각보다 깊지 않다면 그 이론을 외면해도 된다. 그러나 어디 그러한가.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줄 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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