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 네 슬픔아
신경숙 지음, 구본창 사진 / 현대문학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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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며 원망하는 무엇인가를 얹어놓은 레일을 지켜보는 동안의 두근거림은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는 욕망의 마음이기도 했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한순간에 어느 지점을 관통해가는 레일 위는 누군가를 여기에서 저기로 데려다주는 길이기도 하나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버리는 무덤 속으로 치닫는 길이기도 했다. -63쪽

사는 동안 아주 낯익은 것이 갑자기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든가, 너무나 익숙한 곳이 처음 와보는 곳처럼 여겨지는 경우는 허다하지만 실제로 너무나 잘 아는 길에서 헤매다보니 나 자신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이런 나를 믿고 어찌 살 것인가, 과장된 회의마저 든다. 문득 진짜 내가 그 길을 잘 알고 있었는가? 내가 잘 안다고 여기고 있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내가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반문이 생긴다. 그런가? 정말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그 길을? 그 사람을? 그 일을?-88쪽

봄은 신발 밑에 밟히는 땅의 느낌으로 온다. 겨우내 꽝꽝 얼어 있던 땅이 어느 날 폭삭폭삭하게 밟히면 그것이 봄이다. 아직 얼어 있는 개울이나 묘지 근처에 버들개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겨우내 기척이 없던 다리 밑 움막 속에서 거렁뱅이들이 나와 냇가에서 세수를 하기 시작할 즈음이면 진달래나 생강나무 따위에도 물이 오르고 가만가만 붉거나 노란 움이 트다가 어느새 꽃을 확확 피어올려 걷잡을 수 없게 되곤 했다. 어던 혹독한 겨울 끝이라도 그러했다. -149쪽

여름은 커다란 통 속에 들어 있는 화려한 꽃다발 같다. 닫힘 없이 열려 있다. 세련되었고 소박하다. 애오이처럼 신선하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을 전염시키는 계절이기도 하다. 시들지 않는 꽃과 같이 영원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람을 집중시키다가 어느덧 가버리는 게 여름이다. 한없이 게으름을 부려도 좋을 것같이 긴 것 같으나 금세 입추를 맞이하게 되는 계절이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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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만, 그까이 껏하면 되는데, 자꾸 짜증이 났다.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아껴가며 불편한 감정들을 조금씩 풀어가면서 읽었다. 깨알같은 글을 가는 눈을 하고서야 읽게 되는, 더 가까이 가면 마음의 채도 촘촘해져 그 어떤 것도 놓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는 게 어쩜 이리도 비슷할까, 더도 덜도 이만큼이면 딱인 데, 감정에서조차 욕심을 부리고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사람과 일에서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두는 일이다. 자꾸만 집착하게 되고, 소소한 거까지 바라는 어처구니 없는 욕심, 슬몃 자리잡아 힘들게 하고 있다. 그래도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는 건 아닌가. 그 정도는 눈치를 채야 되지 않는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나의 생일을 내 손으로 차려 먹어야 하나, 이 나이까지. 사랑한다면서. 유치하지만 아직도 생일타령이라고 치부하면 안된다. 그건 단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니까.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용에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도시 때문에 생긴 일이고요.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고요. 혼자서 밥먹고, 이사하고, 터미널에서 서성이기, 정리하기, 출근하기등등 제목이 내용을 깍아 먹는 느낌이다. 이렇게 가벼운 느낌으로 다가 올 수는 없는 내용이다. 각각의 일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와 중첩되면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글이다. 그대도 책을 잡는다면, 조금씩 천천히 읽게 되면서 겸손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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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구판절판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37쪽

종교를 가지거나 명상을 하고, 온 세계를 헤매고 다녀도 내려놓기 힘든 것이 인간의 에고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린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며,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모두 열어젖힌다. 사랑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던 순간, 우린 이미 천국을 맛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천국에서 보낼 날들 가운데 얼마의 시간을 먼저 쓴 것일까. -71쪽

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분들. 그런 세월을 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 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124쪽

바로 '처음'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과거에 쌓아 둔 '인과'가 없었다. 사소한 오해를 빚었던 일도, 기쁨을 나눴던 기억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인연, 마음의 열림과 기적 같은 소통이 가능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순조로운 의사소통을 막는 첫걸음은 과거의 기억에 있다. -172쪽

시간이 지나면 연인은 연인이 아니라 전우로 기억된다. "전우여......" 하고 부르면 왠지 코끝이 찡해진다. 막상 장렬하게 싸우고 싶었던 상대는 인생 그 자체였는데, 엉뚱하게 한 사람을 과녁에 세워 놓고 자존심, 열정, 애정, 신뢰를 요구하며 양쪽을 다 황폐하게 했음을 알게 된다. 어린아이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 고집을 부릴 때, 몽골의 유목민들은 아이에게 손바닥을 쫙 펴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손바닥을 편다. "이제 손바닥을 깨물어 보렴." 아이는 꽉 편 손바닥을 깨물어 보려고 얼굴을 찡그린 채 입을 오물거리낟. 혹시 이걸 성공하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 열심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시도해 봐도 되지 않는다. 엄마 아빠는 이 모습을 보다가 웃음을 떠뜨리며 말한다. "사람이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란다. 갖고 싶은 게 아무리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사랑도 이와 같다. 애당초 손바닥은 깨물기 좋게 생기지 않았다. 내 손바닥도 깨물지 못하거늘 상대의 손바닥이야 말해 뭣하랴. 전쟁같은 사랑이 지난 뒤에야 손바닥과 손바닥은 서로 마주 잡기 좋게 생겼다는 걸 깨닫는다.-219-221쪽

어떤 느낌에 사로잡힌 나를 본질적인 나라고 착각하지 말 것.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기억 할 것. 느낌에도 분명 생로변사가 있으니 현재의 느낌 속으로 충분히 육박해 들어가 느낌의 한 생애를 이해할 것. 불을 쓰다듬어 보고서야 뜨거움을 안 아이처럼 나는 화상 입은 영혼에 붕대를 감고 오직 그 사실만을 기억하려 한다. -290쪽

주머니 두 개가 달린 앞치마를 두르고 하루를 보내는 수행이 있다. 한쪽 주머니에만 콩을 한 줌 넣어 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빈 주머니에 콩을 하나씩 옮긴다. 화가 날 때 한 알, 즐거울 때 한 알, 측은함을 느낄 때 한 알, 누가 마음에 안 들 때 한 알, 맛있다고 느낄 때 한 알..... 밤이 되면 옮긴 콩 개수를 헤아린다. 그 콩의 개수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깨어 있다고 느낀 횟수다.-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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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눈치를 채든, 모른 척 하든, 그러면서 사랑이 만들어져 간다. '건축학개론'을 봤다. 그 남자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그 여자는 조심히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에서 기대볼 수 있는 첫사랑, 예전의 집을 살려 새로이 건축되듯 그들은 서로의 첫사랑을 확인한다... 첫.사.랑은 현실에서의 삶을 따뜻하게 해주고 힘을 준다. '모르는 여인들'은 각자의 고립된 삶에서 어색한 타인과의 관계맺기 위해 노력하는, 각자의 존재만으로도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결국은 시간과 공간의 끝간데 까지 가봐야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때만이라도 그녀와 그에게는 서로에게 사랑의 존재였음을 말하고 있다.... 팍팍한 현실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그게 첫사랑으로 건너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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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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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소녀 시절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운동화 속에. 처녀 시절엔 그 남자들의 구두 속에 내 발을 몰래 넣어보았을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젊은이거나 나이든 이거나 가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와 친밀하게 지냈거나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도 모르게 이미 내가 그들의 신발에 내 발을 가만 집어넣어봤다는 것을 알는지. 내가 특별히 신발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26쪽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232쪽

가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기막힌 인생을 듣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편하게 기대고 있던 등이 나도 모르게 곧추세워져요. 내가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을 두고 뭐가 이렇게 시시하담, 싶어 권태를 느꼈던 것을 상대가 알까 싶어 미안해지는 때가 그런 때예요. 어제 같은 오늘이란 말의 뜻이 권태나 무료가 아니라 별일 없이 무사하다는 뜻이란 것을 실감하는 때이기도 하구요.-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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