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기다리며 원망하는 무엇인가를 얹어놓은 레일을 지켜보는 동안의 두근거림은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는 욕망의 마음이기도 했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한순간에 어느 지점을 관통해가는 레일 위는 누군가를 여기에서 저기로 데려다주는 길이기도 하나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버리는 무덤 속으로 치닫는 길이기도 했다. -63쪽
사는 동안 아주 낯익은 것이 갑자기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든가, 너무나 익숙한 곳이 처음 와보는 곳처럼 여겨지는 경우는 허다하지만 실제로 너무나 잘 아는 길에서 헤매다보니 나 자신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이런 나를 믿고 어찌 살 것인가, 과장된 회의마저 든다. 문득 진짜 내가 그 길을 잘 알고 있었는가? 내가 잘 안다고 여기고 있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내가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반문이 생긴다. 그런가? 정말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그 길을? 그 사람을? 그 일을?-88쪽
봄은 신발 밑에 밟히는 땅의 느낌으로 온다. 겨우내 꽝꽝 얼어 있던 땅이 어느 날 폭삭폭삭하게 밟히면 그것이 봄이다. 아직 얼어 있는 개울이나 묘지 근처에 버들개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겨우내 기척이 없던 다리 밑 움막 속에서 거렁뱅이들이 나와 냇가에서 세수를 하기 시작할 즈음이면 진달래나 생강나무 따위에도 물이 오르고 가만가만 붉거나 노란 움이 트다가 어느새 꽃을 확확 피어올려 걷잡을 수 없게 되곤 했다. 어던 혹독한 겨울 끝이라도 그러했다. -149쪽
여름은 커다란 통 속에 들어 있는 화려한 꽃다발 같다. 닫힘 없이 열려 있다. 세련되었고 소박하다. 애오이처럼 신선하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을 전염시키는 계절이기도 하다. 시들지 않는 꽃과 같이 영원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람을 집중시키다가 어느덧 가버리는 게 여름이다. 한없이 게으름을 부려도 좋을 것같이 긴 것 같으나 금세 입추를 맞이하게 되는 계절이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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