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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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레 몇 시간을 자야 개우낳ㅁ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9쪽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42쪽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친구가 이렇게 위로한다.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걸 위로라고 하고 있다.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포인트는 '여자'가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떤 다른 '한' 여자도 사내의 '이' 여자를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위로는 허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그렇게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여자'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한 여자'로 전락할 때 고통은 사라진다. -85쪽

시절은 가을, 너절한 슬픔들의 침투에 심신이 허약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 나는 너를 잊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를 잃은 슬픔까지도 다 잊었다. 그런데 왜 즐겁지가 않은가. 뭔가 한 뼘 더 타락한 듯도 하고 영혼의 뱃살이 늘어난 듯도 한 이 기분은 뭔가. 슬픔이 유통 기한을 넘기면 씁쓸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거, 씹어 먹으면 아마도 이런 맛이겠지.-95쪽

강압적 일제 고사 시행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해임해버리자. 정부정책을 냉소하고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잡아들이자. 낙하산 사장 취임에 반대한 한국방송 직원들은 취임직후에 잘라버리자. 그리고 이제는, 생존권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은 특공대를 투입해 진압하자......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치자.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한번 생각해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행에, 옮긴다. 이 사태는 이제 정치학이 아니라 정신병리학의 소관처럼 보인다. 이 정권은 환자다. 그들에게는 초자아(Super Ego)가 없는가. 민주화 이후 그토록 더디게 우리 내면에 겨우 자리잡은, '이런 일은 이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그 초자아가 그들에게는 없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죄의식도 없는 것이다. 이드(Id)만 있는 권력이라니. 꿈이 곧 현실이고 소망이 곧 실천인, 그런 권력이라니.-163쪽

지방 선거가 끝났다. 4년 만에 '생각'이라는 것을 하느라 진땀 뺀 정치인들은 다시 생각 없는 삶으로 복귀했고, 4년 만에 공화국의 주인 대접을 받느라 머쓱했던 우리는 다시 힘없는 백성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들만의 축제'가 남긴 결과는 해괴하다. -234쪽

그러나 자식의 잘못을 아비의 잘못으로 돌리는 유교 문화권의 전통이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법'이어야 한다. 자식이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정도의 효과만을 발휘할 때 그 방법은 가치가 있다. 문제를 일으킨 개인이 스스로 책임을 떠맡을 때 역설적이게도 그 개인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반대로 아비가 책임을 질 때 자식의 개인성은 소멸된다. -245쪽

우리가 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은 공인(公人)이다. 한 개인의 업무과 공익(公익)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경우 그 개인의 판단과 실천은 공적인 속성을 갖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연예인은 공인인가?-260쪽

당위와 현실이 팽팽하게 긴장할 때 고뇌가 생겨난다. 당위의 힘이 과도하게 커지면 억압이 생겨나고 현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면 마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자주 흔들리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고 고뇌는 건강한 사회의 증명서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고뇌하는 법을 잊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275쪽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건, 그것이 한 생이 함유하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배합 비율을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방식이겠지요. -338쪽

이렇게 생각한다. 시는 엇갈림과 사무침의 화석이다. 세상과 나의 조우는 실패해야만 한다. '너무 빨리'가 세상의 시간이고 '너무 늦게'가 나의 시간이다. 그 시차(時差)가 서정일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나 자신과도 엇갈리고 사무쳐야 한다. 술에 취하면 그런 시들을 찾게 된다. 술 깨고 싶지 않은 것이고 계속 아프고 싶은 것이다. 술자리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극복과 위로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들과의 애틋한 거리다. 서정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빤하고 애틋한 수작이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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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추리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더니 어느새 햇살이 가득하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르내리는 감정을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드러내고 있다...  날씨도 마음과 같다... 아닌 척 말간 얼굴을 내밀고 있는 햇님, 아니 원래 그 모습이었는데 물리적인 환경, 사람들 때문에 가끔씩 흙빛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도 괜찮은 환경과 좋은 사람들 가운데 있다면 아주 선하고 맑은 얼굴을 보이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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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품절


머릿속에서는 자존심과 이성 간에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은 이성이 승리했다. 찬장에서 꽃병을 꺼내 물을 채운 뒤 아내가 들고 온 꽃을 꽂았다. 그리고 수납장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개가 현관 복도에 남긴 흔적을 치웠다. 어찌 됐든 아내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30쪽

인생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뀐다. 잘못 디딘 한 걸음, 잘못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뭘 원한 걸까? -58쪽

대장간의 열린 문틈으로 코지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를 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몸짓과 웃는 얼굴이 그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숨어서 통화를 하는 거지? 보덴슈타인은 아내가 자신을 알아차리기 전에 재빨리 그 자리를 떴다.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쳐드는 게 느껴졌다.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심장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89쪽

의심이 결혼 생활을 파탄내기 전에 어서 이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어깨를 흔들어 깨워 왜 나를 속였느냐고 따져야 옳다. 그러나 불화를 싫어하는 비겁한 마음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막았다. -167-168쪽

불현듯 그녀가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있을 때 항상 느꼈던 자격지심이 되살아났다. 만신창이 낯짝에 닳고 닳은 싸구려 가죽점퍼를 걸친 자신이 마치 부랑자 같았다. 그냥 갈까?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248-249쪽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랫동안 혼자일 것이다. 낙엽이 흩날일 때면 어수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나무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사나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딘가로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325쪽

그녀의 말이 이어졌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미 다 나왔다. 그녀의 마음은 오래전에 그를 떠났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세월을 깨끗이 털러버린 것이다. 사실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그녀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지난 세월, 그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이 둘 사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마치 수프에 넣는 소금처럼.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427쪽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끔찍한 소식을 너무 많이 들어서 마음속에 더이상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물이 가득 새어 들어온 배를 가라앉히지 않으려고 마지막 방수 분리벽을 닫아놓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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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았다. 그다지 좋다고 할 일이 없다. 파트너는 자기 일만 무조건 챙기고, 그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는 점점 구겨지고 있다. 주말엔 자전거를 탈까하다가 헤이리마을 북카페에 가서 커피마시고 드라이브 하고 왔다. 그리고 젬베(나모리젬베숍)를 치러갔다. 서로를 보고 웃으며 최대한 힘을 주지 않고 가벼게 치는데, 그런 맑은 소리가 나다니, 나에겐 사용하지 않은 근육들 소리만 삐걱댔다. 강사는 오남용되고 있는 젬베에게 제소리를 들려주고 싶단다. 보고 듣기에는 좋지만 나에겐 맞지 않는 악기다. 소통하면서 다루는 악기보다는 혼자서 치는 피아노가 제격이다. 대부분의 악기들은 몸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서 다루지만 젬베만은 가장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모습을 봤다. 자연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보기가 좋다. 오늘도 동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타인으로 인해 쪼그라지고 구겨지고 속좁은 사람은 되기 싫다고. 누구는 아무것도 안하고, 누구는 죽어라 일을 하는, 그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손을 나누어줬는데, 그 정도의 일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는데, 왜, 나만 손해보는 느낌이 들까요라고... 지켜야 할 규정을 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만하나,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당당하게 일하고 싶으니까. 그 한사람을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느니까. 규칙을 정하여 하나씩 풀어가기로 했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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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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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릴 때는 가까운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빨리 달리면 뒤섞여 있는 것들이 또 뒤섞인다. 속도로 주변의 사물을 뒤섞는 것도 있다. 시간 같은 것, 자동차 같은 것, 혜성 같은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같은 것.-10쪽

한순간 그의 얼굴은 웃음 짓는 분칠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승부를 해오면서 희로애락을 초월한, 아니 희로애락을 철저하게 감추는 데 익숙해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100쪽

"충이나 효라 카는 기 꼭 젊은 아들한테마 안 통하는 기 아이라. 요새는 늙은이들도 그런 이야기는 싫어해. 돈하고 술하고 놀음이라는 말만 들으마 심봉사맨쿠로 눈을 번쩍 떠면서. 뭐 시속이 나쁘다는 기 아이고 역사를 자세히 보마 그 속에 있는 사람들한테서 한 분은 들어볼 진리가 있으이. 사람다움이라는 기 뭐냐. 그때 자기가 꼭 안 해도 되는데 나서게 하는 힘이 뭐냐. 이런 걸 어렵고 까시롭기 여길 거 없다."
"요새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싫어해요. 손가락 끝하고 눈꺼풀하고 입만 움직이려고 하는걸요. 아, 혀도, 끝만."-198쪽

친척이 있다는 것도 재산이다. 물론 그는 친척이 없다. 이 분야에도 가난이 그에게 적용된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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