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사람들은 계속 타고, 복잡했다. 기사님은 아주 조용히 다음 차가 바로 뒤에 올건데 등등 중얼거리며 천천히 운전했다. 2012년에 발급받은 면허에 관한 내용이 사진과 같이 붙여져 있었다. 다른 버스와는 달리 끼어들기도, 재촉하기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 애만 태우는 거 같았다. 그분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더 이상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책읽기도 이와 같다. 특히, 시 읽기는 집약적으로 축적된 새로운 경험들을 미리 맛보는 거다. 시를 읽는 게 이처럼 괴로울 줄은 몰랐다. 오감이나 오감을 통합한 감각을 사용하기 보다는 주로 시각에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옷을 벗고, 내부의 깊은 곳과 막 닿으려는 노력, 사물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의미 부여, 부여잡은 찰라를 생생하게 느끼고 싶은 순간, 이미 사라지고 죽은 그 차이와 간극을 최대로 줄이고 표현해 나가고자 노력하는 시인들을 철학자의 마음으로 읽었다. 그들이 표현한 언어는 생생히 살아 숨쉬어 답답하게 했다. 불편하게 했다. 차라리 경험하지 못했다면 불편하지 않았으리라.
오늘 아침 상황이 불편했던 것은, 대부분의 시내버스는 시간에 맞춰 시내를 질주하고 머리를 아무대나 디밀어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데려다 준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버스 안에서는 다른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기에, 하지만 운전자는 아직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했기에 자기만의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 시를 읽으면서 느낀 불편감은 경험이 좀 있다는 의미이고 시각을 떠나 오감을 연결한 감으로 읽으려 애썼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관계에서 관심과 유혹의 자세를 자동적으로 취하고 있는 나를 확인했다. 북콘서트를 연다는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시집을 낸 친구의 글에 아는 채를 했다.
시는 과거를 돌아보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게 하고, 현재를 반성하고 조금씩 나아지도록 힘을 준다. 미래를 꿈꾸며 다짐하게도 한다. 결국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소통이라는 연대를 통하여 "활동하는 주체(264쪽)"가 되어 단독적인 삶을 사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 휴유~ 읽으면서 짬짬히 기록할 필요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각각의 행간에서 더 많은 걸 느꼈는 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