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사유는 낮이면 낮이고 밤이면 밤으로 이분법적이고 논리적으로 작동하지만, 여성의 감수성은 모든 시간이 어느 정동의 밝음과 어느 정도의 어둠이 공존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이처럼 모순이란 바로 차이 혹은 타자와 공존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삶의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논리적이기보다는 애매한 것입니다. (79쪽)
내 자신이 타자의 타자라는 사실, 이로부터 바흐친은 우리 자신이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모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존재하는 나의 바라보기, 앎, 소유의 잉여는 세계 속에서 나의 위치가 갖는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18-119쪽)
누군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겁니다. 그러니까 "연애는 자유"라고 할 수 있지요. 문제는 님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진 나에게 님의 자유는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님의 자유에는 다행히 나를 사랑할 수도, 혹은 불행히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님의 자유`는 타자란 나로 환원되지 않는 그 만의 고유한 사유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184쪽)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아와의 다름, 그것이 바로 차이difference입니다. 그러니까 타자를 낯선 존재로 느낀다는 것은 그로부터 차이를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와 관련된 한가지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타자가 반드시 타인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풀도, 꽃도, 바위도,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타자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239쪽)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세계 혹은 타자들과 직접 부딪쳐야만 합니다. 설령 체제가 제공한 제스처를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계와 직접 부딪치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제스처가 나의 삶에 어떤 행복과 힘을 주는지 알게 될 테니까요. 물론 모방하고 있는 제스처를 시험해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흉내 내고 있는 제스처는 스펙타클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고,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기능을 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활동하는 주체"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붙어 있던 제스처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64쪽)
세계의 모든 것은 불가능한 교환, 그러니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겁니다. 들판에 핀 이름 모를 들꽃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한 줄기 바람도, 하늘을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도 모두 그렇습니다. 오늘 본 들꽃은 작년의 들꽃이 아니고 내년에 필 들꽃도 아닙니다. 지금 맞고 있는 한 줄기 바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솜사탕처럼 뭉글거리는 저 구름을 다시 보는 일도 아마 영원히 없을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단독적인 것, 그러니까 교환 불가능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단 한 번쭌인 소중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단독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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