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36-37쪽)

그는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자가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151쪽)

나이 마흔 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이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 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 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270쪽)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307쪽)

스토너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나이가 많아서 이상해 보이는 학생들은 열렬하고 진지했으며, 시시한 것들을 경멸했다.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한 그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스토너가 예전에 꿈꾸던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에 쏟으면서, 이제는 학자로서 자신이 해온 일을 통해 알려지기를 바랐다. (348쪽)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87-3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로에게 닿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

너의 거리와 관용으로 지금의 내 모습이건만. 어느 순간 나는 원래 그리 잘난 모습으로 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나의 됨됨이는 가족이 만들어 준, 너가 수용해 주고 공감해 줘서, 너를 만나 더 더욱 공글어지고, 조율되고 멋진 형태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걸 모르다니.

식물로 된다는 것,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온전히 자기만의 세계로, 더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 함께 있어 외로움보다 혼자의 외로움이 훨씬 편하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 부부의 세계가 보였다. 여즉,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세계. 그렇다고 어느 누가 먼저 다가가서 이해하려고도 안한다. 어쩜 다가가는 방법이 서로 달라 모를 수도, 아니다. 그거 보다는 각자의 눈높이로, 욕구대로 뭔가를 열심히 했을 게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간격이 좁혀지는 게 싫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과 이유를 끊이없이 오랫동안 밝혀왔다. 이제는 서로의 그마저도 너무 속속히 알기에 지금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만난 지 40년이 지나는 요즘이 최고로 편안하다. 아들 왈, 파더는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지속적으로 몸이나 말로써 표현하는데, 마더는 끝까지 안보고 모른척하고 있다는 것. 눈 앞에서 창과 방패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남편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인물 값을 못한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 인물이었기에 깡촌에서 너를 만났다고 혼자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여자의 열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ㅓㅇ던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낫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8-29쪽)

꼬챙이로 붕어빵 틀을 들출 때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 있는 물고기들을 아이는 지느러미 끝을 잡고 끄집어냈다. 아직 희긋한 붕얻르의 뚜껑은 도로 덮어놓았다. 태어나려면 그 뜨거운 틀 속에서 더 견뎌야 했다. 옆앳것들과 똑같이 견디지 않고는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75-76쪽)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하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것이 괴로와서 엄마는 이 마음을 버렸을까, 그래서 우리 둘을 떠나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98-99쪽)

나는 타인의 그것처럼 그의 흉터를 보았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듯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았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의무와 책임과 방기, 진실과 거짓 따위가 내 눈앞에서 경계선을 무너뜨려갔다. 나는 그 혼란에 더 이상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간격이 나를 구해주었다. (135쪽)

낯선 사람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소요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197쪽)

재미있는 책을 읽다 보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책과 읽는 사람만 남듯이, 그는 오로지 혼자서 세계와 마주해 있다. 그 순간 세계는 광활하지도 복잡하지도 불가해하지도 않다. 손아귀에 잡히는 말랑말랑한 육체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다. (236쪽)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몸속에 미처 상상 못 했던 기억들이 들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감정에 육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후회나 슬픔, 분노는 물론 사소하고 자질구레해 보이는 감정들에까지 구체적인 생김새와 감각이 있었다. (283-284쪽)

그것이 어떤 여행이었든, 장기간의 여행이 끝난 뒤 식당에 둘러앉은 일행은 대체로 말이 없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던 때의 크고 작은 흥분과 두려움 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요. (중략) 마치 산다는 일이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듯이. 아무도 과장되게 웃거나 짜증 내거나 농을 던지거나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하지 않습니다.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 소리, 후루룩 국 넘어가는 소리, 깍두기나 열무김치를 씹는 소리 들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조용히 섞일 뿐입니다. (337-338쪽)

아무거나 들쑤시거나 캐어내서는 안 돼. 들쑤시고 캐어내지 않은 그 뜨거운 불길들이 어느 사이에 열기와 숨막히는 황냄새를 버리고 순연한 빛 덩이로 떠오르도록 하는 거지. 고통이 뷰파인더와 내 몸둥이를 관통해 맑은 슬픔이 되는 절차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격렬한 마음이 차츰 슬퍼지고, 애절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스러워져서, 어느덧 당신으로부터 묵묵히 떠나갈 것처럼. (3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간의 선택과 과거의 인연.

짧은 망설임으로 이 후의 삶은 헝클리고 무너뜨려지고 무너진 순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이 전의 인연과의 연결점에서 현재를 직시하게 된다. 동그라미가 맴돌 듯 서로는 중첩되어 영원히 관련되어 있다. 그 주저주저가 이 후의 삶을 고단하게 하기도 하나, 이 모든 결과는 너가 아니라 너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 변했다고, 나의 선택의 결과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애써 말하자면 꽤 괜찮은 선택지도 있었고, 결과를 두고 말하다보니 그렇다. 되돌아간다면 누군가가 그립고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당시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나의 청춘, 나의 푸릇푸릇함, 앞에 펼져져있는 많은 선택지를 마주하고 있는 내가 그리울 뿐, 하지만 그때도 지금의 결과를 가져오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주인공들은 말한다. 주인공들의 통찰, 비록 때늦긴 하지만, 대단하다. 나의 변화, 즉 우리사이의 전제가 사라지니, 너의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있을 법한 일들을 무늬만 다른 형태로 동심원을 그리며 서로 연결되고, 세련되게 우리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생각이 많고 관념적이다. 온종일 카페에서 읽었다. 

*늘상 코미디를 다큐로 받아 들이는 나의 태도.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 못하고, 유머를 제대로 이해못하고, 눈치까지 없으니, 진지하다 못해 자못 심각하다. 그래서 소설읽기가 어렵다.   



*뒤를 돌아보면서 / 박노해

 

나이가 드니 안녕이 참 많군요

안녕이란 말이 참 무서워지는군요

 

가면 갈수록 사랑이 오기보다

이별이 더 많이 걸어오는군요

 

나이가 드니 뒤를 돌아보는 일이 많군요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도

뒤를 돌아보면서 앞을 바라보는군요

 

그대와 나,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뒤돌아봐요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어요

 

나와 함께 걸으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게 보기 좋았어요

그때도 그랬듯 난 특별히 해줄 게 없네요

 

나에겐 그래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어,

생을 건 약속이 하나 있어 앞을 바라봅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지 마,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35쪽, 밝아지기 전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할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특히 아버지와-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49쪽, 회복하는 인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만나온 인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젠 알 것 같다. (96쪽, 에우로파)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117-118쪽, 훈자)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153-154쪽, 파란 돌)

가진 건 없지만 걱정도 안 되고, 생활이 단순하니까 마음도 편해......난 아마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십대엔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만 들어 있었거든. 직장, 저축, 집, 가족, 나이에 어울리게 가져야 하는 그런 거. 하지만 이젠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187쪽, 왼손)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느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생략)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216쪽, 노랑무늬영원)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지낟.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져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234쪽, 노랑무늬영원)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284쪽, 노랑무늬영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