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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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50쪽)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수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형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173쪽)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획.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첬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213-214쪽)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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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가을이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는, 일어난 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그래도 산사람은 살아야지, 누가 정답을 알겠어. 미친 놈이 있다고 다른 길을 알려 주는 놈이 그 미친 놈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같다. 그저께는 중요한 약속이 엇갈렸다. 이층을 일층으로 착각해 한참을 기다렸다. 차가 밀리나보다... 서로 각자의 층에서 기다리다 만났다. 기다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로 맞춰보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러나 입속에 두었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서로에게 다를 수 있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더위는 여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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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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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취를 하면 인간은 그때 그냥 죽는 거야. 문서를 복사하면 열화가 일어나듯이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일종의 복사물인 거지. 도마뱀의 꼬리도 잘리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원래 크기로는 자라지 않는다잖야." (12쪽)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에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몸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에요. (39쪽)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드닞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92쪽)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끈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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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를 불안정한, 몸은 또 한번의 갱년기를 맞이하는 것 같고, 마음은 허둥대며 흔들리고 뿌리가 뽑히는 것을 보고 있는, 머리맡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빤히 보고 있고, 가방에서 들어있는 책도 있는데, 스도쿠만 계속 하였다... 그토록 잘되던 집중은 어디로 갔는지... 주말에는 명상관련 연수도 갔건만, 명상이라는 일반적인 편견이 여지없이 깨진 경우였다. 사이비 집단같은, 이것도 편견일까... 이리저리 치이고 정리가 도무지 안되는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생각들- 마음으로 '고민하는 힘'을 펼쳤다.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가지고 고민해야 될 것을 저자가 알려주었다. 삶의 노하우나 정답이 아니라 방법을 알려준다. 매순간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늘 늦게야 알게 된다... 이미 선택지를 정해 놓고 그쪽으로 고민해 나가는 상황에서 괜찮은 결과와는 한참 동떨어질 수 있다. 늦게 안다는 것은 후회를 동반한다는 의미일건데, 선택과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과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결과의 종류 또한 나에게만 보다는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라면, 그런 상황이 얼마나 자주일까마는... 그냥 제목에서 큰 의미를 얻는 정도에서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글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이 책에서는 '늙어서 '최강'이 되라'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나이들어 저자가 버킷리스트로 하고 싶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그 이면에는 '뻔뻔함'이라는 태도가 있어서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보니? 점잖과 타인의 시선보다는 이러한 뻔뻔함이 필요할 수도. 이때껏 하지 못한 것을 해보는 것도. 생각해 본다, 나의 버킷리스트... 어쩌면 타인의 시선보다 스스로가 만든 벽이 너무 높고 넓을 수 있다. 그 누구의 시선은 잠깐이면 그만인데... 스스로에게 뻔뻔함을 허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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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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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따르지 않고 각각 ‘고민하는 힘‘을 발휘해서 근대라는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했습니다. (26쪽)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39쪽)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사용하고, 그러면서도 돈 때문에 마음을 잃지 않도록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너무 평범할까요? (62쪽)

‘인간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를 묻는 물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77쪽)

인간의 자아 속에는 즉물적 지의 측면도 있고 원초적 생각과 감정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모여 형성된 것이 자아입니다. 본래 청춘은 타자와 미칠 듯이 관계성을 추구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연한 생생함은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87쪽)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정념과 같은 것은 사전에 잘라낸, 또는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습니다. (90쪽)

사회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집합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동료로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한 수단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비로소 ‘거기에 있어도 좋아‘라는 인정을 얻게 됩니다. (118쪽)

‘인간적인‘ 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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