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바쁘다...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쓸까 짜느라... 후다닥하고 아침이었다... 집안까지 봄이 들어와있다.
때로 사랑은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을 더 허기지게 하는가.-22쪽
이 거리의 바깥으로, 삶의 표면으로 걸어나갈 수 있긴 할까. 이제 돌아가면 어떤 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고, 어떤 것이 내가 실제로 걸어본 아바나의 거리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 같다. -41쪽
약한 곳, 눌린 자를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 때문이었다. 의대생에서 게릴라 대장이 된 이 얼음과 불의 사내에 대해서 잘 폴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했다던가.-89쪽
이파리를 가시로 바꾸며 저 선인장들이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듯, 산다는 건 어차피 무언가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던가.....-128쪽
생의 한가운데 지점에서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기억과 추억만으로 나머지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163쪽
실수로 스텝이 엉기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실수로 넘어지면, 그게 바로 삶이라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눈먼 퇴역장교 알 파치노가 실수를 두려워하는 젊은 여성과 탱고를 추면서 들려주는 대사다.-169쪽
여행이란 제 마음속의 환상을 찾아가는 것. 환상의 속성이 그러하듯 대개 여행지에서 우리는 짐작과는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209쪽
사람들은 늘 자신의 삶을 프리즘으로 하여 하나님을 해석한다. -218쪽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나는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아니야, 그건 목소리는 아니었어.말도, 침묵도 아니었어.하여간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어.밤의 가지에서,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파블로 네루다 「시(詩)」중에서-252쪽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이며,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라고 스스로 냉소하며 생을 환멸하던 이 사내는 그러나 다시 희망에의 유혹에 빠져든다. -276쪽
올듯말듯 하면서 봄은 또 뒤돌아 간다... 그러나 나뭇잎은 조금씩 초록으로 물들며. 목련, 개나리, 벛꽃은 나보란 듯 활짝 폈다. 눈을 들어 보기만 하면 된다.
휴유... 즐겁게 바빴다... 피곤하다... 어느새 졸고 있었다.... 낮잠을 자고 나니 밤이다.
노릇과 버릇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낯선 자아를 '아주 특별한 손님'으로 공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릇이라는 사회적자아persona의 변덕스러운 교체가 아니라 버릇이라는 완악한 몸의 체계를 바꿔 얻는 생활의 새로운 벡터와 그 정향을 통해서 체계의 욕망들을 넘어선 희망을 일굴 수 있을 것이다. -35쪽
인문人文은 인문人紋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를 뜻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42쪽
자신의 존재가 딛고 선 자리를 살피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피는 일의 극적인 전형이 공부라면,(하이데거나 김우창 등의 말처럼) 공부란 결국 바닥없음 Bodenlosigkeit을 살피고 견디는 버릇이다. -77쪽
변덕은 허영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허영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분열의 일종이므로 그 분열 속에서 변덕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허영의 주체는 그 주체의 허약성을 가리기 위한 전술로서 변덕에 호소할 수밖에 없고, 간혹 그 변덕이 먹히지 않을 경우에는 냉소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영과 변덕과 냉소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90쪽
자신에 대한, 자신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거짓말이 어느덧 진지해지면서 내면화되면, 그것은 '허영'이 되고 그는 속물이 된다.-98쪽
진실은 인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정의 문제, 혹은 용기의 문제가 된다.-151쪽
내 삶으로부터 영영 사라져버린 대상의 의미를 새삼스레, 애달프게 깨치는 일도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그 상실의 사건을 통해 내 자신이 변화한 것을 체득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만큼 더 소중한 체험이 된다.-210쪽
자네Pierre Janet의 지적처럼, "외상적 상황이 만족스럽게 청산되려면 행동의 외적 반응 뿐 아니라 내적 반응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결정한 어휘로써 그 사건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고 이 설명이 개인사의 한 장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232쪽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장정일, [보트 하우스])-256쪽
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나가면서 더불어 이루는 호혜의 합작合作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300쪽
사람무늬人紋의 섬세함과 그 무늬들의 이치인 일리一理의 복잡성, 더 나아가 수많은 일리들이 생태이치적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섭동攝動의 미묘함을 글, 말, 생활 그리고 희망 속에서 부지런히 톺아보며 부사 같은 대화, 부사 같은 글쓰기, 부사 같은 걷기를 실천하는 '부사적 지식인'은 부사라는 메타적 틈새를 응용하여 사람무늬가 지닌 총체적 가능성을 조형해나갈 수 있다.-3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