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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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진 언어는 하나의 몸이며, 살아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의 얼굴은 말이며, 신진대사는 언어학이다. 그리고 이 피조물의 집은 발화된 것일 뿐만 아니라, 발화되지 않은 것이기도 한다. (8쪽)

풀에서 나오자마자 그 잎을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종이 한 장에 나무 전체와 가까이에서 본 나뭇잎 한 장을 함께 스케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단풍나무의 유전자 코드에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계속 수영을 하며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그건 일종의 사탕단풍나무의 텍스트가 되는 거라고. 그런 텍스트는 말없는 어떤 언어에 속한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말이다. (54쪽)

노래에는 노래만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이런 끈질긴 희망이 없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빠르기, 박자, 반복음, 그렇게 반복되는 음악은 선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안식처를 구축한다. 그 안에서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가 서로를 위로하고, 자극하고, 비꼬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하는 그런 안식처 말이다. (73-74쪽)

최근에 프랑스 대통령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거의 세 시간 동안 국민을 상대로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담론은 대수학 같았다. 그러니까 논리적이고 인과관계가 정확했지만, 손에 잡히는 현실이나 삶의 경험과는 거의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 그의 연설이 왜 공허했던 걸까. 왜 연설이 약어들만 모아 놓은 독백처럼 들렸을까. 그건 그가 역사에 대한 그 어떤 감각도 저버렸기 때문이며, 그 결과 장기적인 정치적 전망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하루하루 먹고 살고 있다. 그는 희망을 버렸다. 그래서 대수학이다. 희망이 정치적 어휘들을 낳는다. 희망이 없어지면 단어들도 없어진다. (87쪽)

오늘날 살아 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래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살아 있는 경험, 혹은 무언가 되어 가는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 심지어 옛날 노래라고 해도 가능하다. 왜일까. 노래가 자족적이기 때문이며, 노래는 역사적 시간을 두 팔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88쪽)

우리는 그 그림 안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본다. (중략) 이번 그림에는 열두 블록 정도 되는 지역을 덮고 있는 커다란 책이 그려져 있다. 책은 은빛 구름처럼 가볍게 빈민가 위를 떠다닌다. 나는 톰 웨이츠Tom Waits의 노래를 떠올린다.
모두들 동시에 말을 하지
누군가에게 힘든 시절이
누군가에겐 달콤한 시절이라고
거리에 피가 뿌려지는 때에도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겠지
모두들 동시에 말을 하지.
책 속의 페이지들은 그 아래 사람들의 삶들이 담긴 페이지들이다.
(중략)
색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중략) 한 조각의 파란 하늘, 아파트의 작은 발코니에 정성껏 내놓은 화분에서 핀 꽃들, 상점의 진열장에 걸린 밝은 색상의 옷가지들. 그림 속의 색들은 마치 야유하듯 웅얼웅얼 속삭인다. (100쪽)

자연의 외먕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일이 가능할까. 그 작업에서 신비스러운 면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어떤 에너지가 지닌 서로 다른 리듬과 형태에 반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몸의 활동이었다. 나는 그 리듬과 형태들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어떤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라고 상상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텍스트의 흔적을 쫓는 동안 나는 내가 그리는 대상과 한 몸이 되었고, 그것들이 씌어진 언어, 한계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모국어와 하나가 되었다. (104쪽)

좌파든 우파든 정치인들은 마치 현재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논쟁하고, 투표하고, 해결책을 의결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하는 담론은 공허하거나 보잘것없는 일들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용어들-이를테면 테러리즘, 민주주의, 유연성 같은 말들-은 그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중략) 헛소리들. 지금 우리에게 폭탄처럼 퍼부어지는 정보의 또 다른 장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화려하고,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략) 그 사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사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그것들은 삶의 위험요소를 보란 듯이 제시한다.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중략)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105-107쪽)

그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 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 축소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 주변의 지구는 과열되고 있다. 전 지구의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사이, 다수는 못 먹거나 정크 푸드에 의존하거나 굶주리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살마들이 아주 빈약한 생존의 희망을 품은 채 이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작업장의 환경으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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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 제목에 끌려 구매한 책, '글 쓰는 여자의 공간'은 여성 작가 35인이 어디에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글을 썼는지 소개하는 글이다. 여자로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동행자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었던 시대 등, 대체로 악 조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이제껏 읽은 그녀들의 글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녀들이 글을 쓰는 목적과 공간은 다양하다. 그녀들이 글을 쓴 공간은 어디든 간에, 치열한 삶의 공간이자 치유하는 곳이었다.   

동양인은 없었다. 아직도 동양에서 글쓰기가 서양보다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한강이 있었더라면,,, 아쉬웠다. 

저자의 바램처럼 작가에게 친숙함을 느끼고 나아가 그녀들의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은 생겼다. 추 후 읽기 위해, 몇몇 낯선 작가들의 작품도 메모했다.

어린 시절, 앉은뱅이 책상에서 책 읽고 공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 쓴다고 원고지와 고군분투했던 기억까지,,, 요즘은 침대 프레임에 기대어 책 읽는 게 마냥 좋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산다는 거다. 자고 싶을 때 잠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책 읽고 싶으면, 책 읽으면 된다. 이 책을 보든, 읽기 싫으면 덮으면 된다. 그녀들이 그리 힘겹게 쓴 글을 이리 싶게 읽어도 되나, 싶지만.

35인 각자의 이야기를 짧게 나마 쓰고 싶지만, 책 속에 밑줄 긋기로만 남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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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작가 35인, 그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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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가 글을 쓰던 부엌 식탁이 나의 첫 책상이었다. 몇 차례 이사를 거치면서 책상으로 쓰는 식탁도 여러 번 바뀌었다. (중략) 침대는 친구가 와서 자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자기도 하지만, 책상은 오직 나만의 공간이었으니까. (11쪽)

여러분들은 이 책을 통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몇몇 여성 작가들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나는 이 책에서 작품 해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독자들이 작가에게 친숙함을 느끼고 보편적인 인식을 갖고 나아가 작가의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려고 노력했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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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가 읽혀진다. 

사람의 관계도 그렇지만, 삶의 방식과도, 누구를,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결론에 이르지 못했을 때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잃은 건 없고 모든 게 공부가 된다(176쪽)고는 하지만, 시간도 사람도 열정도 감정도 등등 많이 많이 잃게 된다. 어쩌면 그리하여 공부가 되기도 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금씩 배움이 쌓이고 있는 중일까... 아님 사랑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걸까...

'다 하지 못한 말'은 한 여자가 진한 사랑을 한 후, 제대로 된 작별을 고하지 못한(208쪽) 말이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그 남자가 하지 못한 말도 듣고 싶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김윤아 '다 하지 못한 말'

그저 스치는 바람인 줄

그저 지나가는 떨림인 줄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듯이 그저 그런 줄 

아직은 아직은 아니길

조금만 이대로 그 곁을

다시 날이 차도 지금 이대로

그 마음 안을 수 있기를

계절은 어느 새인가

이별을 향해 가고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말해주오

아직 다하지 못한 그 말을

계절은 어느 새인가

이별을 향해 가고

돌아봐도 돌아보아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말해주오

아직 다하지 못한 그 말을

아직은 아직은 아니길

아직은 아직은


* 유해준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닿을 듯 내 손끝에 꿈을 꾸고 있지만
그대가 곁에 함께 있어요 이 순간
따스한 그대 숨결을 느끼죠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변해서
나의 눈이 가슴이 기억할 수 없지만
영원히 나의 가슴에 남아 있겠죠
아름다웠던 그대의 추억이
나에게 늘 한 사람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
세상이 다 변해도 우리 사랑 영원히
다하지 못한 그 말
다해도 다 할 수 없는 말
그댈 많이 사랑합니다
그리워하며 힘들었던 날들에
매번 울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도
언제나 비워질 수 없었던 단 하나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었죠
나에게 늘 한 사람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언제나 내 마음이 그대 곁에 달려가
다하지 못한 그 말
매일 같이 하고 싶은 말
그대만을 사랑합니다
나에게 늘 한 사람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
세상이 다 변해도 우리 사랑 영원히
다하지 못한 그 말
다해도 다 할 수 없는 말
그댈 많이 사랑합니다
그댈 많이 사랑합니다


덧붙여, 드라이브하는데 들리는 노래, 비비 '밤양갱'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잠깐이라도 널 안 바라보면
머리에 불이 나버린다니까'
나는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하려던 얘길 어렵게 누르고
'그래 미안해'라는 한 마디로
너랑 나눈 날들 마무리했었지

......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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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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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 나를 위해서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것대로 또 얼마나 쓸쓸할까. (114쪽)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가능하기나한가? (121쪽)

"많이 힘들었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무게게 어깨에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중략)
"어떤 괴로움도 공부가 돼요. 잃는 건 없어요." (173쪽)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연의 고통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거라고들 하더라. 오히려 그 속에 푹 침잠해 영원해 보일 것 같은 슬픔에 몸을 맡기고 자기 연민이든 상태를 향한 원망이든 질릴 때까지 붙들고 가라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바닥을 쳐야 비로소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고.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모른 척, 못 본 척하면 그 상처에선 계속 피가 흐르게 될 거라며. 말은 그럴싸했어. 하지만 그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다 떠안는다면 나는 가루처럼 부서져서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일단 도망가야만 했어.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당장 흘려보내는 일이 시급했어. 시간의 힘 말고는 믿을 것이 없었어. (187-188쪽)

나는 당신에게 제대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208쪽)

깊은 상처는 오직 내가 깊이 사랑했던 사랑만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글이 쓰고 싶어진다. (211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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