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글을 이리도 맛깔나게 쓰셨을까,로 번역했다. '맛깔나게' 단어 속에는 그 간의 저자의 희.노.애.락이 다 녹아있다. 희노애락의 큰 스펙트럼 안에 잘디잔 감정들을 아프게 느끼면서, 원문과 가장 유사한 번역을 위해 살아온 저자의 노고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잘 사는 삶이란, 나의 말을, 감정을, 행동을, 더 나아가 타인의 말들, 감정들, 행동들에 대해 번역을 잘 해야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
일방적이든, 주고 받든, 말과 감정과 행동은 서로 교차되어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내게 맞는 말로 번역된다.
나의 수준과 기분에 따라 번역되는 말은 원문과는 동떨어질 수도 있고, 더 넘치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와 이해가 난무하여 다시 볼 수도 있고, 다시는 안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 나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아끼는 엄마의 말조차 믿지 못하니, 애초부터 우리는 오역하며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을까, 오역의 크기를 줄여가는 게 삶의 과정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90쪽 'I'm not defined by you(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이 원문이니까, 나는 내가 정의하도록 하고, 굳이 의견을 듣고 싶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의 말을 듣자.
*144쪽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를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감각을 놓치지 말자.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라면 먹을래요(라면 먹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