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안 베르는 루게릭 병이 자신을 잡아먹는 시간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내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생의 마지막을 선택한 그녀의 마지막은 여름이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미래를 도모할 수 없고 희망이 없다. 불능과 의존만이 있다. 

그녀의 시간은 정지되고, 손자들은 어른이 되고 계속 나이를 먹겠지만 자신은 영원히 쉰아홉 살로 남게 된다는 것, 현재형만 있다는 것, 언니가 눈 앞에 있지만 손이 아니라 시선으로만 꼼꼼히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촘촘한 바늘 땀으로 맺어진 인연을 풀어헤쳐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시무시하고 늘임표가 찍힌 슬픔을 느낀다는 것, 그녀처럼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는 없을 거다. 

얄밉게도 나는 그녀의 글에서 깊은 안도와 위로를 받는다.

생각해 볼 것은, 죽음을 타인에 의함이 아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그에 앞서 남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의 의무로 해야 된다로 확장하여 생각해 본다.   

번역도 참 잘하셨다.  

약속이 있어서 생각이 모이지 않는다.

[나의 마지막은, 여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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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은, 여름
안 베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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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차라리 자아의 가장자리에 끼워 넣은 문학같은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침묵의 경계에서,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의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초월한 것을 말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고 있다. (25쪽)

병원에서 얘기를 듣고 온 날 저녁, 나는 어떤 말도 함께할 수 없다. 그 누구하고도, 그럴 수 없다. 그럴 마음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은 침묵뿐이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다른 곳에 있다. (47쪽)

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바를 다했다. 몸과 영혼이 온전한 한 덩어리였다. 하지만 이제 한쪽이 다른 쪽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중략)
나는 몸과 루게릭이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치는 이 삼각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몸은 팔려가 루게릭의 앞잡이가 되었다. 내 삶 전체가 고꾸라졌다. (63쪽)

아직은 죽기 전에 차를 몰아 달리고 싶다. 아무 생각없이 오가고 싶다. 나는 이제 완전히 남에게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다. 실현할 수 없는 나의 욕망은 반쯤 죽은 여자의 딱하고 가망 없는 환상일 뿐. (73-74쪽)

나는 손이 아니라 시선으로 꼼꼼히 언니를 어루만진다. (93쪽)

우리는 밤 산책을 한다고 쏘다니고 많이 웃는다. 조금 있으면 죽을 사람이라고 웃지 않을 수 있나? 마지막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난다. 무시무시한 슬픔이 나를 짓누른다. 이 정도의 슬픔은, 이렇게 늘임표가 찍힌 슬픔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98쪽)

내가 탁구를 칠 수 없다는 현실을 아직까지도 못 믿겠다. 어떤 활동에도 나는 참여할 수 없다니 믿기지 않는다. 정말 별것 아닌 활동조차도 말이다. (108-109쪽)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과연 넘어가지는 할까?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막 그 순간이 존재하기는 한가? 이승으로 돌아와 알려줄 이, 아무도 없다.
죽는다는 것을 사유하기. 그건 과감하게 이러한 이미지들을 털어내는 것이다. ‘죽다‘라는 동사를 신체의 작동으로만 이해할 것. 그냥 불을 끄는 스위치 비슷하게 생각하고 아무것도 더 갖다 붙이지 말 것. (123-124쪽)

내가 자유로운 정신으로 내 입과 손과 팔과 다리를 모두 써서 사랑을 나누었던 마지막 때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실감은 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껴안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할 수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팔을 들어 그들의 목을 뜨겁게 끌어않았던 때가 언제였더라. 하지만 이게 낫지 않나? 딸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때 ‘이게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지막이라는 자각은 다 끝장안 사람의 절망만 맛보게 하든가, 우울감이나 회한의 맛을 남길 뿐이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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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달력을 보니 오늘 하루가 더 숨어있었다.


아그네스 발차가 부르는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 노래를 반복하여 듣는다 : Agnes Baltsa 'There wi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노래 제목을 달리 보면 와 닿는 의미가 완전 다르다. 고통이 팬던트처럼 목에 걸려 있지 않도록 자신을 깨우치라는 가사가 있다. 


사진 시집, [아직 거기 있었구나]에서는 사진과 시가 각각 부족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둘 다 있어 채워지고 보완되고 있지만, 책으로 내야 할 정도로 완벽하지는 않는 것 같다. 순전히 책 제목에 이끌려 펼쳤다.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 늘상 있어 당연한 것들, 사라지지도 가버리지 않고 아직도 거기에 있는 것들이 마음을 헤집고 다닌다. 요즘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데, 예전 일은 오래도 남아 있다. 

산불로 모두 잃어버린 이재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보탠다. 나비 효과를 믿어본다. 

3월 31일이 있었구나,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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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거기 있었구나
김상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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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기

바람 한 줄기와
한때의 봄비
또 다른 날의
햇살 한 줌이면 됩니다. (27쪽)

우포

수억 년 전부터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 (48쪽)

섬 사이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생기고 나서도
섬은
섬에 닿을 수 없다. (65쪽)

기다리기

희미하기 때문에
갈망하는 것이 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다

그 마음, 잔잔해지길 바랄 뿐이다. (103쪽)

많은 나에게

너의 몸을 좀 쉬게 해
(중략)

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또 아주 오래까지 있을 거야
그리고 하루는 그치지 않을 거야. (137쪽)

하루

행과 행 사이를
행간이라 부른다

행간에는 말로 하지 못하는
더 많은 말들이 숨어 있다

안녕이라는 말과
안녕이라는 말 사이에
하루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말은 흔들려도
행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158쪽)

중독

검은 표면이 아름답게 보였다
진주같이 반짝였다
세상의 모든 빛을 감출 수 있는 듯
어둠으로 가득했다. (200쪽)

벽들은 눈물의 색깔

벽이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습니다.
(중략)

오래된 벽돌에는 담쟁이가 자랍니다
벽이 흘린 눈물을 먹고 담쟁이가 커 가기 때문이지요
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이쪽저쪽을 갈라놓아야 하는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다름을 견뎌야 하는 벽이기에
눈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그 다름의 편견으로 담은 더 높아지고 견고해져서
담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되어 버리니까요
사실 눈물은 진실이 아니라 위장인지도 모릅니다
(생략)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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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 나오는 문장들을 모두 옮겨 적고 싶다.

첫 번째 문장만 적어본다.  

'나는 거의 팔십 년 간 글을 써 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 글쓰기 활동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 활동 덕분에 나는 의미를 찾고,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는 더 깊고 더 일반적인 무언가에서 파생되는 것일 뿐이다. 그 무언가는 바로 우리가 언어 자체와 가지는 관계다. 이 짧은 글의 주제는 언어다(7쪽).'


존 버거는 '언어는 하나의 몸이며, 살아 있는 피조물이다(8쪽).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하는 언어적, 비언어적 부분을 텍스트로 끄집어 내어 알게 해 준다. 


존 버거는 채플린 몸짓, 사랑단풍나무, 새털, 다육식물, 나뭇잎, 바다로 가는 장어, 노래, 사진, 누군가의 대화, 그림, 정치가의 연설, 담론 등에서 한 번도 말해진 적 없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페르소나를 벗게 만든다. 말이라고 다 동일하고, 진실의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본인조차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도 있으니...    


특히, 드로잉으로 표현한,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 낸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좌파든 우파든 정치인들의 의도도 알았다. 최근 산불로 피해 입은 지역에서 '사진 찍으로 왔제?'하는 주민의 말과 불편함 줄까 찾아 가지 못한 정치인이 진실되고, 본질적으로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정치를 하길 바래본다.

이러한 와중에도 존 버거는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며, 역사로부터 알 수 있는 텍스트들이 현재에 희망을 준다고 한다. 


요즘 대화할 때, 타인의 눈과 의도를 거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 보면 그 사람이 자라 온 환경, 부모, 배경 전체를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언어는 하나의 몸이 되며, 살아있는 피조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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