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llir‘, 이 동사는 뭔가를 행하는 것인 동시에 행하지 않는 것, 실패인 동시에 아무것도 심지 않는 것이다. (11쪽)
베케트의 저 유명한 문장을 어찌 인용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가. 더 낫게 실패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하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명령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더 낫게 실패하라니? (19쪽)
번역은 실패의 명문 학교다. 프루스트 말마따나 질투가 사랑의 진실인 것처럼, 번역이 문학의 진실일 수도 있다. (33쪽)
카프카의 작품은 미완으로 얼룩지고 결함에 침식당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진 채로도 그 필사적이고도 견실한 노래로 감동을 준다. 그 노래는 글쓰기를 불가능한 구원을 연결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실패를 삶과 연결한다. 다른 작가들이 보잘것없는 성공에 만족할 법한 지점에서 카프카는 멋지게 실패해 낸다. (중략) 이 실패는 창조의 조건이다. 카프카는 실패에 저항하여 글을 쓴 게 아니라 실패와 더불어 썼다. (94쪽)
페소아는 습관의 인간이었다. 글쓰기만이 중요하고, 자신이 정해 놓은 작업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두려워하고 보는 인간,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정부, 도시, 가까운 이들마저도. (140쪽) 물론 이명異名 문제도 페소아가 자아를 고정하고 목소리를 통일할 수 없도록, 나아가 그럴 능력이 없었음을(거부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인물로 이루어진 이 놀라운 파편화는 불안을 자아내는 그의 근본적 공허를 내보인다. 만약 그가 여러 명이라면 한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141쪽)
자기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실패이지만 타자들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실패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페소아는 이 두 가지 실패의 마찰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작품, 끊임없이 폭발하여 재구성되면서도 안정된 작품, 믿을 수 없는 다면체의 광시곡을 창조할 수 있는 거의 초월적 힘을 끌어냈다. ([불안의 책]은 그 뚜렷한 증거다. 페소아는 이 책에 최종적 형태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어 번역본만 해도 판봉이 네 가지나 된다.) 페소아의 다극성 무기력은 사실 놀라운 폭발력을 지닌 엔진이었다. (151쪽)
콕토는 모든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중략) 실패의 미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미학이다. 실패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미 졌다. (중략) 콕토의 실패는 실패감과 분리되지 않는다. 혹은 콕트의 경우는 실패감이 실패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현실적이라고 하겠다. (중략) 그렇다면 이 끝없는 실패감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실패는 어떻게 미학을 정초할 뿐 아니라 콕토처럼 이름난 작가가 가장 잘 간직한 비결이 되었을까? (중략)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이름깨나 날리는 동료 예술갇르과 어울리면서 더욱 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콕토는 일종의 삐뚤어진 질투에 시달렸다. 그는 프루스트, 피카소, 주네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 것이다. (159-161쪽)
그렇지만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때로는 댄디즘에 매몰되며, 때로는 유행에 호되게 두들겨 맞으며, 세상이 가볍게 여겼던 콕토는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콕토는 실패의 불안정한 미학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과격한 경계와 유행의 조롱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 시대의 천재가 되기를 원했으나, 언론과 동료 예술인들은 그를 재주 좋은 광대, 뛰어난 제작자, 변덕스러운 도깨비 역에 한정시켰다.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시 중 하나인 [레퀘엠]을 쓴 콕토는 그의 방어적 교만으로 인하여 사교계의 잠자리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실패는 이 현실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68쪽)
읽기를 배우는 것과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말하자면 극과 극이다. (중략)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깨닫는다. 나는 나를 만나러 오는 것, 내게 닥치는 것을 여전히 읽을 줄 모른다. 이것이 시의 아주 위협적인 장점 중 하나다. 우리를 다시 한번 텍스트에 부딪히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 (186-187쪽)
실제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중략) 그렇다. 의미는 결코 떡하니 주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부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페이지를 마주한다. 우리는 읽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우리는 말이 이해력의 세상을 버리고 떠났는지, 아니면 우리가 말의 마법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카프카의 말마따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파고들기에 실패한 것은 페이지와 우리 가운데 어느 쪽인가. (202쪽)
그래서 나는 기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면서 실패한다. 완전히 제로도 아니고 제논을 추종하는 거북이처럼 모든 행에서 하나하나 축적해 간다. 그렇지만 텍스트 앞에서 - 행 앞에서, 시구 앞에서, 페이지 앞에서 - 좌초할 때도 텍스트를 읽으면서 읽지 않는 때만큼은, 혹은 그 이상으로 배우는 바가 있다. 텍스트는 펜 가는 대로, 오직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중략) 저항하는 책 안에서 버티는 것도 의미가 단어들의 지평 너머로 저물어 버린 때에 황혼의 횡단을 경험하는 것이다. (205쪽)
꿈꾸던/ 원하던/ 생각했던 책의 실패야말로 그 책이 구현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 무능 혹은 불가능성이야말로 기회라고 나는 믿는다. (선택은 아니지만!) 책은 혼란스러운 충동들의 소굴에서 태어나 생생한 이미지들을 먹고 자라며, 의도 혹은 상상의 부양을 그럭저럭 받지만 우연성의 불가피한 시간을 마주하는 것은 오롯이 책 자신의 몫이다. (239쪽)
실패하고자 노력하기 (중략) 글을 쓴다는 것은 실은 글 쓰는 방법을 모르면서 인생을 바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글을 쓴다고 믿으면서 필사했따. 그들을 추종한다고 생각하면서 모방했다. 계속 쓴답시고 방향을 바꾸었다. (중략) 나는 실패의 미묘한 기쁨을 발견했고, 어쩌다 가끔 듣는 찬사에 취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중략) 나는 제법 사랑받았고, 책들은 내게 그늘이 되어 주고 내 곁에서 함께했다. (중략) 나는 말을 하는 대신 글을 쓸 수 있었고, 다르게 실패할 수 있었다. (중략) 그 고장난 욕망으로 내게 유일하게 중요한 한 가지를 해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리라. 책 한 권 쓰기. 책들을, 무한히 써내기. 마지막 책은 언제나 끝에서 두번째 책이라는 마음으로. (242-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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