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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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혼자 있을 때면 그들은 결코 그녀가 흑인이라는 어렴풋한 의심마저도 품지 않는 듯했다. 그래, 저기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라고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이 차례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흑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이 드레이튼 측에서 취하리라 예상되는, 제아무리 정중하고 세련된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랬다. (23쪽)

선택의 시점에 클레어가 자신이 치러야만 할 대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해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빚을 청산해주리라 기대할 권리는 없었다. 클레어의 문제는 자기 케이크를 차지하고 먹겠다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케이크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있었다. (70쪽)

그래, 삶은 전과 똑같이 계속되었다. 달리진 것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사실이 그녀를 바꿔놓았다. 오랫동안 희미한 그림자들로 가득하던 어두운 방에 성냥불이 켜지며 끔찍한 형체들을 낱낱이 보여준 듯했다. (123쪽)

아이린의 몸과 마음에서 피곤함이 점차 사라졌다. 브라인언. 이건 무슨 의미지? 그녀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까? 아이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뒤따랐다. 실제로, 그녀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저 아이들의 엄마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못한 장애물이었다. 그녀 안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127쪽)

그는 그들을 밀쳐내고 거실로 들어가 클레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두가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뒷걸음질치며 그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러니까 네가 깜둥이란 말이지, 빌어먹을 더러운 깜둥이!"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고통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남자들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펠리스가 그들과 벨루 사이에 끼어들어 재빠르게 말했다. "조심해요. 당신은 여기서 유일한 백인이에요."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말한 내용 못지않은 경고였다.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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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말 - 파리에서, 밥을 짓다 글을 지었다
목수정 지음 / 책밥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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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각기 다른 문몀이 음식으로 만나 서로의 온기와 에너지를 몸 안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음식을 만들며, 그들의 문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음식으로 새로운 방식의 온기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한다. (27쪽)

남자들은 앞으로도 부엌에서, 슈퍼마켓의 식품 코너에서 계속 길을 잃겠지만 여자들은 앞으로도 한동안 자신들의 미숙함을 지속할지 모를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가족들의 몸과 마음의 온기를 지탱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이다. 인류는 어쨌든 지속되어야 하기에. (108쪽)

스스로 결정하는 금지는 사람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를 단련시키고 몸과 정신을 유연한 하나의 팀으로 엮는 훈련을 시킨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을 정치적, 생태적 감각과 이성적 판단으로 결정하면서 나는 나의 길을 만들고, 나를 지휘하는 더욱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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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들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 난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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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과업이다. -서문 중

배움이 곧 인생이다. 실은 나는 오늘 저녁에 그를 초대하기를 희망한다. 배움은 인생과 같은 색깔이다. 그는 그런 말들을 해댄다. -희망에 대한 짧은 이야기 중

정말 신기한 일이네. 전혀 몰랐어! 오늘이 끝났군. -저녁 9시 30분을 맞이한 거트루드 스타인에 대한 짧은 이야기

나는 잔해만 남겨진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는 약간 열린채로 선 대문 세 개와 망가진 울타리가 있었다. 딱히 무언가 특별한 것의 잔해는 아니었다. 한 장소가 그곳에 와서 추락했다. 이후로 그 장소는 잔해만 남겨진 곳으로 남았다. 그 위로 빛이 떨어졌다. -여행을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

나는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 당신을 생각한다. 누군가가 새들의 울음을 공기 중에 보석처럼 박아놓았다. -많이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짧은 이야기

빛light과 조명lighting의 차이는 무엇인가? 렘브란트가 그린 [세 개의 십자가]라는 동판화가 있다. 그것은 땅과 하늘과 골고타 언덕의 그림이다. 한 순간이 그것들 위호 비처럼 쏟아져내리고, 동판은 점차 어두워진다. 렘브란트는 형상으로부터 질료가 휘청대며 기어나오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을 깨워 그것을 보게 한다. -최후에 대한 짧은 이야기

처음으로 빗방울을 헤아려볼 생각을 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했을까? 멀리 바다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그 비는 누구의 머리 위로도 내리고 있지 않다. -비에 대한 짧은 이야기 중

글쎄 내가 궁금해하는 거 알잖아. 그건 엄청 싸잖아 얼른 사자! 하고 외치며 두 팔을 번쩍 든 채 내 인생을 향해 달려오는 사랑일 수도 있어.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감각에 대한 짧은 이야기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 사람들은 황야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약성경 내내 하나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신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아는 목소리가 울여퍼진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내 부탁을 들어주시길.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누군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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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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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층 간의 거리, 하지만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특별한 거리였다. 헤어진 사랑의 그것처럼 말이다. (20쪽)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 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 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57쪽)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조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정중한 어조는 외부인들에게만 사용했다. (중략)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 또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때에도 극히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조의 인사말을 듣게 되면 부끄러웠다. 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결국 알아차리게 되었다. 몹시 관심 있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하거나, 이렇게 따뜻하게 미소 짓는 것은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거나 살그머니 코를 푸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78-79쪽)

그가 청년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예의 바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내 부모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자질이었고, 동시에 가장 얻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어떤 노동자가 사위 후보로 왔다면 그가 용감한자, 술은 마시지 않는지 따위를 알려고 했겠지만, 내 친구에겐 그러지 않았다. 지식과 예의 바름은 내적인 탁월함, 즉 생득적인 탁월함의 표시라는 깊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전부터 고대해 왔던 무언가가 이루어진 거였는지도, 큰 걱정을 하나 덜게 된 거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아무나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울리지 않는 사내와 결혼한 여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신혼부부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과 사위 사이에 놓인 교양과 힘의 간극을 그저 한없는 베풂으로써 보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린 더 이상 별로 필요한 게 없어.‘ (106-107쪽)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125쪽)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료,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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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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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으로 이 장면을 글로 옮겼다. 지금까지는 일기에서조차 이렇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마치 징벌을 이렇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마치 징벌을 야기하는 금지된 행위처럼. 어떤 글이든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금기. 심지어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이런 일들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자주 다른 가정에서도 벌어지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26쪽)

*이 장면 :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23쪽).

예의란 일종의 보호 장벽인 셈이고, 따라서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예의는 위선이나 악의처럼 느껴져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을 쓰는 것이 정상적인 가족 간의 대화였다. (74쪽)

부끄러움에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117쪽)

(그해 여름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나는 내가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됐다‘라든지 ‘나는 ~를 깨달았다‘라고 쓰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단어는 체험한 상황에 대한 명징한 의식이 있음을 상정한다. 거기에는 이 단어들을 모든 의미 외적인 것에 고정시키는 부끄러움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 그 무화 작용을 내가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최후의 진실이다. (132쪽)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했다. 마당의 오줌통, 함께 자는 방(공간 부족으로 인해 우리 계층이 대개 그렇듯 나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잤다). 어머니의 손찌검과 거친 욕설, 술에 취한 손님들과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친척들. 술에 취한 정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고 월말이면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우리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 오직 이 인식만으로도 내가 사립학교의 무시와 경멸의 대상인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37쪽)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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