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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평점 :



글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래서 모든 감각도 느낄 수 있다. 글에서 자란 상상이라는 나무에서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글마다 더 도드라지는 감각이 있다. 각자 상상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가 다른 것이다. 색다른 매력의 열매. 독특한 영혼의 열매. 놓치기 싫은 열매다. 그렇기에 여러 글을 읽는다. 글 안에서 끝없이 상상하며,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상상의 숲을 오래 거닐다 보니, 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글을 짓는 작가마다 문체가 다르고, 같은 작가라도 그 문체 안에서 변주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글의 다양성은 독서가에게 축복이다.
추리 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을 한다. 그럼에도 작품마다 개성을 잃지 않는다. 통일성 속에 다양성. 그렇게 조화의 세계를 계속해서 창조해낸다. 글의 다양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작가. 게다가 대부분 작품성도 높고, 가독성도 좋다. 독서인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소중한 사람이다. 이번에 만난 그의 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도 독자들에게 축복의 산물이 되고 있다. 상상의 나래로 열린 풍성한 여러 열매로.
'"만일 누군가가 뭔가를 숨기고 있고, 그게 사건에 관련된 일이라면 가가 씨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 잘 기억해 둬. 그 사람에게 거짓말은 안 통해."' -173쪽.
한여름, 호화 별장지에서 살인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다섯 명이 사망했고, 한 명이 다쳤다. 자수한 범인, 히카와 다이시는 범행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의 진상(眞相)을 밝히기 위해 검증회를 열게 된다. 동행자의 참석도 허용되기에 휴가 중인 가가 교이치로 형사도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검증회의 사회를 맡게 된 가가. 그리고 거짓말을 벗겨 내며, 진실의 정체를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Everybody Lies)."' -미국 드라마 '하우스(House M.D., 2004~2012)' 중에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70쪽.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나도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의 보편성이다. 그래도 악의가 아닌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신부와 소설 '마지막 잎새'의 노인 화가. 그리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 모두 하얀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다. 또,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가르침처럼, '전쟁에는 속임수(손자병법 시계편(始計篇))'가 난무한다. 어떤 때는 계략으로 가치부전(假痴不癲)(삼십육계의 제27계. 거짓으로 어리석은 체하되 실제로 미치진 말라는 의미다.)을 실천하기도 하고.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귀여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가벼운 농담이나 슬기로운 가면으로 재치있게 넘어갈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이 올바른 치료나 정의(正義) 구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병은 처음에 정확한 진단을 해야 하고, 사건은 먼저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특이한 병, 어려운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복잡한 수수께끼를 푸는 사이에 거짓말이 개입하면, 사람의 눈은 어두워져서 헤맬 수밖에 없다.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그 거짓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우스도 가가도 그렇게 출발한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What is the cost of lies?)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의 진짜 대가란 거짓을 끝없이 듣다가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It's not that we'll mistake them for the truth. The real danger is that if we hear enough lies, then we no longer recognize the truth at all.)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Chernobyl, 2019)' 중에서.
거짓말의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의 연속성에 있다. 거짓말은 대개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나도 거짓말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계속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어지는 검은 거짓말. 그 대가는 진실을 알아내는 힘의 온전한 소멸이다. 은폐되고 조작된 커다란 진실. 그 안에서 만성(慢性)이 된 악한 거짓으로 사람들은 안위(安慰)하고야 만다. 결국 더욱 크게 자라난 더러운 거짓말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진실이 드러난다. 무서운 대가다. 동정(同情)의 여지도 없는 거짓말로 남은 건 배신감이리라. 가가가 밝혀낸 사건의 진실 중 하나도 그랬다. 불륜 때문에 만연(蔓延)한 거짓. 그 속에서 피어난 불신과 분노가 비극의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외도의 당사자들은 피해자에게 추악한 거짓으로 큰 상처를 대가로 주었다. 그리고 깊은 아픔의 충격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말았다. 이렇듯 사람 사이에는 나쁜 거짓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협객까지 되라는 건 아니다. 부모로서의 믿음. 부부로서의 믿음. 자녀로서의 믿음. 친구로서의 믿음. 그것을 잃지 않으면 된다.
香象渡河 金翅劈海
향상도하 금시벽해
'코끼리가 항하(恒河, 갠지즈강)를 거침없이 건너듯, 금시조(가루다)가 바닷물을 가르고 자유자재로 날듯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는 물론 시와 문장, 더 나아가서 서예의 '웅혼하며 힘이 있는 치밀한 필치'를 표현하는 말로 확장됐다고 한다.('안중근, 향상도하 금시벽해(香象渡河 金翅劈海)', 인사이드비나, 2024년 1월 15일.)
이렇듯 거짓말에는 보편성과 연속성이 있다. 누구나 계속할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다. 속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에 당하고, 마침내 밝혀내더라도 그 목적을 이미 이룬 뒤다. 악의에 가득 찬 교묘한 거짓말이라면 알아내기 더 힘들고, 피해도 더 크다. 범죄의 세상에서 더욱 암약하는 거짓말. 가가는 이 폭풍우를 뚫고 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상대는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거짓말을 하면 구토한다.)도 아니고,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에 나오는 피노키오(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도 아니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가 되려면, 혜안이 절실하다. 가가의 이 눈은 향상도하와 금시벽해로 열게 된다. 거짓말 탐지의 난해성을 가가는 이 깨달음으로 극복한 것이다. 수많은 난항을 겪으며, 깊이 새기듯 체득했으리라.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을 때 대상 주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저 멀리서 바다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올라 조수 간만이 달라져 어느덧 대상 주위를 물이 감싸 결국 대상의 껍질을 스스로 녹인다. 수학은 그렇게 진보를 이룬다.'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1928~2014)('인류난제 푼 `수학스타`의 첫 꿈은 시인…경계 넘나드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의 힘', 매일경제, 2021년 5월 7일.)
가가가 증명하는 사건의 진보는 수학의 그것과 닮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어느덧 진실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거짓의 껍질을 녹인다. 가가는 웅장하고 거침이 없으면서 치밀하다. 하나하나 배제하며, 거짓을 녹인다. 드디어 나타난 진실. 오류 없는 증명. 그렇게 난제를 푼 수학자 같은 가가.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 사건에는 인간의 감정들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것이다. 슬픔을 알아가는 슬픔을 가가도 느꼈으리라.
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에서 사건의 진상을 상상했다. 높고 넓은 상상의 나무에 달린 열매들. 다양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감각의 향연(饗宴)이었다. 각각의 인물들과 그때그때의 상황들에 개별성이 있어서 입체적이었다. 자수한 범인과 피해자들, 검증회에 참석한 사람들까지 모두 주연처럼 열연을 펼쳤던 것이다.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며, 무대를 장악했던 그들. 곳곳에 가가의 향과 색채도 은은하게 빛났다. 사건을 깊고, 높게 해결했다. 그렇기에 냉수 같은 시원함도 있지만, 그 속에 온수 같은 따뜻함도 있었다. 이런 축복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제71회 기쿠치 간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둘. 2023년 베스트 미스터리 1위(판매)라고 한다.
셋. 히가시노 게이고의 101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넷. 가가 형사 시리즈의 열두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다섯. 초판 1쇄 한정으로 저자의 친필 메시지가 인쇄되어 있다고 한다.
여섯. 초판 2쇄 기준으로 428쪽의 '남편을'을 '남편은'으로 고쳐야 한다.
일곱. 자수한 범인, 히카와 다이시의 설정은 2019년 일본 전직 차관이 아들을 살해(비속살해)한 사건에서 일부 가져왔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