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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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래서 모든 감각도 느낄 수 있다. 글에서 자란 상상이라는 나무에서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글마다 더 도드라지는 감각이 있다. 각자 상상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가 다른 것이다. 색다른 매력의 열매. 독특한 영혼의 열매. 놓치기 싫은 열매다. 그렇기에 여러 글을 읽는다. 글 안에서 끝없이 상상하며,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상상의 숲을 오래 거닐다 보니, 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글을 짓는 작가마다 문체가 다르고, 같은 작가라도 그 문체 안에서 변주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글의 다양성은 독서가에게 축복이다.

추리 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을 한다. 그럼에도 작품마다 개성을 잃지 않는다. 통일성 속에 다양성. 그렇게 조화의 세계를 계속해서 창조해낸다. 글의 다양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작가. 게다가 대부분 작품성도 높고, 가독성도 좋다. 독서인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소중한 사람이다. 이번에 만난 그의 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도 독자들에게 축복의 산물이 되고 있다. 상상의 나래로 열린 풍성한 여러 열매로.

'"만일 누군가가 뭔가를 숨기고 있고, 그게 사건에 관련된 일이라면 가가 씨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 잘 기억해 둬. 그 사람에게 거짓말은 안 통해."' -173쪽.

한여름, 호화 별장지에서 살인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다섯 명이 사망했고, 한 명이 다쳤다. 자수한 범인, 히카와 다이시는 범행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의 진상(眞相)을 밝히기 위해 검증회를 열게 된다. 동행자의 참석도 허용되기에 휴가 중인 가가 교이치로 형사도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검증회의 사회를 맡게 된 가가. 그리고 거짓말을 벗겨 내며, 진실의 정체를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Everybody Lies)."' -미국 드라마 '하우스(House M.D., 2004~2012)' 중에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70쪽.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나도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의 보편성이다. 그래도 악의가 아닌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신부와 소설 '마지막 잎새'의 노인 화가. 그리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 모두 하얀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다. 또,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가르침처럼, '전쟁에는 속임수(손자병법 시계편(始計篇))'가 난무한다. 어떤 때는 계략으로 가치부전(假痴不癲)(삼십육계의 제27계. 거짓으로 어리석은 체하되 실제로 미치진 말라는 의미다.)을 실천하기도 하고.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귀여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가벼운 농담이나 슬기로운 가면으로 재치있게 넘어갈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이 올바른 치료나 정의(正義) 구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병은 처음에 정확한 진단을 해야 하고, 사건은 먼저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특이한 병, 어려운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복잡한 수수께끼를 푸는 사이에 거짓말이 개입하면, 사람의 눈은 어두워져서 헤맬 수밖에 없다.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그 거짓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우스도 가가도 그렇게 출발한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What is the cost of lies?)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의 진짜 대가란 거짓을 끝없이 듣다가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It's not that we'll mistake them for the truth. The real danger is that if we hear enough lies, then we no longer recognize the truth at all.)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Chernobyl, 2019)' 중에서.

거짓말의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의 연속성에 있다. 거짓말은 대개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나도 거짓말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계속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어지는 검은 거짓말. 그 대가는 진실을 알아내는 힘의 온전한 소멸이다. 은폐되고 조작된 커다란 진실. 그 안에서 만성(慢性)이 된 악한 거짓으로 사람들은 안위(安慰)하고야 만다. 결국 더욱 크게 자라난 더러운 거짓말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진실이 드러난다. 무서운 대가다. 동정(同情)의 여지도 없는 거짓말로 남은 건 배신감이리라. 가가가 밝혀낸 사건의 진실 중 하나도 그랬다. 불륜 때문에 만연(蔓延)한 거짓. 그 속에서 피어난 불신과 분노가 비극의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외도의 당사자들은 피해자에게 추악한 거짓으로 큰 상처를 대가로 주었다. 그리고 깊은 아픔의 충격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말았다. 이렇듯 사람 사이에는 나쁜 거짓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협객까지 되라는 건 아니다. 부모로서의 믿음. 부부로서의 믿음. 자녀로서의 믿음. 친구로서의 믿음. 그것을 잃지 않으면 된다.

香象渡河 金翅劈海

향상도하 금시벽해

'코끼리가 항하(恒河, 갠지즈강)를 거침없이 건너듯, 금시조(가루다)가 바닷물을 가르고 자유자재로 날듯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는 물론 시와 문장, 더 나아가서 서예의 '웅혼하며 힘이 있는 치밀한 필치'를 표현하는 말로 확장됐다고 한다.('안중근, 향상도하 금시벽해(香象渡河 金翅劈海)', 인사이드비나, 2024년 1월 15일.)

이렇듯 거짓말에는 보편성과 연속성이 있다. 누구나 계속할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다. 속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에 당하고, 마침내 밝혀내더라도 그 목적을 이미 이룬 뒤다. 악의에 가득 찬 교묘한 거짓말이라면 알아내기 더 힘들고, 피해도 더 크다. 범죄의 세상에서 더욱 암약하는 거짓말. 가가는 이 폭풍우를 뚫고 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상대는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거짓말을 하면 구토한다.)도 아니고,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에 나오는 피노키오(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도 아니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가 되려면, 혜안이 절실하다. 가가의 이 눈은 향상도하와 금시벽해로 열게 된다. 거짓말 탐지의 난해성을 가가는 이 깨달음으로 극복한 것이다. 수많은 난항을 겪으며, 깊이 새기듯 체득했으리라.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을 때 대상 주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저 멀리서 바다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올라 조수 간만이 달라져 어느덧 대상 주위를 물이 감싸 결국 대상의 껍질을 스스로 녹인다. 수학은 그렇게 진보를 이룬다.'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1928~2014)('인류난제 푼 `수학스타`의 첫 꿈은 시인…경계 넘나드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의 힘', 매일경제, 2021년 5월 7일.)

가가가 증명하는 사건의 진보는 수학의 그것과 닮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어느덧 진실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거짓의 껍질을 녹인다. 가가는 웅장하고 거침이 없으면서 치밀하다. 하나하나 배제하며, 거짓을 녹인다. 드디어 나타난 진실. 오류 없는 증명. 그렇게 난제를 푼 수학자 같은 가가.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 사건에는 인간의 감정들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것이다. 슬픔을 알아가는 슬픔을 가가도 느꼈으리라.

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에서 사건의 진상을 상상했다. 높고 넓은 상상의 나무에 달린 열매들. 다양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감각의 향연(饗宴)이었다. 각각의 인물들과 그때그때의 상황들에 개별성이 있어서 입체적이었다. 자수한 범인과 피해자들, 검증회에 참석한 사람들까지 모두 주연처럼 열연을 펼쳤던 것이다.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며, 무대를 장악했던 그들. 곳곳에 가가의 향과 색채도 은은하게 빛났다. 사건을 깊고, 높게 해결했다. 그렇기에 냉수 같은 시원함도 있지만, 그 속에 온수 같은 따뜻함도 있었다. 이런 축복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제71회 기쿠치 간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둘. 2023년 베스트 미스터리 1위(판매)라고 한다.

셋. 히가시노 게이고의 101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넷. 가가 형사 시리즈의 열두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다섯. 초판 1쇄 한정으로 저자의 친필 메시지가 인쇄되어 있다고 한다.

여섯. 초판 2쇄 기준으로 428쪽의 '남편을'을 '남편은'으로 고쳐야 한다.

일곱. 자수한 범인, 히카와 다이시의 설정은 2019년 일본 전직 차관이 아들을 살해(비속살해)한 사건에서 일부 가져왔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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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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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누군가의 목록을 참고하고는 한다. 어떤 것은 마치 신의 계명과 같이 영혼 깊숙이 다가올 때도 있다. 그 목록이 전문성과 독창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바르고 굳건한 믿음으로 새겨진 영혼의 각인이 된다. 이런 추천 목록은 구원자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외로운 배에게 수호신이 되어 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악마의 속삭임이 된 목록도 있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목록. 이 목록을 바탕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핏빛으로 물든 타락의 도구가 된 목록.

소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서 그 붉은 목록은 살인으로 선명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누군가 내 리스트를 읽고 그 방법을 따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면서요? 그게 당신 가설인가요?"' -33쪽.

'처음에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리스트를 작성했을 때는 너무 기발해서 범인이 절대 잡히지 않을 만한 살인을 생각해내려고 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그 책들에 나오는 살인 방법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다면 잡히지 않을 터였다. …… 범인이 누구든 간에 단순히 내 리스트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범인은 나를 알고 있다.' -43~44쪽.

보스턴에서 올드데블스라는 추리소설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멜컴 커쇼. 그에게 한 FBI 요원이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그웬 멀비. 커쇼가 몇 년 전에 서점 블로그에 작성한 목록.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목록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 목록을 보고 그 방법을 따라 살인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그 목록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덫》, A.A. 밀른의 《붉은 저택의 비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살의》, 제임스 M. 케인의 《이중 배상》, 존 D. 맥도널드의 《익사자》,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이었다. 아직 모든 목록이 완성된 건 아니지만, 대체 누가 이런 범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그 범인은 커쇼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목록을 왜 작성할까? 지은이는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방법'(73쪽)이라고 한다. 커쇼의 아내 클레어는 살짝 어긋난 사람이었다. 마약과 불륜. 그런 그녀로 인해 커쇼도 비틀어졌다. 결국, 클레어는 교통 사고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환 살인을 하게 된 커쇼. 마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처럼. 전에 그가 작성한 목록에 비로서 그의 정체성이 부여된 걸까. 이제는 누군가 그 목록대로 살인을 하고 있는 상황. 누군가 살인을 매개로 내재된 일그러진 정체성을 그 목록에 부여하고 있는 걸까.

'현실과 허구는 다르니까.' -269쪽.

범인은 허구와 현실을 동일시하며 살인 행위를 지속하고 있었다. 살인은 예술(269쪽)이라며. 그렇게 현실 속 살인이든, 허구 속 살인이든 아름답다(269쪽)고 설파하는 범인. 아니다. 살인을 소재로 하는 어떤 허구도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단지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난 살인은 명백히 범죄다. 허구는 허구일 뿐이고. 이렇게 현실과 허구는 다르다. 허구와 현실을 혼동한다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어두운 일탈로 타락했던 범인도 그랬던 것이다. 단, 살인에 있어 현실과 허구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즉, 작가의 말처럼 소설이든, 현실이든 완벽한 살인은 없다(254쪽)는 것이다. 늘 변수가 너무 많다(254쪽)는 것을 기억하시라.

붉게 물든 목록. 허구 속의 '완벽한 여덟 살인'을 다룬 목록. 누군가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피를 묻혔다. 그러나 저주였다. 외로운 배였던 누군가는 침몰하고야 말았다. 목록의 작성자도 난파선이 되었고. 그렇게 의외의 범인과 뜻밖의 전개로 글은 이어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글 안에서 속도감이 있게 그려지고 있다. 그 속도감 안에 긴장감도 잘 녹아서 흥미로운 색이 비춰지게 한다.

소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고전 범죄 소설에 대한 헌사다. 동시에 범죄 소설 독서 욕구 자극제이기도 하다. 완벽한 살인을 다룬 여덟 권의 고전 범죄 소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살인을 그리면서, 치밀함과 유려함을 놓치지 않았다. 또, 곳곳에 언급된 여러 범죄 소설도 지도에 표시된 물음표와 같았다. 느낌표로 바꾸고 싶어지는 그 물음표. 그렇게 이 책에 담긴 모든 책의 이름은 독자들에게 장바구니 추가 목록이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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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1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3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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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수묵화의 세계에 등장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다. 그런데 그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지만, 수묵화라는 참신한 소재로 작가의 깊은 뜻을 잘 그렸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 책이 그린 그림에 생명의 향기와 삶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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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장 소설이 저는 재밌더라고요.^^

사과나비🍎 2022-04-29 02:11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그나저나 페크 님~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저는 몸이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네요... 페크 님은 건강 유의하시기 바랄게요~^^*

2022-04-29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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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불이선란’,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55.0×31.1㎝, 개인 소장.


우연히, 추사 김정희(1785~1856)의 난 그림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불이선란'이라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감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어떤 향기와 기운이 느껴졌었다. 서화 감상의 안목이 없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와 생생한 기운. 역시 명작이었다. 뛰어난 감상가이기도 했던 추사. 그는 서화 감상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금강안이라고 불린 추사.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초기 금강안의 안목을 가진 청년도 그린다. 추사와 같은 그의 치유와 성장을.

'"자넨 좋은 안목과 심성을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지."' -123쪽.

'"그림은, 수묵화는 내 생각 바깥에 있는 세상을 가르쳐줬어. 내가 뭘 느끼는지를 전해줬어."' -357쪽.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오야마 소스케. 홀로 상실감 속에서 살던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전시회장의 짐 운반 아르바이트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그에게 여러 감상평을 듣고, 좋아한다. 그리고 그를 애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그 노인은 일본 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이었다. 거장의 애제자. 기연이었다. 아오야마 소스케도 놀라지만, 시노다 고잔의 손녀이자 젊은 수묵화가인 지아키도 놀란다. 그리고 그녀는 반발한다. 수묵화와 아무 접점이 없던 그. 그녀는 그런 그와 내년 '고잔상'을 두고 경쟁하자고 한다. '고잔상'은 일본 수묵화 세계의 상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상이다.

소스케는 수묵화를 처음 배우며, 마음을 그리고, 생명을 그렸다. 그렇게 회복하고, 발돋움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 새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지아키도 소스케와 함께 하며, 더욱 나아가게 되고.

고잔은 '수묵의 본질은 즐거움'(68쪽)이라고 소스케에게 가르친다. '재능이나 감각은 그림을 즐기느냐 아니냐에 비하면 특별한 게 아니다'(174쪽)라고 한다. 또, '수묵화는 삼라만상을 그리는 그림'(215쪽)이라고 하며, '현상이란 바깥에만 존재하는 걸까? 마음속에는 우주가 없을까?'(251~216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216쪽)고 한다. 이런 고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소스케는 빠르게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그를 보며, 지아키도 자신의 부족한 것을 알게 되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

금강안이었던 추사는 '문자향 서권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잔의 가르침도 결국에는 이것이 아닐까. 선각자들이 남긴 글. 즉, 문자와 책 같은 가르침을 통해 체화된 깨달음. 그렇게 내면에 담긴 깊은 깨달음의 향기와 기운. 그것이 선이 되어 나오는 것이 수묵화라고. 그렇기에 수묵화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라고. 그 즐거움 속에서 나오는 향기와 기운이 생명이고, 삶이라고. 그래서 '수묵화가 마음과 생명을 그리는 그림'(381쪽)이고, '수묵화가 선의 예술이라면 선은 삶의 방식 그 자체'(381~382쪽)라고. 결국, '선은 나를 그리고 있는 것'(384쪽)이 된다고.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의 세계에 등장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다. 그런데, 노인 고수들과 청년 주인공의 기연. 엄청난 성장으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되는 그. 결국, 아픈 과거를 딛고 세상에서 우뚝 서는 그. 그리고 절세미인과 그의 사랑. 이런 그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지만, 수묵화라는 참신한 소재로 작가의 깊은 뜻을 잘 그렸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 책이 그린 그림에 생명의 향기와 삶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의 지은이 도가미 히로마사는 현직 수묵화가라고 한다.

둘. 이 책은 제59회 고단샤 메피스토상 수상, 2020년 아마존재팬 랭킹 1위, 독서미터 ‘읽고 싶은 책’ 랭킹 1위, ‘왕의 브런치’ 선정 2019년 올해의 책 대상, 2020년 일본 서점대상 3위라고 한다.

셋. 우리나라에 이 소설이 원작인 만화와 이 책이 동시에 발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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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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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보면, 기상천외한 생각을 보기도 한다. 추리 소설은 그런 착안들의 향연이 성대하게 열리는 곳이라 할 수 있고. 이런 풍성한 연회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발상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움을 보는 눈을 가진 이의 놀라운 생각. 사람들의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추리 소설에서는 주로 수수께끼에 그런 참신한 맛을 넣는다. 그렇게 독자는 훌륭한 요리사의 싱그러운 맛을 음미하며, 지적 유희를 즐기게 되고.

추리 소설, 《화려한 유괴》도 독특한 맛이 있다. 추리 소설의 식도락을 즐기는 이들도 만족할 만한.

'자, 다시 한번 설명할 테니 마음 가라앉히고 들어. 우리 블루 라이언스는 현재 일본 전 국민을 납치했다. 오직 그뿐이야.' -28쪽.

일본 전 국민을 납치했다는 범죄 집단 블루 라이언스. 그런데, 이런 범죄 행위가 성립될 수 있는 걸까. 범죄 대상이 일본 전 국민이 될 수 있는 걸까. 일본 전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걸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런데, 총리 공관에 전화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몸값으로 일본의 연간 방위비를 빗대어 5천억 엔을 요구한다. 일시불이라면, 한 정당의 연간 기부금 정도인 5백억 엔으로 합의해준다고도 하고. 장난 같았다. 그런데, 젊은 연인이었던 두 명이 청산가리를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장난 같지 않았다. 그래서 탐정 사몬지 스스무가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플라스틱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하기까지 한다.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된 상황. 돌연, 블루 라이언스는 노선을 바꿔 국민 앞에 나선다. 그들이 지정한 5천 엔짜리 와펜을 사면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말하며 협상하기 시작했다.

'"겁먹은 인간일수록 덫에 걸리기 쉬운 법."' -430쪽.

블루 라이언스는 전 국민을 납치했다고 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행위를 했다. 사람들은 두려웠다. 마치 살생부를 가진 듯한 그들. 그런데, 생명의 열쇠가 나타났다. 와펜이라는 구세주. 물론 블루 라이언스의 덫이었다. 겁이라는 수단을 활용한 함정. 그렇게 돈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인해 그들도 겁을 이용한 덫에 걸리게 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너무 사랑한 블루 라이언스. 지능이 높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악을 행했다. 그렇게 돈을 탐했다. 일견, 화려한 유괴로 사람들을 농락하며, 그들의 뜻을 이루는 듯했다. 그렇지만, 미혹을 받아서 그들 안에서 서로의 믿음이 떠나게 되었고. 그 근심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찔렀다. 자신들이 판 두려움이라는 함정과 비슷한 함정에.

"미쳤어, 이 세상은."

"맞아."

사몬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다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신주쿠의 야경을 바라봤다.

"미치기는 했어도 아름다운 곳이지."' -432쪽.

배금주의자. 그들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한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돈 모으기에 둔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이 죄를 지었고, 벌을 받게 되었다.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지만, 결국 정의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명탐정이 보기에, 이곳은 미친 세상이어도 아름다운 곳인 것이다.

추리 소설, 《화려한 유괴》는 감탄사의 집합소 같았다. 흥미로운 시작에 이은 뜻밖의 전개. 그리고 멋진 대결과 깔끔한 마무리. 쉽게 읽히는 글의 곳곳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작가의 대담하고, 독특한 생각에 부드러운 글이 어우러져 진미(珍味)를 품은 것이다. 훌륭한 요리사의 특별 요리였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은 1977년에 첫 출간이 됐다고 한다.

둘. 이 책은 사몬지 탐정 사무소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셋. 이 책의 작가 니시무라 교타로는 1930년생으로 출간 작품 수가 680편이 넘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거장이라고 한다. 그는 2022년 3월에 별세했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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