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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Pan's Laby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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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르모 델토로는 존카펜터부터 내려오는 현대 호러영화감독의 계보- 웨스크레이븐, 샘레이미, 피터잭슨을 이을 최고의 거목이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면 모두 호러영화임을 알 수 있는데 직접 각본을 쓴 데뷔작 '크로노스'부터 헐리웃 진출작 '미믹', '블레이드2', '헬보이', 그리고 그의 생애 최고의 두 작품인 '악마의 등뼈'와 '판의미로'까지. 델토로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혹독하고 혼란스러운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특히 그는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두 편의 영화에서 다루었는데, 아마도 그의 체험적 고찰에서 나온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들은 한마디로 현실의 잔혹함과 냉소를 축으로 하는 호러판타지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자신이 경험한 현실의 참혹한 부분들을 잔혹호러라는 판타지 기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점이 바로 여타 판타지 영화들, 혹은 여타 호러영화들과 차별되는 점이라 하겠다. 암스테르담 판타스틱 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한 그의 명실상부 대표작인 '악마의 등뼈'에 이러한 그의 세계관이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한 편의 영화에 그가 담고자 한 모든 영화적 상상력을 총 집결시키고 환상적인 연출력으로 숙성시켜낸다. 호러영화지만 한 편의 성장소설과도 같고,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고발영화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인간과 영혼에 대한 심도깊은 해석으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기까지 한다. 그의 영화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작품으로 그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감독으로 거듭나게 된다. 칸느 영화제에서 기립 박수와 찬사를 아낌없이 받은 '판의 미로'는 '악마의 등뼈'의 확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똑같은 배경을 담고 있으며 역시 어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현실의 잔혹함과 판타지의 신비로움을 교묘하게 조합하고 비틀어보인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녀, 오필리아가 겪는 '신비체험'은 '판타지'의 속성에 대한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판타지가 순수한 판타지로 끝이 날 때 그것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 모든 중심의 축에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가 순수한 판타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상의 소유물에 불과할 뿐, 우리와는(인간과는) 무관한 영역이다. 그래서 판타지를 말하고자 할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판타지라는 수식이 붙게 마련이고, 인간의 판타지- 인간에 의해 생성된 판타지란 천상의 판타지와 다를 수밖에 없다. 어째서인가, 라고 한다면- 인간의 판타지란 '현실 속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현실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도 없고, 따라서 인간의 판타지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요는-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의 공간, 그것이 지극히 판타지적인 판타지의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악마의 등뼈' 때도 그러했고, '판의 미로' 때도 그러했다. 감독은 판타지의 공간에 접속하기 전에 현실의 공간을 냉철하게 보여준다. 현실은 잔혹하다. 더구나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본 현실은 두렵고 절망적인 곳이다. 현실이 무섭고 참혹할 수록 아이들의 판타지는 더욱 선명한 영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애초에 현실에 뿌리를 둔, '인간의 판타지'이기에 판타지 순수의 판타지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판타지가 아름답고 신비하다고 한들, 인간은 애초에 현실의 공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판타지 공간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현실'을 버려야 가능하다. 그러기에- 인간의 판타지는 더욱 더 안타깝게 갈망되어지는, 닿을 수 없는신비로운 꿈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길에르모 델토로 만이 가진 '판타지'의 속성이 날카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름답지만 잔혹할 수밖에 없는, 잔혹하기에 더욱 더 애틋할 수밖에 없는 슬픈 영혼의 판타지...! 

말 그대로 '판의 미로'는 슬픈 영혼의 판타지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 소녀 오필리아는 자신에게 닥친 무서운 현실에서 벗어나길 갈망한다. 원래 자신의 자리인 '공주'로 되돌아가고자, '판의 미로'의 문을 두드린다. 낯설고 두려운 판타지의 공간 속에 발을 들여놓은 오필리아지만, 갖은 공포와 위기를 용기있게 헤쳐나간다. 그녀만의 판타지를 이루기 위해...!

그러는 동안 현실 공간에서는 내전이 더욱 악화되고 인간들의 살육과 증오는 극에 달한다. 극중에서 반란군에 속해있으면서 사실은 좌익혁명단을 도와주는 '의사'는 이런 말을 한다. 좌익혁명단의 이러한 전투는 결국엔 무의미한 것이다. 반란군 몇몇을 죽인다고 한들 더 많은 반란군이 다시 채워질 뿐이다. 의사의 그러한 말에는 상당한 뼈가 있다. 영화 속에서 반란군 장교는 '악한'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속한 반란군은 '악', 그리고 '좌익단'이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테다. 의사의 말처럼- 서로 죽이고 죽는 '살육'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이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정의라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목적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과 화염의 아비규환 속에서 그들만의 판타지를 꿈꾼다. 그러나- 그러한 판타지는 절대로 오지 않을 터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피와 시체만 쌓일 뿐이다. 그 참혹한 현실적 결과과 그들이 총칼로 무의미하게 달려온 '판타지적 결과'와 닿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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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수와 만수 - Chilsu and Mans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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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갑자기 유명해졌다!

 

칠수와 만수는 페인트 공이다. 날마다 고층 빌딩에 매달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젊지만 무기력하다. 거품경제의 호황 속에서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삶은 더욱 서글프다. 칠수는 미국에 사는 누나가 자신을 초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스스로도 알고 있다. 누나는 창녀였다. 미군에게 시집가서 이제는 소식도 없다. 사랑했던 여대생 지나는 결혼 준비에 바쁘다. 칠수는 알고 있다. 지나가 절대로 자신과 결혼할 수 없음을. 그는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무기력한 인간이기에. 답답하긴 만수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는 사상 문제로 투옥중에 있다. 그로인해 만수는 무엇을 하던 경찰의 감시와 제재를 받는다. 어떤 꿈도 속시원히 펼쳐보일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여동생의 모습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장난으로밖에 안 보인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직과 진실이 아닌 것이다. 돈이 움직이는 세상이고 권모술수가 움직이는 세상이다.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세상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빌딩벽이다. 칠수와 만수는 그 빌딩벽에 매달려 오늘도 하루를 버티고 있다. 젊기 때문에, 아직 펼쳐보이지 못한 그들의 끓어오르는 꿈들은 더없이 허망한 한숨과 눈물로 되돌아올 뿐이다. 아무리 세상을 향해 아우성을 쳐봐도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단번에 유명해지고 만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페인트 칠을 하던 도중 울분을 참지 못하고 칠수와 만수는 세상을 향해 고함을 쳐본다. 장난으로 시작한 그 소동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 되고 만다.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멀리 떨어진 그들과 사회. 들리지 않는 목소리. 닿을 수 없는 거리. 바로 그 거리가 그들 사이에 치명적 오해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사회는 그들을 옥상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노동시위자로 오인해버린다. 경찰이 출동하고 메스컴이 달려온다. 이제껏 무수히 그들을 외면했던 이 사회조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푸념과 농담에 진지한 경청을 한다. 하지만 왜곡된 이 사회의 시선은 아무리 해도 그들의 진실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칠수와 만수는 옥상 위에서 고함을 지른다. 우린 그냥 장난을 친 것 뿐이니 다들 돌아가라고. 해산하라고. 우린 자살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시위를 벌이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술김에 세상을 향해 고함을 질러본 것 뿐이다. 조금 있다가 알아서 내려갈 테니 제발 다들 돌아가라! 하지만 옥상위에서 그들이 그렇게 진실을 외쳐도 까마득히 떨어진 아래에서 그것이 들릴 리 없다. 오히려 점점 일만 커질 뿐이다. 만수의 아버지가 처한 사정을 알게된 관리당국은 노동, 인권, 사회문제로 포커스를 확대한다. 세상은 왜곡의 논리로 칠수와 만수를 멋대로 정의한다. 

 

제발 그냥 돌아가라니까요! 옥상 위에서 아무리 외쳐보아도- 진실의 목소리는 아래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칠수와 만수를 비추고 있는 무수한 카메라 그 많은 시선들, 그 많은 귀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칠수와 만수의 진심은 전달되지 않는다! 마침내 만수는 결단을 내린다. 세상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어. 소통이 단절된 사회, 진실이 포위된 세상, 젊음이 갈 곳 잃은 시대. 만수는 그 분출할 길 없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빌딩 아래로 뛰어내리고 만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이 사회가 그를 정말로 '자살자'로 몰고가버린 것이다.


소통이 단절된 사회, 진실이 포위된 세상, 젊음이 갈 곳 잃은 시대!

 

이 영화가 걸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빛나는 각본 때문이다.

젊음의 꿈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도시를 살아가는 칠수라는 청년- 하지만 그는 무기력하다. 부자도 아니고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며 얼굴이 특별나게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는 80년대 말 하층민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직업도 없이 전전하다 우연히 알게 된 만수에게 빌붙어서 페인트 공 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한다. 만수 역시 마찬가지다. 만수는 사상 문제로 장기 복역중인 아버지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초고층 건물에 밧줄 하나로 목숨을 유지하는, 페인트 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칠수와 만수는 어떡해서든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속에 편승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직 젊기에, 유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 사회는 높고 단단한 벽과도 같다. 결코 뛰어넘을 수도 없고 부딪혀 돌파할 수도 없는, 경계선! 그렇다. 이 사회는 선을 그어 그들을 선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박광수 감독은 바로 여기에 이 영화가 지닌 메시지의 초점을 맞춘다.

6,70년대를 거쳐 가쁘게 달려온 초고속 성장의 거품효과가 절정을 맞던 80년대 말- 그 시기는 오랜 군사정권으로 인한 사회의 경직과 모순이 맞물려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의 성공으로 이 나라 전체가 묘하게 들떠 있을 그 무렵, 그러나 젊음은 한없이 공허했던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선은 더욱 뚜렷해지고 가진자들에 비해 가지지 못한 자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치명적 모순의 시대. 감독은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허상의 빛을 걷어내고 그 속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실상의 어둠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들은 라스트에 이르러 기막힌 아이러니로 표출된다.

아무리 외쳐봐도 귀 기울이지 않던 이 사회가- 무기력한 두 청년에게 모든 카메라를 다 들이댄다. 두 청년의 자살소동은 사회조직에 '위기'가 될 수 있기에 사회조직의 입장에서는 시급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두 청년은 전혀 자살을 할 마음이 없다. 두 청년의 진심이 사회조직에 전달될 수만 있었다면. 전달될 통로만 있었더라면- 사회조직도 불안 요소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엔 그러한 통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회조직은 계속해서 불안을 더해간다. 사건이 비대하게 커져만 가고 불안과 공포도 거대해진다. 이 불안과 공포는 놀랍게도 사회조직 스스로가 만들어낸 왜곡된 불안과 공포인 셈이다. 왜냐하면 사회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자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고층빌딩'- 사회조직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 고층빌딩으로 인해 두 청년과 그들 사이에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칠수와 만수는 고층빌딩 옥상에서 이 사회를 향해 아무리 진실의 목소리를 외쳐봐도 소용없다. 그 진실의 목소리는 절대로 이 세상과 닿을 수 없으니. 진실이 닿기에는 빌딩이 너무 높다. 이사회의 시선이 너무나 왜곡되어 있다. 


이 시대의 칠수와 만수

 

젊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과 꿈도 무한히 빛나던 시절. 그러나 이 사회는 냉혹하기만 하다. 풋풋한 꿈도 진실된 열정도 쉽게 알아주지 않는다. 칠수와 만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거짓과 허위, 가식과 모순 투성이다.

영화 속에서 곧잘 비쳐지는 도시의 높은 빌딩은 곧, 진실을 가로막는 벽이자 닿을 수 없이 까마득한 '사회'에 대한 상징이다. 칠수와 만수는 그 벽 위에서 밧줄 하나에 매달린 삶을 살아간다. 밧줄은 곧 그들의 생명줄이고 그들과 벽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그 통로는 너무나 나약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전달되기에는 너무나도 가늘고 위태롭다.

언뜻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떠오른다. 라스트에- 공주는 종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경찰서에서 온갖 몸부림을 치며 진실을 얘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 진실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전달되지 않는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회조직의 금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아무리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절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공허한 외침이 되어 허망하게 사라지거나- 기이한 형태로 왜곡되어 변질 될 뿐이다.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세상- 우리는 지금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가. 필자의 생각은- 부조화다. 모순은 부조화에서 온다. 그렇다고 한다면 둘러보자. 이 사회를 이 세상을 이 시대를. 조화로운가? 영화 속 칠수와 만수는 세상과 조화롭지 못했다. 아무리 조화를 이루어보려 해도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제2의 IMF와 청년실업 100만을 맞은 지금- 아무리 해도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 시대의 칠수와 만수. 그들이 가진 무수히 응어러진 꿈들은 회색 하늘 어디 쯤을 부유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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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오브 데드: 새벽의 황당한 저주 - Shaun of the Dea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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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명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거둔 '새벽의 저주'가 개봉한 직후로 제목을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지은 듯 싶다. 실제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는 2000년 이후 만들어진 좀비 영화들 중에서 '레지던트 이블'과 '28일후'와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좀비 호러물이다. 
 

이 작품은 의외의 수작이었다. 말하자면 필자는 이 작품을 위 세 작품과 함께 2000년 이후 만들어진 4대 좀비호러걸작으로 칭하고 싶다. 가장 확실한 근거를 대보라면 좀비영화의 대부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조지 로메로 감독이 자신의 좀비 3부작 이후 만들어진 좀비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숀오브데드'를 극찬했던 것!

영화는 코미디와 패러디를 적절히 섞은 스플래터 호러물이지만, 의외로 놀라운 완성도와 창조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며 호러걸작이 될 운명을 타고난다. 제작국가인 영국에서의 대히트는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평단이 이 작품에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칭찬을 받을 만한 작품이다. 감독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배우들의 개성있는 연기력, 그리고 좀비라는 진부한 설정 안에 '엄청난' 메시지를 극적인 방법으로 담아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하루 아침에 좀비의 도시로 변해버린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사투가 주 내용이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뻔한 테마부터 인간과 개인, 사회와 집단의 고찰이라는 대담한 테마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또한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극적이면서도 창조적이라, 감독의 천재성을 충분히 엿볼수 있게 한다.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 중에서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를 들 수 있는데 '숀 오브 데드'는 '데드 얼라이브'와 견주어도 한 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데드 얼라이브가 더 파격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더 깔끔한 작품은 숀 오브 데드다! 

호러 매니아라면 절대 놓쳐선 안될 작품이다.

p.s. 평범한 소시민에게 숨겨진 영웅성의 발현은 특수한 '동기의 부여'일지도 모른다. 충분한 상황 동기는 때로 한 사람의 초라한 소시민에게 숨겨진 영웅성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실 어릴적 '순수한 영혼의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이 발현되는 순간 언제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 단지 이 경직된 사회가 그러한 영웅심을 용납하지 않을 뿐이다. 그저, 좀비처럼 집단에 귀속된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이 작품은 결국 그런 것들에 관한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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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 The Dark Knigh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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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영화 '다크 나이트'의 명대사 중 하나다.

난세의 정국을 비유한 날카로운 표현이다. 영웅은 믿음과 동경의 대상이지만 너무 빨리 죽게 마련이다. 빨리 죽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다. 극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로마제국 말기, 난세에 등장한 시저는 처음에는 민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영웅으로 부상했으나 결국 그는 한번 잡은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고 독재자가 되어버린다. 영웅도 시간이 흐르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악당이 될 수밖에 없다. 악당이 되면 오래도록 권력의 단맛에 빠져지낼 수 있다. 그래서 영웅은 본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을수록 빛을 잃기 마련이다. 악당이 되든지, 빨리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영화 속에서 배트맨은 스스로를 영웅화시키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도시의 정화에 있어 '심벌'과도 같은 존재다. 진짜 영웅이 나타나 주길 바란다. 그러한 영웅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악당이 되어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죽은 자는 영웅이 될 수 있지만, 오래 살아남은 자는 악당이 될 수밖에 없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재창조된 배트맨은 팀버튼이 만든 배트맨보다 더욱 복잡미묘한 정체성을 선보인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될 수 없는 그의 존재는 그래서 '다크나이트' 어둠의 기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은 선악의 구분이 공식처럼 뚜렷하지 않다. 모순적이고 혼란스럽다. 민중은 청렴하고 믿음직한 영웅을 원하지만, 사실 그러한 영웅은 판타지의 세계에서나 존재 가능하다. 세상이라는 공기속에 머물면 영웅도 결국 오염되기 마련이다. 민중들이 원하는 영웅은 등장과 동시에 소멸하거나, 혹은 조작될 수 밖에 없다. 신기루 같은 것이다.

영화 속의 조커는 그러한 신기루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꺼내보이고 싶어 한다. 조커가 원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돈을 태연하게 불태우기도 한다. 돈에 집착하는 악당에게 이런말도 한다. 넌 돈밖에 관심이 없지? 이 도시에는 좀 더 근사한 악당이 필요해. 그런 점에서 조커는 오히려 오래 살아남아 부와 권력을 누리려는 타락한 영웅들보다 더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조커는 그런 오염된 영웅들의 가면을 벗겨내고 싶어한다. 그 상징적 존재로서의 배트맨을 '적'으로 삼는다. 본디 영웅이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란 걸 잘 알기에. 배트맨이 오랫동안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면 그는 가짜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 가면 뒤에는 모순되고 조작된 '가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짜를 향해 말한다. 너는 영웅도, 정의도, 무엇도 아니다. 허상이고, 무기력함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이 영화는 현재 미국에서 연일 신기록을 수입하며 폭발적인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관객과 평단의 평점이 만장일치에 가깝게 만점을 향하고 있다. 썩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상당히 창조적이고,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혹은 꽤나 주관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나 작품성의 측면을 떠나서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닌 듯했다. 러닝타임 2시간35분은 다소 길고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긴 러닝타임에 비해 액션 씬이 너무 적다. 영화도 결국 문화이고, 오락적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을 감안해볼때- 이 영화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창조성과 깊이를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게 무겁고 다소 현학적이다. 버라이어티하고 익사이팅한 시각적 액션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에 많은 실망을 할 수도 있다.

다크나이트가 현재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데에는 역시 히스레저의 죽음이라는 의외의 카드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거나 히스레저의 연기는 좋았다. 잭니콜슨의 조커를 능가한다는 현지의 평은 좀 과장된 듯하지만- 상당한 수준인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다크 나이트' 전체를 통털어 배트맨보다 더욱 눈부신 매력을 발산한 것이 조커였으니- 이 영화 흥행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히스레저다. 그는 죽은 후에도 카드게임의 조커처럼 빛을 발한- '다크나이트'의 진정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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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여우 - Millennium Actres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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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랑을 찾아 꿈속으로까지 달려왔건만, 그는 눈덮인 안개 언덕 저 너머로 또 한번의 그리움만 남기고 사라지네'

나름대로 이 영화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창립 70주년을 맞아 개축을 위해 촬영장을 철거하는 `은영' 영화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타치바나 겐야' 에게 맡긴다. 평소 그녀의 작품을 수십 번이나 봤을 정도로 열혈 팬이었던 그는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녀는 전성기를 누리던 30년 전 갑자기 은막 뒤로 사라진 뒤, 신비에 둘러싸여 온 인물. 타찌바나는 어렵게 찾아낸 그녀에게 그녀가 잃어버린 추억의 열쇠를 내 놓으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퍼펙트 블루'로 이 감독의 놀라운 재능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미야자키 하야오' 종교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곤 사토시는 신선한 자극이라는 표현을 넘어서는 전율의 영상으로 단숨에 매니아층을 확보했다. 실사로 찍었어도 무방했을 '퍼펙트 블루'의 사실적이고도 충격적인 영상에 매료되었던 팬들이라면 '천년여우'에 다시한번 감탄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로맨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판타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범위를 극한으로 넘나드는 각본과 표현의 절대 수위! 언어로는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이 환상적인 영화는 인간의 한계적 시각과 청각으로 미처 좇아가기조차 힘든 경이로움의 서사시다!

시작부터 이렇게 과다한 칭찬을 늘어놓는 데에는 필자로서 정말로 '이런' 애니메이션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것에 대한 감격 때문이다.

 

위에서 잠시 줄거리를 언급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액면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번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을 가슴속에 간직한 한 여인이 있고, 그녀의 순정과 그녀의 열망과 그녀의 그리움이 녹아든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시같이 아름다운 영상속에 질주하듯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무한의 로맨스를 아우르는 것은 곤 사토시 특유의 화려하고 충격적인 연출력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액자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전설적인 여우가 절정의 시기에 돌연 은막을 떠나고 30년간 은둔생활을 한다. 어째서 그녀는 돌연 은막을 떠난 것일까! 그 여배우의 열혈 팬이었던 감독이 그녀의 인생 다큐를 찍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의 입을 열게 한 것은 감독이 그녀에게 건넨 '비밀의 열쇠'이다. 그리고 노여우는 그녀의 과거, 사랑을 찾아 끝없이 헤맸던 벅찬 기억들을 풀어놓는다. 그 때부터 현재와 과거, 심지어 미래까지, 모든 상식적인 시공의 범위는 무너진다. 여우의 일생을 좇아 카메라는 끊임없이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심지어는 직접적인 개입까지 한다. 전국시대부터 에도, 막부 시대, 전쟁과 근대 시대, 나아가 미래의 우주까지, 가슴 속에 순정을 품은 여우의 사랑찾기는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퍼펙트 블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복잡하고 전율적인, 그러나 더욱 치밀하고 세련되어진 퍼즐 게임이 시작된다. 시공간의 해체는 기본이고 현실과 환상, 허구와 진실, 영화 속과 영화 밖, 심지어는 다큐 속과 다큐 밖까지, 가능한 모든 스토리텔링의 문법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기막힌 연출법은 감독의 능수능란하고 감각적인 재능 때문에 전혀 산만하지 않고 꿈 같은 황홀감에 빠지게 한다. 그 무아지경의 마지막에는 얼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미스터리의 답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사랑을 찾아 천년을 헤맨 여우의 스토리가 우리네 가슴속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불변의 진리 중 하나였음을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밀의 열쇠'로 우리의 가슴 속을 열어보게 되고, 우리의 일상과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벅찬 감동 속으로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마법같은 연출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장황한 미사여구가 사실상 이 영화에게는 무색할 정도로 그 신비로움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서야 어찌 그 터질 듯한 무한의 감각을 한낱 글자로 적어낼 수 있으랴!

 

'퍼펙트 블루'의 충격을 사랑한 팬들이라면 '천년여우'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필자가 최고의 저패니메이션으로 꼽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한치도 뒤짐이 없는,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공동 1위로 할 만큼, 걸작 중의 걸작이다! 걸작 중의 걸작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두번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2001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같은 해에 만들어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제5회 일본 미디어예술영화제에서 공동대상을 수상했고,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캐나다 판타지 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치요코의 달리는 모습이다. 그녀는 무수한 모습으로, 무수한 방법으로 사랑을 찾아 달리고 또 달린다. 특히 극후반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달리고 또 달려 눈덮인 홋카이도, 땅끝까지 도달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이제까지 그녀의 마음 속에, 피 속에, 시간 속에, 그리움 속에 녹아있던 모든 열정의 응어리들이 다시한번 풀로 가동되며 그녀를 한없이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하일라이트였다. 그 때 흘러나온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하고 빠른 교차편집, 그리고 반복되는 이미지의 세련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압권이었다!

'퍼펙트 블루'에서 처럼 관객들에게 작은 파문과 여운을 던지며 새로이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열정'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은 곧 영화이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아닌가 싶다!

 

첫사랑의 열정을 간직한 어리고 순수한 여배우는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사랑을 간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사랑하는 이가 혹시 보아주길 갈망하며 영화를 찍고 또 찍었다. 그것은 그녀의 예술이었고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의 인생이었다. 우주의 어느 별 한 가운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비밀의 열쇠'의 주인공, 그를 찾아 우주까지 달리는 그녀의 목마른 그리움과 열정은 그녀를 이루는 전부였고, 그 순간 그녀는 언제까지나 만월(滿月)을 꿈꿀 수 있는 14일째의 달(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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