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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그런 때가 있었다. 늘 눈물을 보이지 않게 그렁거리며 살았던 때, 업무 중에도 깊은 속울음이 올라와 계속 밀어 넣어야 했던 때, 세상은 행복한데 나만 이방인처럼 외따로 떨어져 이 세상 어찌 살아야 하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상실의 아픔을, 애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절망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나의 아픔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더욱 처절하게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 접한 상실이요, 절망이었다.
그때의 오랜, 어둠의 시간 동안 나는 그만큼의 시간을 잃었고 사람들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다. 한 사람을 잊고 무뎌지는 것에는 그 사람을 사랑한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아니, 잊혀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 한 구석 저 깊은 곳에 옮겨졌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빼어내려야 뺄 수 없는 가시처럼 깊이 박혀 서로의 마음 속에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그 아픔을 다시 만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마저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주인공들의 "등을 토닥이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한번 어긋나 손을 못잡고 얼굴을 돌리고 사는 슬픔" 이 곧 나의 슬픔인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제서야 나는 나의 상실을 "애도"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성숙에 이른 것일까..
은서는 완과 세에게, 그리고 그의 동생 이수에게마저 하나 뿐인 고향이다. 각기 다른 고향의 모습으로 그녀를 품고 있기에 각각의 아픔의 모습도 다르다. 완에게 사랑을 느껴버린 은서는 아픈 고향의 기억을 벗어 나려고 은서를 모질게만 대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은서를 사랑하는 세는 완을 바라보는 은서의 등만 바라본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같은 아픔을 간직한 동생 이수와의 애틋함..
완의 사랑을 잃고 은서는 일 년 후에 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그 상실의 아픔은 세를 곁에 두고도 절망하는 삶을 살게 한다. 세가 그러한 은서의 아픔을 알고도 결혼을 한 것은, 그 아픔까지도 다 품어 주려고 한 것이었을테고, 그리고 그렇게라도 은서를 자기 곁에 두려 한 것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후자가 더 큰 이유였을지도.
사랑은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간절한 소망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도 아니 만나고 평생을 마음에만 품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뒤늦게 은서가 자기의 전부인 것을 깨달은 완도, 세의 사랑이 떠난 후에야 세에 대한 마음이 완과 이수를 향한 마음 그 이상인 것을 깨달은 은서도.. 그저 위로할 밖에. 좋은 시절에, 좋은 때에 만나 사랑하지 못했음을 그저 위로할 밖에..
지나간 사랑이 기억이 나서 울기에는 시간이 충분히 흘렀고, 나는 그녀, 은서 때문에 울었다. 그 마음이 알겠어서 울었고, 그 어찌할 수 없는 슬픈 식욕으로 불균형적으로 살이 쪄버린 그녀가 못견디게 아파서 울었다.
"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
끝까지 자기 편이 되어 줄거라고 믿었던 이마저 등을 돌렸을 때에 은서는 그만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살아갈 힘을 잃지 않으려고 자신이 믿는 기억들을 찾아 헤맸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을 지켜야 할 사람은 자신뿐임을 깨닫지만 그 깨달음으로 다시 일어서기엔 이미 늦은 뒤였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은서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절망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그녀와 동일한 감정들을 끄집어 내게 될 것이다. 이제는 화해해야 할 그 아픈 감정들과 대면하면서 은서가 나의 슬픔과 절망과 아픔과 그 기억까지도 가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아픔으로 인해 많이 성숙했고, 그 아픔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되었다. 나도 은서처럼 마음까지 놓았을지 모를 그 때에,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준 그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하여 지금 나, 비록 혼자일지라도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580쪽)